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닥불


                 문태준


비질하다 되돌아 본
마당 저켠 하늘


벌레가 뭉텅, 뭉텅
이사 간다


어릴 때
기름집에서 보았던
깻묵 한 덩어리, 혹은


누구의 큰 손에 들려 옮겨지는
둥근 항아리들


서리 내리기 전
시루와 솥을 떼어
하늘 이불로 둘둘 말아


밭두렁길을 지나
휘몰아쳐가는
이사여,


아, 하늘을 지피며 옮겨가는
따사로운 모닥불!
..........................................................

몇 해동안 쌓아두었던 여러가지 잡동사니를 정리하다가,
이렇게 쓸모없는 많은 물건들을 갖고 있었음에 놀랐다.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내 마음자리 역시 마찬가지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과
쓸데없는 근심거리, 잡다한 상념들로 머릿속이 복잡하다.


아주 기본적으로
자기 주변을 정갈하게 하는 일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잘 정돈해 두는 일이
결국 나를 세상에 보낸 신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크게 한 숨을 들이키고 내뱉는다.
말끔하게 손 발 씻고, 목욕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가만히 두 손 모으고,
오늘 이 소중한 하루를 허락하신 분께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짧은 낮잠


                    문태준


낮잠에서 깨어나면
나는 꽃을 보내고 남은 나무가 된다


혼이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
낯선 곳에 혼자 남겨질 때가 있으니


오늘도 뒷걸음 뒷걸음치는 겁 많은 노루꿈을 꾸었다


꿈은, 멀어져가는 낮꿈은
친정 왔다 돌아가는 눈물 많은 누이 같다


낮잠에서 깨어나 나는 찬물로 입을 한 번 헹구고
주먹을 꼭 쥐어보며 아득히 먼 넝쿨에 산다는 산꿩 우는 소리 듣는다


오후는 속이 빈 나무처럼 서 있다.

.............................................................

평소 내가 아끼던 기타가 넘어지면서
기타 목이 딱 부러져버리는 꿈을 꿨다.
짧은 탄식이 터지며 안타까움이 푸른 잉크처럼 퍼진다.
가슴팍 한가운데가 얼음을 댄 것처럼 시려온다.
꿈이다.


오늘은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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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나무의 농사


                              문태준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뜨리고 있다
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되 무게의 그늘이다
..............................................................

무엇이든 어디 한 번에 다 되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한 발 한 발,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다보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되겠지...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다
그걸 꽃이 핀 걸 보고서야 알았는데...


그런가 싶으면 또
온 등짝이 시릴만큼
날이 춥다.


오늘도 그런 날이어서
봄이 오긴 왔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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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발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

'지나간 시간은 모두 아름다웠노라'고 누군가가 말했단다.
되돌아 생각해 보면 결코 아름다웠을리 없는 시간들...
견디어 내는 것조차 힘겨워,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모르고 지나온 세월...


그래, 어쨌든 늘 그랬듯이 오늘도 나는 하루를 그럭저럭 살아내고 있고,
언제 그랬냐는 듯, 지나간 시간은 흐릿한 기억으로만 시들어
지금 내 삶에 그리 무게를 더해줄 것 같지는 않다.


이제와서 흘러간 시간에 대해 달리 할 말은 없다.
잘 살아줘서 고맙다고.
앞으로도 잘 지내보자고...
혼자서 제 어깨랑, 제 등짝을 다독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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