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김명은


어떤 기다림이 지쳐 무료가 되는지,
가끔씩 개를 끌고 골목 끝으로 나가
지나가는 차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눈이 시리도록 깜박이는 신호등 네 길거리지만
나는 너의 행간이 아니라서
비켜섰다가 돌아오는 길,
겨우내 키를 움츠려 넘보지 못했던
엄동의 담장 저쪽, 못 지킨 약속 하나 있어
끝끝내 봄 밀려오는지,
까치발로 그 추위 다 받들어
가장 높은 가지 끝으로 목련 한 송이 피어난다.
다시 며칠 사이에도 내내 할 일이 없어
개를 끌고 골목 끝으로 나가면
건답 위 봄 파종같이 뿌려진 인파들,
무더기 밀린 약속 한꺼번에 치러내려는 듯
만개의 목련 길바닥까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다.
세상은 참 바쁘다, 어느 사이 나는
얼음의 문신 홀로 몸 속에 새겨넣었는지.
해동이 안 되는 기다림과 권태 속으로
느릿느릿 시건이 가 닿는 저 건너 공터 어디쯤
겨우내 짓고 있었던 마음의 폐허,
그 얼음집 다 세우기도 전에
어느개 끈을 끊고 개가 사라져버린 골목 입구를
혼자서, 혼자서 우두커니 지켜본다.
......................................................................

시인은 두 눈으로 참 많은 것을 본다.
몸 하나로 참 많은 것을 느낀다.


누구나에게 주어지는 한 순간,
이미
스무 줄을 훌쩍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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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편지  
 

                          김명은


그대에게 나에게
오가지 못한 말
부딪치지 못한 눈빛
저 달이 머금었다 했습니다


먹구름 가득 낀 날
그믐밤은 어쩌라고
슬픔의 진주
희망을 잡은 듯 하셔요


자다 깬 달콤한 꿈
다시 누우면 그 꿈 아득하여
아쉬움 남는 일
겨울날 바람꽃 만큼입니다


달빛 비추는 세상에는
단 한사람 때문에 잠들지 못한
애처로운 가슴 하도 많아


하얀 입김이 끌고 다니던
나의 어둔 그림자
그대 밟는 새벽길
차가운 이슬로 내려앉았습니다

...................................................................

오늘 새벽엔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 앉았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한창 기승을 부렸다.
다시 꽁꽁 싸맨 걸음 걸음...


날이 풀리기를 기다리는 건,
바싹 마른 나뭇가지 속에 움이 그렇고,
살짝 들 뜬 땅속에 새싹이 그렇고,
매서운 독기가 좀 가신 새벽 바람이 그렇다.


오랜 기다림의 싹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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