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통


                이준관


아픈 데는 어떠냐고
걱정스레 묻는 친구의
전화 한 통


보고 싶다
단 한 줄 적혀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 한 통


인생에서
그 한 통이면
충분하다
물 한 통처럼
..................................

난 네 편이다
그 한마디면
충분하다.


누구 딸이냐 물으면
엄마 딸이라고
주저없이 답해주는
진실한
맘 한 통...

시가 씌어지지 않는 밤


                                    이재무


늦도록 내 눈을 다녀간 시집들 꺼내놓고 다시 읽는다
한때 내 온몸의 가지에 붉은 꽃 피우던 문장들
책 속 빠져나와 여전히 흐느끼고 있지만 울음은
그저 울음일 뿐 더 이상 마음이 동요하지 못한다
마음에 때 낀 탓이리라 돌아보면 걸어온 길
그 언제 하루라도 평안한 날 있었던가
막막하고 팍팍한 세월 돌주먹으로 벽을 치며
시대를 울던, 그 광기의 연대는 꿈같이 가고
나 어느새 적막의 마흔을 살고 있다
적을 미워하는 동안 부드럽던 내 마음의 순은
잘라지고 뭉개지고 이제는 적보다도 내가 나를
경계하여야 한다 나도 그 누구처럼
적을 닮아버린 것이다 돌멩이를 쥘 수가 없다
과녁이 되어버린 나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고 아파트를 장만하는 동안
뿌리 잃은 가지처럼 물기 없는 나날의 무료
내 몸은 사랑 앞에서조차 설렘보다는
섹스 쪽으로 기울고 있다 질 좋은 밥도
마음의 허기 끄지 못한다
시가 씌어지지 않는 밤 늦도록
잘못 살아온, 지울 수 없는 과거를 운다

...............................................................................

무엇 하나 올곧게 똑부러지게 하는 일이 없다.
언제나 두루뭉술...
언제 그런 적이 있었는지 자신에게 반문해보니
역시 어정쩡한 대답이 돌아온 듯 만듯 되돌아온다.
늦은 밤,
시인의 회한이 한줄 한줄
고스란히 내 맘에 전해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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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편지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오후 내내 눈이 내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장면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똑같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공간을 가득 메운
하얀 눈가루 눈가루...


눈은 내리는 것이 아니라
공간 가득 뿌려져 있는 듯 했다.
이러다 눈 앞이 모두 하얗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고,
아무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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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로 서서


                      이재무


겨울을 견디기 위해
잎들을 떨군다.
여름날 생의 자랑이었던
가지의 꽃들아 잎들아
잠시 안녕
더 크고 무성한 훗날의
축복을 위해
지금은 작별을 해야 할 때
살다보면 삶이란
값진 하나를 위해 열을 바쳐야 할 때가 온다.
분분한 낙엽,
철을 앞세워 오는 서리 앞에서
뼈 울고 살은 떨려 오지만
겨울을 겨울답게 껴안기 위해
잎들아, 사랑의 이름으로
지난 안일과 나태의 너를 떨군다.

.......................................................

살다보면...
삶이란...
값진 하나를 위해
열을 바쳐야 할 때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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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김지하


지나가는 걸 붙들 순 없다
별이 뜨길래
밤하늘 쳐다보고
서편으로 달이 지길래
서편을 노을마다 뛰는 가슴으로
미리 향했던 때가 지나간다

 
때론 국밥집
때론 앉은뱅이 악사를 찾아
공연히 장터 헤매는 요즈음
외마디 기인
비명이 나를 뺏던 그때마저
지나간다 지나간다

 
조금 낮은 가을바람에도
가죽장갑을 끼는 요즈음
나 없이
내가 나를 생각던 때는
훨씬 지나 저기 달아난다

 
속으로 묻건대
무엇이 또 남아
언제 나를 또 지나갈까

 
지나가는 걸
스스로 지나칠 일만 남았다.
........................................

시가
내 일상이 되고
힘이 되었다.

 

아직 읽지 못한
천 편의 시가 남았다.

 

내게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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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

 

                 김용택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이름 하나가 시린 허공을 건너와
메마른 내 손등을
적신다
........................................................................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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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에서 띄운 배


                        박남준


부는 바람처럼 길을 떠났습니다
갈 곳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가 닿을 수 없는 사랑 때문도 더욱 아닙니다
그 길의 길목에서 이런저런
만남의 인연들 맺었습니다


산 넘고 들을 지났습니다
보이지 않는 길 끝에서 발길 돌리며
눈시울 붉히던 낮밤이 있었습니다
그 길가에 하얀 눈 나리고
긏은비 뿌렸습니다
산다는 것이 때로 갈 곳 없이 떠도는
막막한 일이 되었습니다


강가에 이르렀습니다
오래도록 그 강가에 머물렀습니다
이 강도 바다로 이어지겠지요
강물로 흐를 수 없는지
그 강엔 자욱이 물안개 일었습니다


이제 닻을 풀겠어요
어디 둘 길 없는 마음으로
빈 배 하나 띄웠어요
숨이 다하는 날까지 가슴의 큰 병
떠날 리야 있겠어요
제 마음 실어 띄울 수 없었어요
민들레 꽃씨처럼 풀풀이 흩어져
띄워 보낼 마음 하나 남아 있지 않았어요


흘러가겠지요
이미 저는 잊혀진 게지요
아 저의 발길은 내일도
배를 띄운 강가로 이어질 것이어요
............................................................

그렇게 강물은
시간은
추억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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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초


                            오인태


사연 없이 피는 꽃이 어디 있겠냐만
하필 마음 여린 이 시절에 어쩌자고
구구절절 피어서 사람의 발목을 붙드느냐.
여름내 얼마나 속끓이며
이불자락을 흥건히 적셨을 길래
마른 자국마다 눈물 꽃이 피어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치대느냐.
꽃이나 사람이나 사는 일은
이렇듯 다 구구절절 소금 같은 일인 걸
아, 구절초 흩뿌려져 쓰라린 날


독한 술 한잔 가슴에 붓고 싶은 날
............................................................

땀과 눈물
흙과 바람
열정과 정염
인내와 고독
그리고 기다림, 또 기다림


어느 꽃이라고 그냥 뜻 없이 피겠는가?
어느 누구의 사랑이 그냥 이루어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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