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용택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나 홀로 걷는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지기 전에
그대가 와서 반짝이는 이슬을 텁니다.


나는 캄캄하게 젖고
내 옷깃은 자꾸 젖어
그대를 돌아봅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마르기 전에도
숲에는 새들이 날고
바람이 일어
그대를 향해 감추어 두었던
길 하나를 그대에게 들킵니다.
 

그대에게 닿을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내 마음 가장자리에서
이슬이 반짝 떨어집니다.

 
산다는 것이나
사랑한다는 일이나 그런 것들이
때로는 낯설다며 돌아다보면
이슬처럼 반짝 떨어지는
내 슬픈 물음이 그대 환한 손등에 젖습니다.
 

사랑합니다.
숲은 끝도 없고
인생도 사랑도 그러합니다.

 
그 숲,
그 숲에 당신이 문득
...........................................................

간밤에 휘몰아치던 비바람도 잦아들고
빗줄기도 어느새 차분해졌다.


길이 모두 젖어있다.
그 길을 내려다 보며 흥얼거리는 노래
노래의 제목도 부른 이도 기억나지 않는다.


생각해 보니

한동안 노래를 부른 적이 없다
아무도 듣는 이 없는 노래


문득 누군가에게 얘기해 주고 싶다
길이 모두 젖어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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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를 쓰는 건


                            조병화


내가 시를 쓰는 건
나를 버리기 위해서다
나를 떠나기 위해서다
나와 작별을 하기 위해서다


하나를 쓰고 그만큼
둘을 쓰고 그만큼
셋을 쓰고 그만큼
나를 버리기 위해서다


너에게 편질 쓰는 건
언젠가 돌아올 너와 나의 이별
그것을 위해서
너를 버리기 위해서다
너를 떠나기 위해서다
너와 작별을 하기 위해서다


아무렇게나 버리기엔 너무나 공허한 세상
소리없이 떠나기엔 너무나 쓸쓸한 우리
그냥 작별하기엔 너무나 깊은 인연


내가 시를 쓰는 건
하나 하나 나를 버리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나를 떠나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나를 잊기 위해서다


그와 같이
내가 네게 편질 쓰는 건
머지않아 다가올 너와 나의 마지막
그 이별
그걸 위하여


하나 하나 너를 버리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너를 떠나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너를 잊기 위해서다.
..........................................................

시인은 사랑을 노래하는 이다.
시인은 마음을 노래하는 이다.
시인은 삶을 노래하는 이다.
시인은 세상을 노래하는 이다.


입하나 뻥끗 않고 노래하는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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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오지


                  이문재


탱탱한 종소리 따라나가던
여린 종소리 되돌아와
종 아래 항아리로 들어간다
저 옅은 고임이 있어
다음날 종소리 눈뜨리라
종 밑에 묻힌 저 독도 큰 종
종소리 그래서 그윽할 터
 

그림자 길어져 지구 너머로 떨어지다가
일순 어둠이 된다
초승달 아래 나 혼자 남아
내 안을 들여다보는데
마음 밖으로 나간 마음들
돌아오지 않는다
내 안의 또 다른 나였던 마음들
아침은 멀리 있고
나는 내가 그립다

..............................................................

가끔 올리는 내 일상의 기도처럼

문득 네 생각이 나면

손을 모으거나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고

잘 살아라 한다.

 

오늘도

생각했다,

잊는다.

산수유나무의 농사


                              문태준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뜨리고 있다
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되 무게의 그늘이다
..............................................................

무엇이든 어디 한 번에 다 되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한 발 한 발,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다보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되겠지...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다
그걸 꽃이 핀 걸 보고서야 알았는데...


그런가 싶으면 또
온 등짝이 시릴만큼
날이 춥다.


오늘도 그런 날이어서
봄이 오긴 왔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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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남정네 넷의 여행길이 어찌 수상쩍지 않았겠는가?
이제껏 그저 삶의 짐 묵직하게 져 온 수많은 이들 중,
그나마 마음이 통한다고 생각했던 이들 몇몇이 함께 길을 떠나 볼까 결심을 했던 터라

별스런 준비도 없이 그저 훌쩍 떠났다.


 

1박 2일동안 640여 km의 짧지 않은 행군이었으나 무사 무탈하게 적잖이 즐거웠던 여행길이었다.
영월, 정선... 곳곳에 펼쳐진 대한민국의 절경에 감탄 또 감탄하다 보니 한 발 한 발이 참으로 가벼웠다.

참 좋은 이들과 함께 한 간밤의 가벼운 발광(?)의 피로도 모두 잘 싸가지고 돌아왔다.

이별


                    오탁번


이제는 친구들을 만나는 일이
그전 같지 않아
삼겹살 곱창 갈매기살 제비추리
두꺼비 오비 크라운
아리랑 개나리 장미 라일락
비우고 피우며 노래했는데
봄 여름 지나 가을 저물도록
얼굴 한 번 못 보다가
아들 딸 결혼식장에서나
문상간 영안실에서나
오랫만에 만나 인사를 나누지
오늘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날까
영영 오지 않을 봄을 기다리듯
다 헛말인 줄 알면서도
자주 자주 만나자
약속하고 헤어지지
그래그래 마음으로야
좋은 친구 자주 만나
겨울강 강물소리 듣고 싶지만
예쁜 아이 착한 녀석
새 식구로 맞이하는
아들 딸 결혼식장에서나
그냥 그렇게 또 만나겠지
이제 언젠가
푸르른 하늘 노을빛으로 물들고
저녁별이 눈시울에 흐려지면
영안실 사진틀 속에
홀로 남아서
자주자주 만나자고
헛 약속한 친구를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겠지
다시는 못 만날 그리운 친구야
죽음이 꼭 이별만이랴
이별이 꼭 죽음만이랴

...................................................

언젠가부터 만나는 일보다 헤어지는 일이 잦아졌다.
다음엔 꼭 만나자 약속하던 손길이
마지막 온기였던 적도 있다.


이젠 그런 헛 약속이 더 많아지겠지.
그래도...
또 만나자 약속을 하지 않고 돌아서서는 안되겠지.
그러면 더 서운하겠지.


보고 싶을 때면
언제든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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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물리학


                        박후기


나는 정류장에 서 있고,
정작 떠나보내지 못한 것은
내 마음이었다
안녕이라고 말하던
당신의 일 분이
내겐 한 시간 같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생의 어느 지점에서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당신은
날 알아볼 수 없으리라
늙고 지친 사랑
이 빠진 턱 우물거리며
폐지 같은 기억들
차곡차곡 저녁 살강에
모으고 있을 것이다
하필,
지구라는 정류장에서 만나
사랑을 하고
한 시절
지지 않는 얼룩처럼
불편하게 살다가
어느 순간
울게 되었듯이,
밤의 정전 같은
이별은 그렇게
느닷없이 찾아온다
...............................................

한동안 연락이 없었던 친구에게
이젠 멀리 떠난다는
문자 한 통이 반짝 왔다.


잠깐동안 그걸 보다가
차라리 문자를 보내지않았더라면 좋았겠다 싶었다.


답장을 꾹꾹 눌러 보냈다.
잘 살아라...

버튼을 꾹꾹 누르는 동안,
어딘가 꾹꾹 뭉쳤던 것이
눈구멍으로 뜨끈하게 솓더니
버썩 마른 볼을 타고 주르륵 흐른다.


다시 답장이 오진 않았지만
자꾸만 친구 목소리가 귓가를 맴맴 돈다.
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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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


                    정지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은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러갔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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