밤편지

 
                  김남조


편지를 쓰게 해다오
 

이날의 할 말을 마치고
늦도록 거르지 않는
독백의 연습도 마친 다음
날마다 한 구절씩
깊은 밤에 편지를 쓰게 해다오


밤기도에
이슬 내리는 적멸(寂滅)을
촛불빛에 풀리는
나직이 슾한 악곡(樂曲)들을
겨울 침상에 적시이게 해다오
새벽을 낳으면서 죽어가는 밤들을
가슴 저려 가슴 저려
사랑하게 해다오


세월이 깊을수록
삶의 달갑고 절실함도 더해
젊어선 가슴으로 소리내고
이 시절 골수에서 말하게 되는 걸
고쳐 못 쓸 유언처럼
 

기록하게 해다오
날마다 사랑함은
날마다 죽는 일임을
이 또한
적어두게 해다오
 

눈 오는 날엔 눈발에 섞여
바람 부는 날엔 바람결에 실려
땅 끝까지 돌아서 오는
영혼의 밤외출도
후련히 털어놓게 해다오


어느 날 밤은
나의 편지도 끝날이 되겠거니
가장 먼
별 하나의 빛남으로
종지부를 찍게 해다오
....................................................

한 구비 돌아
또 한 고비를 넘고
또 한 모퉁이를 돌아
또 한 고개를 넘고...


잔칫날 찾아가는 기분으로
한걸음 한걸음 옮기며
덩실덩실 어깨춤 추며
흥타령을 주절댄다


내일도 또 감사한 하루를 주시겠지
다시 저 너머 고갯마루로 눈길을 옮기고
언제까지일지 알 수 없는 여정을
떠날 채비를 단단히 할 것이다.

 

뒤돌아 볼 새없이
주저앉아 신세한탄 할 여가없이
바지런히 걸음을 재촉할 것이다.


봇짐 든든히 싸 메고
마음 짐은 다 내려놓고
감사한 새 날을 향해
흥타령 부르며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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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탁번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
밤나무 밑에는
알밤도 송이밤도
소도록이 떨어져 있다
 

밤송이를 까면
밤 하나하나에도
다 앉음앉음이 있어
쭉정밤 회오리밤 쌍동밤
생애의 모습 저마다 또렷하다
 

한가위 보름달을
손전등 삼아
하느님도
내 생애의 껍질을 벗기고 있다
........................................................

날마다 구별해야 하는 일이 생기고,
매 순간마다 선택의 기로에 선다.
이제껏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은 그 순간들에
나는 어떻게 구별했고 어떤 선택을 했었는지...


그것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각기 다른 생의 출발점에서부터
내가 다다른 이 곳까지의 여정은
어쩌면 내 부족한 지혜의 결과이며
선별하는 지혜를 끊임없이 구해야 함을 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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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어(北魚)


                          김종길


퇴근길 무던히 지쳐
버스에서 내려서 접어든 골목,


과일가게며 채소가게며 생선가게 앞
길바닥에 앉아 순대나 콩나물을 파는 아주머니들,
손수레를 세워놓고 강냉이를 튀기거나 솜사탕을 말아내는 아저씨들.


벌어먹고 사는 길도 가지가지―
나는 교실에서 손에는 책과 백묵을 들고,
입으로는 연신 지껄여대며, 때로는 유식한 서양말도 섞어가며,


별것도 아닌 물건을 자랑하며 외쳐대는
저 넉살좋은 장사꾼처럼 신나게 떠드는 것으로
월급도 받고 상여도 받고 곧잘 살아가고 있다.


노동력도 상품이라면
나 자신이 바로 상품이 아닌가!
정년을 코앞에 두었으니, 그것도 폐품 직전의 상품.


저 생선가게가 팔다 남긴,
꽂이에 꿰인 비쩍마른 북어.
그 감지도 못한 흐릿한 눈깔에 얼비친


겨울 하늘,
찬바람 이는
해질녘 겨울 하늘.
.............................................................

가끔 일상이 지겹다. 별 것 아닌 하루...
하지만 그 하루가 실상은 기적임을 알 게 되는 순간이 간혹 있다.


오늘 비참한 한 사람의 죽음을 보고서야
보잘 것 없는 내 하루에 감사하고
다른 이의 뼈아픈 고통을 술자리 내내 듣고서야
이제까지의 내 고민이 별 것 아니었음을 안다.


며칠 간의 어리석은 고민을 한 잔 가득 따라 벌컥벌컥 마시고
입김마저 서걱거리는 밤거리를 나서다

양 팔을 들어 올려 잔뜩 움츠렸던 어깨를 둥글둥글 풀어 본다.


까짓거... 사는 거 별 것 없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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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저녁


                               이동순


오늘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길에 떨어진 나뭇잎들이 우수수 몰려다녔습니다
그대에게 전화를 걸어도 신호만 갑니다
이런 날 저녁에 그대는 무얼 하고 계신지요
혹시 자기 자신을 잃고 바람 찬 거리를 터벅터벅
지향 없이 걸어가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이 며칠 사이 유난히 수척해진 그대가 걱정스럽습니다
스산한 가을 저녁이 아무리 쓸쓸해도
이런 스산함쯤이야 아랑곳조차 하지 않는
그대를 믿습니다 그대의 꿋꿋함을 나는 믿습니다.
..........................................................

느닷없는 비바람 소리에 깜짝 놀라 잠을 깨다.
드르르르륵...
문을 여니 물비릿내가 물씬 풍기고
새벽 찬바람이 소매깃을 시리게 파고 들더니
잠이 덜 깬 등짝을 선득하게 긁는다.


어제 종일토록 쓸어모았던 낙엽이며 검불이
사방에 흩어져 마당이 온통 난장판이 되다.


젖은 낙엽을 쓸기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닌데...
어제 늦은 어스름에라도 말끔히 태워버렸어야 했는데...
드르르르륵...
후회를 닫고 더듬더듬 이불을 끌어다 덮는다.


빗줄기가 서걱서걱 내린다.
이제 겨울이 아주 바짝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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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함에 대하여 - 비망록


                                              김경미


그대 쓸쓸함은 그대 강변에 가서 꽃잎 띄워라
내 쓸쓸함은 내 강변에 가서 꽃잎 띄우마
그 꽃잎 얹은 물살들 어디쯤에선가 만나
주황빛 저녁 강변을 날마다 손잡고 걷겠으나
생은 또 다른 강변과 서걱이는 갈대를 키워
끝내 사람으로는 다 하지 못하는 것 있으리라
그리하여 쓸쓸함은 사람보다 더 깊고 오랜 무엇
햇빛이나 바위며 물안개의
세월, 인간을 넘는 풍경
그러자 그 변치 않음에 기대어 무슨 일이든 닥쳐도 좋았다
.................................................................

한 번 왔다 가는 것이 생이니,
한 번 지나간 것
다시 되돌아 오는 일은 없겠지.


시간은 물처럼 흐르고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
이생에서 다하지 못하는 것
하고 많아
우리도 저와 같아 유수(流水)처럼
흘러만 흘러만 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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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해 
   
 잠을 잘 시간에만 길이 보인다
꿈속에서만 세상을 걸어다녔는데
새벽녘에는 길이 다 지워져 있다
특히 잎 지는 가을밤은 더욱 그러하다
지상의 시간이 만든
벼랑과 벼랑 사이
떨어지는 잎새를 따라가 보면
아, 그 시각에만 환하게
외등이 켜져 있다
.................................................

텅 빈 무대

군데군데 희미한 조명이 하나씩 켜진다.


조명이 밝아지며 등장하는 10살쯤된 남자 아이와 아빠
어두워진다.
스무살쯤의 멋진 청년이 머리를 깎는다
어두워진다.
시위대, 전경, 폭행, 욕설과 화염병, 돌, 쇠파이프
너무나 폭력적인 장면을 담은 슬라이드 필름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어두워진다.
사랑, 기쁨, 희열, 열망, 이별, 슬픔, 아픔, 고통, 외로움, 기다림 수많은 단어들의 느낌이 감각되고
기억조차 희미해진 기억들이
조명이 켜질 때마다 한 장면씩 펼쳐지거나 혹은 겹쳐진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무언극,
무성영화...
어두워진다


서서히 주위가 밝아진다.
잠을 깼다 아니 연극이 끝났다.


방금 지나간 시간이 아무 의미 없음을 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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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쓰다


                          정끝별

 

파나마A형 독감에 걸려 먹는 밥이 쓰다
변해가는 애인을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고
늘어나는 빚 걱정을 하며 먹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달아도 시원찮을 이 나이에 벌써
밥이 쓰다
돈을 쓰고 머리를 쓰고 손을 쓰고 말을 쓰고 수를 쓰고 몸을 쓰고 힘을 쓰고 억지를 쓰고 색을 쓰고 글을 쓰고 안경을 쓰고 모자를 쓰고 약을 쓰고 관을 쓰고 쓰고 싶어 별루무 짓을 다 쓰고 쓰다
쓰는 것에 지쳐 밥이 먼저 쓰다


오랜 강사 생활을 접고 뉴질랜드로 날아가버린 선배의 안부를 묻다 먹는 밥이 쓰고
결혼도 잊고 죽어라 글만 쓰다 폐암으로 죽은 젊은 문학평론가를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다
찌개그릇에 고개를 떨구며 혼자 먹는 밥이 쓰다
쓴 밥을 몸에 좋은 약이라 생각하며
꼭 꼭 씹어 삼키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고,
떼꿍한 눈이 머리를 쓰다듬는 저녁
목메인 밥을 쓴다
........................................................................

세상을 덮을만큼 무거워진 눈꺼풀을 잠시 닫고
세상을 흔들어대는 머리를 베개에 가만히 뉘였다.
방바닥이 그만 푹 꺼져내린다.


언제 잠들었나? 얼마나 잤을까?
잠결에 누군가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어쩌면 코고는 소리였을지도 모르겠다
시계보다 먼저 눈에 띈 거울
가만히 들여다 보고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내린다.


다행이다.
방바닥이 꺼지지도 않았고,
시간도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잠시 다시 눈을 감았다.

수백개의 톱니바퀴가
시계바늘 한 눈금을 움직이기 위해
일제히 돌기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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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인


모진 비바람에
마침내 꽃이 누웠다


밤내 신열에 떠 있다가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들창을 미느니


살아야지


일어나거라, 꽃아
새끼들 밥 해멕여
학교 보내야지

.............................................................

사는 이유가 별스런 것이 있지 않고
산다는 게 별다른 것이 아니라
그저 일상이, 매순간이 모두 삶의 이유지.


죽지못해 살면 안되지.
한 번 살아봐야 하는 것이지.


얼마나 귀한 순간이며
얼마나 감사한 삶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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