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학년

 

                       박성우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
사카린이랑 슈거도 몽땅 털어넣었다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 저었다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

 

어지간히도 어렵던 시절,
참으로 배포 큰 아이가

간 큰 행동을 했다.

 

엇비슷한 기억 언저리가 간질간질하다.

그것도 한 두마리가 아니라 스물스물 수십마리다.

 

배포라도 컸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어린 뺨이 아프긴 했겠지만,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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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오늘처럼 흐리고 비내리는 날이면 생각나는 시입니다.

우리 민초들의 삶은 언제나 이렇게 고단합니다.
누워서, 울다가, 잠들고,
또 누구보다 먼저 다시 일어나고, 웃고,
다시 눕고...

 

세상살이에 힘들고 지쳤을 때,

이 어둠속에 누군가 내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바람속에 든든히 두 손 맞잡아 줄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안일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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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 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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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길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먼 길 저편

안개 자욱하게 내린 끝에서...

아득히 누군가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다가올 듯, 다가오지 않고

멀어질 듯, 멀어지지 않는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는

아지랑이처럼

안개 속 저 편

먼 길 끝에서...

누군가가 어른거린다.

오늘도

봄 기운이 따뜻하여

나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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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시

 

                                 김남조

 

어쩌면 미소짓는 물여울처럼
부는 바람일까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언저리에
고마운 햇빛은 기름인양 하고

 

깊은 화평의 숨 쉬면서
저만치 트인 청청한 하늘이
성그런 물줄기 되어
마음에 빗발쳐 온다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또 보리밭은
미움이 서로 없는 사랑의 고을이라
바람도 미소하며 부는 것일까

 

잔 물결 큰 물결의
출렁이는 바단가도 싶고
은 물결 금 물결의
강물인가도 싶어

 

보리가 익어가는 푸른 밭 밭머리에서
유월과 바람과 풋보리의 시를 쓰자
맑고 푸르른 노래를 적자

......................................................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의 6월 어느날,
푸릇푸릇 누렇게 익어가는 좁다란 보리밭길의

 

화려한 미소,
아찔한 손길,
일렁이는 정염

 

가슴 시리도록 그리운 6월의 어느날,
흐릿한 기억너머로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그때의 감흥.

 

취하고 싶어라
춤추고 싶어라
노래하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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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성사 - 못에 관한 명상1

 

                                                      김종철

 

못을 뽑습니다
휘어진 못을 뽑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못이 뽑혀져 나온 자리는
여간 흉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성당에서
아내와 함께 고백성사를 하였습니다
못자국이 유난히 많은 남편의 가슴을
아내는 못 본 체하였습니다
나는 더욱 부끄러웠습니다
아직도 뽑아 내지 않은 못 하나가
정말 어쩔 수 없이 숨겨 든 못대가리 하나가
쏘옥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

 

휘어지고, 구부러져도, 녹슬고, 병들어도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이해하고, 보듬고 사는 게

우리 삶이 아닌가 싶네요...

아무래도 힘들고 혼란스럽고 복잡하고 아픈 날이 더 많아서

조금 더 참아주고, 쓰다듬으며 살아야겠지요...

오늘은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전화 한통 하시길...

한 잔 나눌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면 더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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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있음에

                                    김남조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맘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사람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
너를 위하여

                        김남조

 

나의 밤기도는
길고
한 가지 말만 되풀이한다.


가만히 눈을 뜨는 건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祝願).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 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 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나의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오직
너를 위하여
모든 것에 이름이 있고
기쁨이 있단다.
나의 사람아.

....................................................................................

이보다 더 감동적이고 극적인 사랑의 노래가 있을까 싶다가도
혼자서 웅얼거리며 뒤돌아 고개를 떨군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
화려하면서도 쓸쓸하고 열정적이면서도 싸늘한
시인의 사랑고백...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밤...
밤이 새도록 눈물로 편지를 쓰고 또 지우고 했던
그 아픈 시간을 위로해 주던 시인의 한마디...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나의 사람아... '

 

'그대가 있어  내가 있네.'

 밥

 

                    윤준경 
  
어머니는 밥밖에 모르는
여자였다

 

밥 먹었니?
밥 먹어라
더 먹어라

 

갖은 나물에 더운 국
뜨거운 밥 한 그릇 듬뿍
먹이시는 일 뿐
남자나 사랑 따위는
당초에 모르시는 분이었다

 

치매 걸려
세상일 다 잊으신 뒤에도
잊지 않으시던 말, 밥
밥 먹고 가라

 

언제부턴가 나도
밥밖에 모르는 여자가 되었다

 

아들 딸 며느리 불러놓고
밥 먹어라할 때에
양양한 목소리
열사날에 한번쯤
목을대 빳빳이 일어서는
밥심

...................................................................................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던가요?

우리 삶에서 당장 입에 풀칠이라도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던 시절...
그 세월을 살아낸 것이 참 용하다 싶기도 하지만...
그 세월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치열했을지는 짐작조차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그 시간들이 모두 지나고 지금의 우리는 또 다른 복잡한 문제와
견디기 힘든 어려움과 부딪치고 또 좌절하고 헤메이면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어찌보면 그때와 별다르지 않은 삶이지요...

그제서야 우리는 부모를, 어른들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고, 또 세상이 바뀐다해도...
우린 또 살아가지요...

양양하게, 빳빳이...
밥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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