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에도 사람은 살지 않는다
―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7


                                                  이문재

 
그래도 키 낮은 골목에는 사람이 아직
살겠거니 했다, 북한산 그늘이 깊은 수유리
목을 빼면 셋방 가구 등속이 보이는 골목들
고개 숙이며 드나드는 사람들 속에는 아직
사람 같은 그 무엇인가 깃들여 뜨겁거나
때로 덜컹댈 것이었지만, 살 부벼댈 오래 된
마음들 있겠거니 했다, 해서 등꽃 파랗게 피면
삶은 아직 삶아진 것이 아니라고
감나무에서 감 덜 익은 것 떨어지면, 그게
생명을 생명이게 하는 솎아냄이라고
올 사람 없지만 현관에 불 밝히곤 했다
공휴일 저녁, 잔광이 훤하게 수유리를
덮고, 쉰 두부도 파는 아저씨 요령 소리
골목에 자욱해서, 반바지 입고 골목길
도는데, 아, 늙은 아버지 손등 힘줄 같은
골목길에 사람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열려 있는 모든, 키 작은 창문에서는
주말연속극만 왕왕거리며 넘쳐 나왔다, 키 낮은
골목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현관 불을
꺼버렸다, 마감뉴스 시그널이 들려온다
골목에도 벌써부터 저런 것들만
살고 있는 것이었다
.........................................................................

너와 내가 다름을 인정하고
저마다 타고 나는 것이 같지 않음을 알고
구별하는 지혜


구별하지 못하고 행했던 수많은 선택의 오류
대가(代價)를 치러야 했던 시간
결코 헛되지 않으나 되풀이 해서는 안된다.


항상 지혜를 구하고 실천해야 한다.
사람답게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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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의 꿈 

 

                      이문재


그가 나를 버렸을 때
나는 물을 버렸다
내가 물을 버렸을 때
물은 울며 빛을 잃었다
나무들이 그 자리에서
어두워지는 저녁 그는
나를 데리러 왔다 자욱한 노을을 헤치고
헤치고 오는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길이 되어 나는 그 길의 마지막에서
그의 잔등이 되었다


오랫동안 그리워해야 할 많은 것들을 버리고
깊은 눈으로 푸른 나무들 사이의
마을을 바라보는 동안 그는 손을 흔들었다
나는 이미 사막의 입구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길의 일부가 내 길의
전부가 되었다


그가 거느리던 나라의 경제는 사방의 지평선이므로
내가 그를 싣고 걸어가는 모래언덕은
언제나 처음이었다
모래의 지붕에서 만나는 무수한 아침과 저녁을 건너는
그 다음의 아침과 태양


애초에 그가 나에게서 원한 것은 그가
사용할 만큼의 물이었으므로 나는 늘
물의 모습을 하고 그의 명령에 따랐다
햇빛이 떨어지는 속도와 똑같이 별이
내려오고 별이 내려오는 힘으로 물은 모래의
뿌리로 스며들었다


그의 이마는 하늘의 말로 가득가득
빛나고 빛나는 만큼 목말라했고
그때마다 나는 물이 고여있는 모래의
뿌리를 들추어 내 몸 속에 물을
간직했다
 

해가 뜨면 모래를 제외하고는 전부 해
바람불면 모래와 함께 전부 바람인 곳
나는 내 몸 속의 물을 꺼내
그의 마른 얼굴을 씻어주었다
그가 나를 사랑하였을 때
나는 많은 물을 거느렸다
그가 하늘과 교신하고 있을 때
나는 모래들이 이루는 음악을 들었다
 

그림자 없는 많은 나무들이 있고
그의 아래에서 바라보는 세계는
늘 지나가고 그 나무들 사이로 바람 불고
바람에 흐느끼는 우거진 식물과 식물을
사랑하는 짐승들이 생겨나고
내 잔등 위에서 움직이는 그가
그 모든 것을 다스려 죽을 것은 죽게 하고
죽은 자리마다 그 모습을 닮은
나무나 짐승을 세워놓고 지나간다


도중에 그는 몇번이나 내 몸 속의
물을 꺼내 마시고 몸을 청결히 했다
모래언덕이 메아리를 만들어 멀리
멀리로 울려퍼지게 하는 그의 노래
그가 드디어 사막을
바다로 바꾸었을 때
나는 바다의 환한 입구에서
홀로 늙어가기 시작했다


출렁출렁 바다 위에서 그를 섬기고 싶었지만
그는 뚜벅뚜벅 바다 위를 걸어나갔다


오랜 세월이 흘러가고
또한 흘러와
사막이 아닌 곳에서 그를 섬기는 일이
사막으로 들어가는 일로 변하고
바다가 다시 사막으로 바뀌어
바다의 입구에서 내가 작은 배가 되지 못하고
종일토록 외롭고
밤새도록 쓸쓸한 나날
그가 나를 떠났을 때
나는 물을 버렸다


버리고 버리는 일도 다시 버리고
나도 남지 않았을 때
저녁 나무들 사이로 태양을 버리고
물의 어두운 어깨를 바다로 띄워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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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오지


                  이문재


탱탱한 종소리 따라나가던
여린 종소리 되돌아와
종 아래 항아리로 들어간다
저 옅은 고임이 있어
다음날 종소리 눈뜨리라
종 밑에 묻힌 저 독도 큰 종
종소리 그래서 그윽할 터
 

그림자 길어져 지구 너머로 떨어지다가
일순 어둠이 된다
초승달 아래 나 혼자 남아
내 안을 들여다보는데
마음 밖으로 나간 마음들
돌아오지 않는다
내 안의 또 다른 나였던 마음들
아침은 멀리 있고
나는 내가 그립다

..............................................................

가끔 올리는 내 일상의 기도처럼

문득 네 생각이 나면

손을 모으거나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고

잘 살아라 한다.

 

오늘도

생각했다,

잊는다.

농담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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