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가슴속에 무슨 슬픔
그리도 많아
섬이여
너는 온종일 눈물에 젖어 있는가
전설은 몽돌처럼
수만 년 물결에 쓸리고 쓸려
다 닳은 얼굴로 덜그럭덜그럭 중얼거리며 뒹굴고
그대의 가슴뼈는
해풍에 시달려고 시달려
하얀 촛대처럼 빛 바래졌는데
등대는 무슨 기막힌 사연 전해 주려고
긴 밤 꼬박 지새우며
불 깜빡이는가
...................................................................

쓸데 없는 생각, 부질없는 잡념, 갈등, 아집이나 미련 등
모든 잡다한 상념들을 통틀어 번뇌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번뇌는 내가 불러 일으키지 않으면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번뇌가 혼자 저절로 생겼는지를...


마치 연못 바닥의 진흙과 같아서
내가 헤집어 놓지만 않으면 마음을 흐리는 일이 없답니다.


살다 보면 켜켜히 쌓이는 바닥의 진흙이야 어쩔수 없겠지만
굳이 내 손으로 휘저어 자꾸만
내 맑은 영혼을 흐리게 만들지는 마세요.
그리고 날을 잡아서 한 번쯤 바닥청소를 하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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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김정한


소식이 없이도
만나지 않아도

함께한 사람


많은 생각으로 괴로워도
다시 일어서게 하는 사람


오늘도 그대오시는 길목에 서서
그대를 기다립니다.
.......................................................................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고 하는 아프리카 속담,
삶의 진리에 가까운 말이다.


같이 길을 가는 것의 의미는
함께 한다는 것이다.


같은 곳을 향하고
같은 곳을 바라보고
보조를 맞추고
생각을 공유하며
서로의 손을 맞잡고 체온을 느끼고
서로를 의지하며
서로에게 믿음을 갖는 것


같이 길을 간다는 것은
한가지로 함께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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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시간
              

                      이기철


시는 녹색 대문에서 울리는 초인종 소리를 낸다
시는 맑은 영혼을 담은 풀벌레 소리를 낸다
누구의 생인들 한 편의 시 아닌 사람 있으랴
그가 걸어온 길 그가 든 수저 소리
그가 열었던 창의 커튼 그가 만졌던 생각들이
실타래 실타래로 모여 마침내 한 편의 시가 된다


누가 시를 읽으며 내일을 근심하랴
누가 시를 읽으며 적금통장을 생각하랴
첫 구절에서는 풀피리 소리 둘째 구성에서는 동요 한 구절
마지막 구절에서는 교향곡으로 넘실대는 싯발들
행마다 영혼이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들
나를 적시고 너를 적시는
초록 위를 뛰어다니는 이슬 방울들
..........................................................

흐린 날은 흐리니 좋고,

맑은 날은 맑아서 좋고,
비가 오시는 날은 비가 오니 좋고,
바람 부는 날은 바람 부니 좋네요.
좋은 데 어디 이유가 있나요?
그냥 좋은 것이지요.


의미없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
쓸데없는 데 생각이나 시간을 소비하는 것,
필요없는 일에 정력을 낭비하는 것,
모두 분별해서 정리해야 할 것들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인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지나고 나면 우리 삶은 생각보다는 짧은 듯합니다.
살아있음이 감사한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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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앞에 봄이 있다


                                 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

고난 없는 생이 어디 있을까요?
안개 흩뿌리듯 우리를 흠뻑 젖게 하는 비
끊임없이 닥치는 삶의 시험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마저도 감사히 맞이하여
살아있음이 곧 복이라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대하는 옳은 태도겠지요.


비로소 꽃잔치 펼쳐질 봄을 맞아
맘껏 즐기고 양껏 누려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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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길
 

                  정호승

 
제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사방은 칠흑같은 어둠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텅 빈 공간의 고요
차가운 핸들에 엎드려
가슴치며 울었던
마치 물안개 번지듯
봄 비 오시던 날.


샤워기 물소리,
북받치는 울음을 참는 구역질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자동차 경적소리,
곁을 스쳐가는 차가 일으킨 바람소리...


어지러이 사방으로 번지던 소리가
커다란 배수구로 빨려 내려가듯 후룩!
일순간, 사라졌다.


흠뻑 젖은 차 창에 빼곡히 맺힌
눈물, 눈물, 눈물
창을 타고 빗줄기 한 줄기
주룩 흘러내릴 때,
동시에,
내 관자놀이를 타고
생살을 찢어낼 듯 예리하게
흘러내리는 싸늘한 땀방울


이 순간!

살아있다.

물안개 번지듯
봄 비 오시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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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


                                     문정희


가장 아름다운 것은
손으로 잡을 수 없게 만드셨다
사방에 피어나는
저 나무들과 꽃들 사이
푸르게 솟아나는 웃음 같은 것


가장 소중한 것은
혼자 가질 수 없게 만드셨다
새로 건 달력 속에 숨쉬는 처녀들
당신의 호명을 기다리는 좋은 언어들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저절로 솟게 만드셨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 속으로
그윽이 차 오르는 별빛 같은 것
..........................................................

어느 앵글로 언 땅을 뚫고 일어서는
새싹의 기운을 담아낼 수 있을까?
어느 화폭에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저 파란 하늘을 그려낼 수 있을까?


자연스러운 그러나
너무 아름답고 소중하며 사랑스러운
자연의 경이로움
그 고귀함
스스로 베풀어진 그러한 성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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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쓰는 일

 

                        이생진


시보다 더 곱게 써야 하는 편지
시계바늘이 자정을 넘어서면서
네 살에 파고드는 글
정말 한 사람만 위한 글
귀뚜라미처럼 혼자 울다 펜을 놓는 글
받는 사람도 그렇게 혼자 읽다 날이 새는 글
그것 때문에 시는 덩달아 씌어진다
.....................................................................

언젠가부터 내 안에는
작은 새가 한마리 산다.


언제나 나보다 먼저
새벽을 맞아
내 의식을 깨우고
밤을 기다려
모두가 잠든 후에야
비로소 쉬는...


언제나 나보다 먼저
너를 맞아
눈 뜨게 하고
너를 만나
비로소 숨쉬게 하는...


언제나 나보다 먼저
신의 소리를 듣고
모든 깨어있는 감각으로
내게 전달하여
허락하신 하루에

제 스스로 감사 기도 올리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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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천상병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 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

'니'가 있어야
'너'도 있고
'나'도 있다.

'네'게로 갈 길도 가깝지 않지만
'내'게로 향하는 길도 아직 멀다.


그렇다면,
이기적으로 살기 보다
좀 이타적으로 사는 게
삶의 진리에
더 가까운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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