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감한 사랑


                            오인태


산은 좀체 안개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나도 그 산에 갇혀
꼼짝할 수 없었다.


그 해 여름 내 사랑은
짙은 안개 속처럼
참 난감해서 더 절절했다.
절절 속 끓이며
안으로만 우는 안개처럼
남몰래 많이 울기도 했다.


이제야 하는 얘기다.
...............................................................

하나 더하기 하나가 적어도 둘은 돼야한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꽤나 여러가지다


하나가 온전치 못하거나 혹은 넘치거나
지나치게 외편향적이거나 혹은 너무 배타적이거나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거나 혹은 체질이 다르거나
태생이 다르거나 혹은 눈높이가 다르거나
온도차가 심하거나 혹은 속도차가 심하거나
사상이 다르거나 혹은 방향성이 다르거나


하나 더하기 하나가 얼마가 될지 알기는커녕
둘도 되지 못하면
제발 빨리 잡은 손을 놓기를...


나도 이제야 하는 얘기다.

하늘은 높고 땅은 조금씩 늙어간다


                                                   이영유


하늘은 맑고 빨래는 깨끗했다


격에 맞게
서두르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모나지 않았으며
지붕은 고요해...


창문은 생각들로 늘 어지러워


불을 켜자
어둠으로부터 한 생각쯤 뒤로 물러나
예사롭지 않은 소리
들린다
같이 있는 모든 것들 실은
언제나 저 혼자


웃음 소리 크고 작게
밤바람으로 휘몰려 다녀
어디선가 또 비명
울음 음울 울음


어느 세상 한 귀퉁이 다시 무너져내리는가?


지붕은 늘 그대로
모양도 늘 그대로
생각은 살아온 길만 추억하고


땅은 조금 조금씩
늙어간다
.........................................................

생각의 끝을 보려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느 날 생각이 불쑥 찾아와 날이 새도록 계속 말을 걸었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사는지...
끝이 없을 것같은 질문과
답을 찾을 수 없을 것같은 허허로움이
온 밤을 뜬 눈으로 지새게 했다.


어느새 창밖에 희미한 밝음이 번진다.
생은 한 번의 죽음만을 허가하고
그 순간이 지나면 단 일초도 더 허락하지 않는다.
그 유한성을 깨닫는 게 먼저였다


하늘에 띄운 연 실이 풀려나가듯
생각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순간에 주루룩 풀려나갔다.


생각이 멈추는 순간,
뒤통수에서부터 눈두덩으로
뜨끈한 피로가 천천히 밀려온다.
단 일초도 뜬 눈을 더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찔레꽃 이야기


                           박이도


찔레꽃을 아느냐
찔레꽃은 몰라도
찔레꽃 냄새는 알지요


시집간 아낙네들의
얼굴은 잊었지만
그들이 풍겨주던 찔레꽃 냄새
살 냄새는 알지요


유월, 감자바위 골짜기의
찔레꽃을 보러 가요
저마다의 옛이야기
찔레꽃 童話를 들려줘요
.................................................

가시가 많은
찔레꽃 덤불 속은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일지 몰라.
늘 비밀스런 이야기들이 펼쳐질지도 몰라.


달콤한 찔레꽃 향기에 취해
소담하고 아기자기한 자태에 취해

걸음을 멈추었을 때,


나른한 유월의 어느 날,
어렴풋이 잠들며 들었던
할머니의 옛이야기는
줄거리 하나 없이
소리만 남아, 향기만 남아
내 생의 감각을 흔들어.


살랑 살랑 살랑...
사알 살, 사알 살...

하늘궁전


                               문태준


목련화가 하늘궁전을 지어놓았다
궁전에는 낮밤 음악이 냇물처럼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생사 없이 돌옷을 입고 평화롭다


목련화가 사흘째 피어 있다
봄은 다시 돌아왔지만 꽃은 나이도 들지 않고 피어있다
눈썹만한 높이로 궁전이 떠 있다
이 궁전에는 수문장이 없고 누구나 오가는 데 자유롭다


어릴 적 돌나물을 무쳐먹던 늦은 저녁밥때에는
앞마당 가득 한사발 하얀 고봉밥으로 환한 목련나무에게 가고 싶었다
목련화 하늘궁전에 가 이레쯤 살고 싶은 꿈이 있었다
................................................................

목련화 하늘궁전에 가 살고 싶다.
한잠 푹 자고 싶다.

공일오비 (空一烏飛)


                                       유재영


며칠째 이어지는 내몽고 황사바람 속을 뚫고
지도도 없이 맑은 하늘 찾겠다고 나서는 어린 새
자꾸만 목이 마른,
....................................................................

목줄기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가슴팍이 쩍쩍 갈라져 앙상한 갈비뼈가 드러날 때쯤
따스한 온기 품은 봄 비가 달게 내렸다.


삶은
목표도 속도도 아닌
방향이라며?


가슴에 믿음 하나 품은 것은 덤
오늘 얻은 새 삶도 어찌보면 덤


어깨가 절로 들썩
우쭐 우쭐


이제 허리띠 동여매고
잰 발걸음을 옮길 차례


해를 향해 돌아앉아

마주 보고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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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


                함민복


혼자 사는 게 안쓰럽다고


반찬이 강을 건너왔네
당신 마음이 그릇이 되어
햇살처럼 강을 건너왔네


김치보다 먼저 익은
당신 마음
한 상


마음이 마음을 먹는 저녁
.....................................................

선잠을 채 털어내지도 못한 채
허둥지둥 아침상을 차리다
문득 가슴팍이 시려온다.


김치, 계란부침, 김, 된장찌개...
변변히 차릴 것 없는 식탁
그래도 함께 둘러앉은 귀한 시간이
고맙고 고맙다.


'많이 먹어...'
어렵게 건낸 말에


잘 여문 짧막한 대답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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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벗고 들어가는 그곳


                                       황지우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린 독신녀,
그곳에 가보면 틀림없이 베란다에
그녀의 신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한강에 뛰어든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시멘트 바닥이든 시커먼 물이든
왜 사람들은 뛰어들기 전에
자신이 신었던 것을 가지런하게 놓고 갈까?
댓돌 위에 신발을 짝 맞게 정돈하고 방에 들어가,
임산부도 아이 낳으러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정돈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뛰어내린 곳에 있는 신발은
생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은 영원히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다만 그 방향 이쪽에 그녀가 기른 열대어들이
수족관에서 물거품을 뻐끔거리듯
한번의 삶이 있을 따름이다


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잘못 든 길들이 있었는가
가서는 안 되었던 곳,
가고 싶었지만 끝내 들지 못했던 곳들;
말을 듣지 않는, 혼자 사는 애인 집 앞에서 서성이다
침침한 밤길을 돌아오던 날들처럼
헛된 것만을 밟은 신발을 벗고
돌아보면, 생을 '쇼부'칠 수 있는 기회는 꼭 이번만은 아니다
.....................................................................

모든 어리석음이나 게으름이 죄는 아닐테지만
어리석음과 게으름은 죄에 가깝다.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지혜를 구하고
내게 주어진 생에 감사하고
그 삶을 되도록 바르고 온전히 꾸려가야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의 소명이기 때문이다.


모든 生이 貴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어느 하나 重하지 않은 生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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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김민정


색안경을
벗어놓고
세상을
볼 일이다


스쳐가는
바람의 말도
새겨들을
일이다


생각을
되새김하여
가다듬을
일이다
......................................

시인은


머리의 냉철함보다
가슴의 뜨거움이 더 귀하겠다.


감각의 예민함보다
사유의 깊이가 더 중하겠다. 


감정에 몰입하기보다
궁극적으로
삶에 대한 감사를 먼저 알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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