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거미

                     김영랑


가을날 땅거미 아름픗한 흐름 우를
고요히 실리우다 훤뜻 스러지는 것
잊은 봄 보랏빛의 낡은 내음이뇨
임으 사라진 천리 밖의 산울림
오랜 세월 시닷긴 으스름한 파스텔
애닯은 듯한
좀 서러운 듯한


오! 모두 못 돌아오는
먼― 지난날의 놓친 마음
....................................................

그리움 조각 하나 남아있지 않은
가을 하늘의 푸르름은
낙엽 수북이 쌓인 공원 벤치에서
아무 말없이 네가 전한
마지막 이별 편지만큼 시리다.


반듯하게 딱 반 접힌 흰 편지지가 전한
날카로운 가슴 시림과 가녀린 떨림이
아스라히 멀어져만 가는 푸른 가을 하늘 어디엔가 남아있기를...


아, 자꾸만 자꾸만 흐려지던,
무어라 적혀있었는지 지금은 기억의 흔적조차 남지 않는
편지지에 빼곡하던 글자들이 오늘은 왜 이리 그리운가?


오늘 하늘은 또 왜 이리 푸른가?

가을에는


                         박제영


가을에는 잠시 여행을 떠날 일이다
그리 수선스러운 준비는 하지 말고
그리 가깝지도 그리 멀지도 않은 아무데라도


가을은 스스로 높고 푸른 하늘
가을은 비움으로써 그윽한 산
가을은 침묵하여 깊은 바다


우리 모두의 마음도 그러하길


가을엔 혼자서 여행을 떠날 일이다
그리하여 찬찬히 가을을 들여다 볼 일이다.

..............................................................

어디론가 문득 떠나고 싶은 날씨
적당히 밝고 또 적당히 흐린...


차츰 제 잎 덜어내는 나뭇가지도
그렇게 길가에 흩어진 낙엽들도
적당히 어수선하고 또 적당히 아름다운...


여러가지로 어지러운 내 마음도
혼자이지만 따뜻한 차 한잔 마주하고 앉은 이 자리도
적당히 쓸쓸하고 또 적당히 온화한...


이제 한 번 정리해봐야겠다.


올해가 어떠했는지...
내가 어땠는지...
우리가 어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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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동 (入冬)

 

                           이성선


잎이 떨어지면 그 사람이 올까
첫눈이 내리면 그 사람이 올까
십일월 아침 하늘이 너무 맑아서
눈물 핑 돌아 하늘을 쳐다본다.
수척한 얼굴로 떠돌며
이 겨울에도 또 오지 않을 사람

 


가을 편지

                           이성선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어 가고 있습니다
그 빈 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 못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 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 못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씩 비어 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 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고, 바람이 거세지면서

가로수 은행잎이 한 번에 우수수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길바닥은 무척 화려해졌습니다.

온통 노란 황금빛 낙엽길을 걷는 것도

운치있고 즐거운 일입니다.

 

당신과 같이 그 길을 걷고 싶어졌습니다.

매끈한 은행잎 하나 주워서

호호 불어서는 주머니에 담았습니다.

이 가을에

 

                                   이수인

 

이 가을에

그리운 얼굴 하나 없는 사람은 슬프다

 

가을이 오면

오랜 기다림 속에

피어난 해바라기처럼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이 있다

 

가을이 깊어

발 밑에 뒹구는 낙엽 속에서

보고 싶은 얼굴이 하나 있다면

그 사람은 마음의 등불 하나

밝히고 사는 사람이다

 

이 가을에

간절한 바람처럼

보고 싶은 얼굴 하나 있다

 

가을이 깊어지면

스산함 저 뒤편에

따스한 마음의 등불 하나 밝힌다

...........................................


가을엔

 

                        이수인

 

가을엔

사람하나 보내도 좋다

눈 감고 있어도 피부로 느끼는 스산한 가을 앞에서

우리는 모두 시인이다

 

낙엽이 떨어질 때

가슴에 묻어둔 사랑도 함께 보내라

마음에 담아둔 미움도 털어 버려라

낙엽이 쌓이는 초라한  길모퉁이에

가난한 연인들의 발밑에 밟히며

행복한 웃음을 듣고

이별한 연인들의 슬픈 사연도

들어주는 한 줌 낙엽이 되라

 

가을엔

사람하나 맞이해도 좋으리

가고 난 빈자리에

덩그라니 남아있는 텅 빈 의자

아름다운 저녁노을 바라보며

홀로 기도하는 여인보다

마주 보는 연인들의 눈길이

가을엔 한결 아름다우니

................................................

가을이 깊어가는 것은
 
점점 푸르러지는 하늘의 깊이로

낙엽이 구르는 소리로

가을비의 시린 감촉으로

비어가는 나뭇가지의 헐벗음으로

그리고 가슴 한 구석 묻어두었던 그리움의 발효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가을에 한 번쯤 만나보고 싶은 시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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