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용택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나 홀로 걷는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지기 전에
그대가 와서 반짝이는 이슬을 텁니다.


나는 캄캄하게 젖고
내 옷깃은 자꾸 젖어
그대를 돌아봅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마르기 전에도
숲에는 새들이 날고
바람이 일어
그대를 향해 감추어 두었던
길 하나를 그대에게 들킵니다.
 

그대에게 닿을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내 마음 가장자리에서
이슬이 반짝 떨어집니다.

 
산다는 것이나
사랑한다는 일이나 그런 것들이
때로는 낯설다며 돌아다보면
이슬처럼 반짝 떨어지는
내 슬픈 물음이 그대 환한 손등에 젖습니다.
 

사랑합니다.
숲은 끝도 없고
인생도 사랑도 그러합니다.

 
그 숲,
그 숲에 당신이 문득
...........................................................

간밤에 휘몰아치던 비바람도 잦아들고
빗줄기도 어느새 차분해졌다.


길이 모두 젖어있다.
그 길을 내려다 보며 흥얼거리는 노래
노래의 제목도 부른 이도 기억나지 않는다.


생각해 보니

한동안 노래를 부른 적이 없다
아무도 듣는 이 없는 노래


문득 누군가에게 얘기해 주고 싶다
길이 모두 젖어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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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

 

                 김용택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이름 하나가 시린 허공을 건너와
메마른 내 손등을
적신다
........................................................................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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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


                                  김용택


나는 물기만 조금 있음면 된답니다
아니, 물기가 없어도 조금은 견딜 수 있지요
때때로 내 몸에 이슬이 맺히고
아침 안개라도 내 몸을 지나가면 됩니다
기다리면 하늘에서
아, 하늘에서 비가 오기도 한답니다
강가에 바람이 불고
해가 가고 달이 가고 별이 지며
나는 자란답니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찬 바람이 불면
당신이 먼데서 날 보러 오고 있다는
그 기다림으로
나는 높은 언덕에 서서 하얗게 피어납니다
당신은 내게
나는 당신에게
단 한번 피는 꽃입니다


 

 들국            


                       김용택

 
산마다 단풍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뭐헌다요  산 아래
물빛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산 너머, 저 산 너머로
산그늘도 다 도망가불고
산 아래 집 뒤안
하얀 억새꽃 하얀 손짓도
당신 안오는데 뭔 헛짓이다요
저런 것들이 다 뭔 소용이다요
뭔 소용이다요 어둔 산머리
초생달만 그대 얼굴같이 걸리면 뭐헌다요
마른 지푸라기 같은 내 마음에
허연 서리만 끼어가고
저 달 금방 져불면
세상 길 다 막혀 막막한 어둠 천지일 턴디
병신같이, 바보 천치같이
이 가을 다 가도록
서리밭에 하얀 들국으로 피어 있으면
뭐 헌다요 뭔 소용이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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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1    
  
                   김용택


바람이 붑니다
가는 빗줄기들이 옥색 실처럼 날려오고
나무들이 춤을 춥니다


그대에게
갈까요 말까요
내 맘은 절반이지만
날아 온 가랑비에
내 손은 젖고
내 맘도 벌써 다 젖었답니다


봄비 2    
  
                  김용택


어제는 하루종일 쉬지도 않고
고운 봄비가 내리는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막 돋아나는 풀잎 끝에 가 닿는 빗방울들,
풀잎들은 하루종일 쉬지 않고 가만가만
파랗게 자라고


나는 당신의 살결같이 고운 빗줄기 곁을
조용조용 지나다녔습니다


이 세상에 맺힌 것들이 다 풀어지고
이 세상에 메마른 것들이 다 젖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는
내 마음이 환한 하루였습니다. 어제는 정말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운 당신이 하얀 맨발로
하루종일 지구 위를
가만가만 돌아다니고


내 마음에도 하루 종일
풀잎들이 소리도 없이 자랐답니다. 정말이지


어제는
옥색 실같이 가는 봄비가 하루 종일 가만가만 내린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

화려하고 현란한 봄 꽃의 향연이 막을 내릴 즈음,
이젠 그 열기를 식히려는 듯
가만가만 종일토록 봄비가 내립니다.


빗방울이 지글지글 우산에 듣는 소리를 들으며
문득 어디선가 아름다운 사랑노래가 흘러나올 것 같아
주위를 두리번 거립니다.


다시 우산 아래의
지글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의 지난 시간들에 대한 생각에 젖어봅니다.


이미
우산도
길도 다 젖었습니다.


내 옷소매도
바짓가랑이도 다 젖었습니다.


혹시
내 마음이 젖을까봐
얼른 옷깃을 여밉니다.

섬진강 15 - 겨울 사랑의 편지 -


                                    김용택


산 사이
작은 들과 작은 강과 마을이
겨울 달빛 속에 그만그만하게
가만히 있는 곳
사람들이 그렇게 거기 오래오래
논과 밭과 함께
가난하게 삽니다.
겨울 논길을 지나며
맑은 피로 가만히 숨 멈추고 얼어 있는
시린 보릿잎에 얼굴을 대보면
따뜻한 피만이 얼 수 있고
따뜻한 가슴만이 진정 녹을 수 있음을
이 겨울에 믿습니다.
달빛 산빛을 머금으며
서리 낀 풀잎들을 스치며
강물에 이르면
잔물결 그대로 반짝이며
가만가만 어는
살땅김의 잔잔한 끌림과 이 아픔
땅을 향한 겨울풀들의
몸 다 뉘인 이 그리움
당신,
아, 맑은 피로 어는
겨울 달빛 속의 물풀
그 풀빛 같은 당신
당신을 사랑합니다.

.....................................


섬진강 시인 김용택 님의 시입니다...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다 그런 것은 아니지요.

풀잎의 맑은 피를 느끼는,


잔물결의 아픔을,
땅을 향한 그리움을 아는
그의 마음은 따뜻하겠지요...

 

따뜻한 가슴...
맑은 피...
우리가 언제나 그리워하는 것들 중 하나일테지요...

  들국화

                        김용택


나는 물기만 조금 있으면 된답니다

아니, 물기가 없어도 조금은 견딜 수 있지요

때때로 내 몸에 이슬이 맺히고

아침 안개라도 내 몸을 지나가면 됩니다

기다리면 하늘에서

아, 하늘에서 비가 오기도 한답니다

강가에 바람이 불고

해가 가고 달이 가고 별이 지며

나는 자란답니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찬 바람이 불면

당신이 먼데서 날 보러 오고 있다는

그 기다림으로

나는 높은 언덕에 서서 하얗게 피어납니다

당신은 내게

나는 당신에게

단 한번 피는 꽃입니다

.........................................

 
  들 국         

 

                           김용택

                    

산마다 단풍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뭐헌다요  산 아래

물빛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산 너머, 저 산 너머로

산그늘도 다 도망가불고

산 아래 집 뒤안

하얀 억새꽃 하얀 손짓도

당신 안오는데 뭔 헛짓이다요

저런 것들이 다 뭔 소용이다요

뭔 소용이다요 어둔 산머리

초생달만 그대 얼굴같이 걸리면 뭐헌다요

마른 지푸라기 같은 내 마음에

허연 서리만 끼어가고

저 달 금방 져불면

세상 길 다 막혀 막막한 어둠 천지일 턴디

병신같이, 바보 천치같이

이 가을 다 가도록

서리밭에 하얀 들국으로 피어 있으면

뭐 헌다요 뭔 소용이다요....

...........................................................

섬진강 시인 김용택 님의 가을 노래가,

들국화의 노래 두 편이 너무나 극적이다.


가을의 절대고독을, 그 고단한 갈망을

가을 한녘의 기다림을, 그 막막한 설렘을

몸과 마음으로 갈무리해내는 방식이 너무나 대조적이다.


누군가가 그리우면 아니, 그냥 그 무엇이 그리우면

너무나 몹시 그리워 가슴이 부서질 듯 시리면

나는 과연 둘 중 어떤 모양새로 감당하고 있는지...

아니 나는 도대체 어느 한 구석 시리기나 한 건지...


그래도 가을이 무척 많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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