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鄕愁)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명시 중의 명시...

 

도회지에서의 어린 시절의
낡은 기억들은
뜨겁거나 혹은 아주 차갑거나
답답하거나 또는 칙칙한
회색빛 시멘트 담벼락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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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오탁번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부채질 하며
말복더위를 식히고 있는데
달려오던 빨간색 자동차가 끽 멈춰 섰다
운전석 차창이 쑥 열리더니
마흔 살 될까말까 한 아줌마가
고개도 까닥하지 않고
-할아버지! 진소천 가는 길이 어디죠?
꼬나보며 묻는다
부채를 탁 접으면서 나는 말했다
- 쭉 내려가면 돼요, 할머니!
내 말을 듣고는
앗, 뜨거!놀란 듯
자동차가 달아났다
 

우리나라에는
단군할아버지 말고는
'할아버지'라고 부를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유관순 누나 생각하면
나는 어린이집에도 아직 못간
앱솔루트 분유 먹는
절대적인 갓난애야!
'할아버지'라니?
고얀 년 같으니라구!
..............................................................

말로 독침을 쏘는 것들

 

말벌보다 독한 침이 머릿속에 박혀
뺄 엄두는 못 내고
맹독이 자꾸만 온 머리로 퍼져
편두통과 어지럼증을 유발한다.

 

내 입에 똥칠하기 싫어
각각 좌우측 침샘에
말끔히 묻어뒀던 쌍 욕이 스며 나오고
안면 근육 경련에 동반하여
쌍 주먹으로 이어진 인대가 발작한다.

 

다시 한 번 내 눈에 띄면
쌍 주먹을 날린 후
쌍 욕 더미에 파묻어 버릴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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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꽃


                     박성우


옹알옹알 붙은 감꽃들 좀 봐라
니가 태어난 기념으로 이 감나무를 심었단다
그새, 가을이 기다려지지 않니?
저도 그래요, 아빠

 
웬, 약주를 하셨어요? 아버지
비켜라 이놈아, 너 같은 자식 둔 적 없다!
담장 위로 톱질당한 감나무, 이파리엔 햇살이
파리떼처럼 덕지덕지 붙어 흔들렸다
몸에 베인 뒤에야 제 나이 드러낸 감나무
나이테 또박또박 세고 또 세어도
더 이상의 열매는 맺을 수 없었다


아버지 안에서
나는 그렇게 베어졌다

 
그해, 장마는 길었다
톱으로 자를 수 없는 것은 뿌리였을까
밑동 잘린 감나무처럼 나도
주먹비에 헛가지를 마구 키웠다
연하디연한 어머니의 말씀에
나는 쉽게 몸살을 앓는 자식이 되기도 했지만
끝내 중심은 서지 않았다
이듬해 우리는 도시로 터를 옮겼다

 
아버지는 지난 겨울에 흙집으로 들어가셨다
사람들은 가장 큰 안식을 얻었다고 했다

 
왜 찾아왔을까
상추밭이 되어버린 집터
검게 그을린 구들장 몇 개만 햇볕에 데워져 있다
세상 겉돌던 나무 한그루
잘려진 밑동으로
감꽃이 피려는지 곁가지가 간지럽다
.....................................................................

하늘로 이어진 끈이 있대
아니라고 해도 싫다고 해도
아무 소용없는...


내 아비가 되고
내 자식이 되는
흔히 천륜이라고 부르는
차마 어쩔 수 없는...


얼마든 잘 살 수 있대
하늘로 이어진 끈이 없어도
이 세상에 내가 올 수는 없었겠지만
한 때는 차라리 그게 좋다고 생각했던...


모래성마냥 자꾸만 무너져 내리던
끈이라도 붙들고 싶던
하루 하루가 유난히 아프던...


어지간히 뜨겁고 푸르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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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가 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
..........................................................

내 마음이 다만 괴로울 뿐이었다
맑은 날이 있고
흐린 날이 있고
비바람 몰아치다
말짱하게 갠다
오늘따라 자꾸만 마음이
모래성마냥 무너져


단지 내 마음이 괴로울 뿐이었다
눈물인지 땀인지
다 뒤섞여 흠뻑 젖을 때까지
뛰고 또 뛰었다.
오늘따라 자꾸만 마음이
모래성마냥 무너져


내 마음이 다만 괴로울 뿐이었다
사는 게 좋으냐?
그렇다면 툭툭 털고 살 일이라고
부지런히 땀 흘리며 살 일이라고
자꾸만 혼자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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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하나 등불 하나


                                     윤후명


어두운 마음에 등불 하나
헤매는 마음에 등불 하나
멀리 멀리 떠난 마음에 등불 하나
할퀴어진 마음에 등불 하나
찢어진 마음에 등불 하나
무너진 마음에 등불 하나
그러나 보이지 않는 마음도 있다
어느 마음속에도
하늘 있고
땅 있고
찰나와 영겁 닿는 빛 있음을
등불 걸어 밝히어라
보이지 않는 마음도 밝혀
그 애끓는 사랑 하나 환하게 환하게
뭇 별까지 사뭇 밝히어라
................................................................................

사람의 인연이란 게 있긴 있는 것 같아...
점점 새롭게 만나는 건 어려워지고 헤어지긴 너무 쉬워지지.
사소한 오해나 다툼으로도 영영 이별하지.
그냥 그런 게 나이 먹으면서 바뀌어 가는 것인 듯.
새롭게 뭘 하는 게 어려워.
주변 여건도 따져봐야 하고...
아무튼 좋은 사람들 좋은 인연으로 만나 유지하려면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애 써야 하는데
그것도 내 마음 같지는 않지.
그렇다고 아주 많이 신경 쓸 일은 물론 아니지만...
어쨌든 새로운 만남 보단 이별이 잦아지겠지.
좋은 사람 만나고 그들과 관계를 좋게 유지한다는 건
수고로운 일이겠지.
쉽지마는 않은 일 일거야.

사랑하면 다 되겠지만...
사랑 하나면 다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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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


                     김선우


내 기억 속 아직 풋것인 사랑은
감꽃 내리던 날의 그애
함석집 마당가 주문을 걸 듯
덮어놓은 고운 흙 가만 헤치면
속눈썹처럼 나타나던 좋.아.해
얼레꼴레 아이들 놀림에 고개 푹 숙이고
미안해 - 흙글씨 새기던
당두마을 그애
마른 솔잎 냄새가 나던


이사오고 한번도 보지 못한 채
어느덧 나는 남자를 알고
귀향길에 때때로 소문만 듣던 그애
아버지 따라 태백으로 갔다는
공고를 자퇴하고 광부가 되었다는
급행열차로는 갈 수 없는 곳
그렇게 때로 간이역을 생각했다
사북 철암 황지 웅숭그린 역사마다
한그릇 우동에 손을 덥히면서
천천히 동쪽 바다에 닿아가는 완행열차


지금은 가리봉 어디 철공일 한다는
출생신고 못한 사내아이도 하나 있다는
내 추억의 간이역
삶이라든가 용접봉,불꽃,희망 따위
어린날 알지 못했던 말들
어느 담벼락 밑에 적고 있을 그애
한 아이의 아버지가 가끔씩 생각난다
당두마을,마른 솔가지 냄새가 나던
맴싸한 연기에 목울대가 아프던.
..............................................................................

동네에서 말썽쟁이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땜통 억만이는

곤지암 계곡에서 물을 많이 마시고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중동에 밤 일을 나가야만 했던 수남 엄마는

만취해서 돌아온 어느 새벽녘

연탄가스를 잔뜩 마시고 누워있던

수남이를 영영 깨우지 못했다.

왼팔에 쇠갈고리를 달고 있던 호룡이 삼촌은

늘 호룡이를 때렸다.

비바람이 무척 불어 닥치던 어느 날

마당 한 가득 피가 흥건했던 그 날,

이후로 호룡이도 호룡이 삼촌도 다시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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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연가


                            이해인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당신이 보고 싶어
내마음이 흔들립니다


옆에 있는 나무들에게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다도 모르게
가지를 뻗은 그리움이
자꾸자꾸 올라갑니다.


저를 다스릴 힘도
당신이 주실 줄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주는
찬미의 말보다
침묵 속에서 불타는
당신의 그 눈길 하나가


나에겐 기도입니다
전 생애를 건 사랑입니다.
.............................................

타고 난 생이 달라
가까이 할 수 없음을


행여 그 모습이라도 볼까 하여
향기라도 남아 있을까 하여
담벼락에 매달려 오르고 또 오르고


겨우 담 하나 넘는데 한 생을 다 보내고
꽃이라도 피었거늘


꿈에라도 찾던 이가
영영 가고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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