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선 나무
           

                  유경환


나무 위로 바람 없이
날아 오르는 꽃잎을
아이가 쳐다보고 있다.


뾰죽탑 위로 바람 없이
오르내려 흩어지는 구름 조각 끝
아이가 턱에 걸고 있다.


날아오르는 일이
가장 하고 싶던 갈망이었음을
뉘에게도 말할 사람이 없었던 때


꽃잎보다 구름보다 높게
전봇대만큼 키 크는 꿈을
대낮 빈 마을에서 아이가 꾼다.


그 아이는 지금껏 혼자인
늙지 않으려는 나.
.........................................................


그땐 힘든 줄 모르고
뒷산 가파른 언덕배기를 한달음에 뛰어올랐지.
네 활개를 펴고 풀밭에 벌렁 드러누워서야
턱밑까지 차오른 숨을 겨우 달랬지.


한가로운 흰구름 듬성듬성 떠다니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며
콩닥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한 점 부끄럼없이 살 거라 다짐했지.


향긋한 풀내음에 잠깐 눈을 감았고
나른한 풀잠에 푹 빠져버렸지
심술궂은 봄볕에 새까맣게
그을리는 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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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상병


가도 가도 아무도 없으니
이 길은 무인(無人)의 길이다.
그래서 나 혼자 걸어간다.
꽃도 피어 있구나.
친구인 양 이웃인 양 있구나.
참으로 아름다운 꽃의 생태여---
길은 막무가내로 자꾸만 간다.
쉬어 가고 싶으나
쉴 데도 별로 없구나.
하염없이 가니
차차 배가 고파온다.
그래서 음식을 찾지마는
가도 가도 무인지경이니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참 가다가 보니
마을이 아득하게 보여온다.
아슴하게 보여진다.
나는 더없는 기쁨으로
걸음을 빨리빨리 걷는다.
이 길을 가는 행복함이여.
................................................................

간밤의 세찬 비바람에 말끔히 씻긴 하늘


본디 여린 것의 온유(溫柔)와
본디 맑은 것의 순결(純潔)와
본디 푸른 것의 순수(純粹)와
본디 밝은 것의 진선(眞善)


세상 끝이 보일 듯한 멋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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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생각


                  이시영


어머니 앓아누워 도로 아기 되셨을 때
우리 부부 외출할 때나 출근할 때
문간방 안쪽 문고리에 어머니 손목 묶어두고 나갔네
우리 어머니 빈집에 갇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돌아와 문 앞에서 쓸어내렸던 수많은 가슴들이여
아가 아가 우리 아가 자장자장 우리 아가
나 자장가 불러드리며 손목에 묶인 매듭 풀어드리면
장난감처럼 엎질러진 밥그릇이며 국그릇 앞에서
풀린 손 내미시며 방싯방싯 좋아하시던 어머니
하루 종일 이 세상을 혼자 견딘 손목이 빨갛게 부어 있었네
........................................................................................
 
생전 울리지 않던 전화가 이른 아침에 운다.
아들, 생일 축하해.
생일은 내일이에요.
오늘이 28일 아녀?
내일이에요.
...

내가 요즘 정신이 없어. 별 일 없지?
그냥 그렇죠 뭐.
지금이 너 낳은 시간이여.
너 낳고 웃을 일이 많았지.
아침 챙겨 먹어.
네.
전화를 끊었다.
고맙다는 말을 할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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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위의 잠


                  나희덕


저 지붕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구 박아 놓았을까요, 못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 봅니다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 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 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 흙 바람이 몰려 오나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하는
못하나, 그 위의 잠
....................................................................

꽁꽁 언 넓다란 늪지에
한발남짓 겨우 난 물길 따라
까맣게 점점이 내려앉은 물오리떼
한강 물을 통째로 얼린 매서운 한파의 칼바람을
미동조차 않고 가녀린 몸으로 오롯이 견디고 앉았다.
그래, 가끔 살아있음이 고통이었던
그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언젠가 손끝으로 전한
잠깐의 온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흘러 찢어진 생채기가 아물고
시커먼 딱지가 내려앉고 새 살이 돋았지.
가슴의 못자국이 영영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고통을 잊을만큼의 시간과
화해로 이끌만한 충분한 너그러움이 생겼지.
하지만 여전히 겨울바람은 매섭고
강물은 꽁꽁 얼어붙었고
손은 시리고 더 이상 온기는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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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거름

 
                       진이정


멍한,
저녁 무렵
 

문득
나는 여섯 살의 저녁이다
 

어눌한
해거름이다
정작,
여섯 살 적에도
이토록
여섯 살이진 않았다
..................................................................

그동안 정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사람의 기억이란 게 그렇더라


눈이 살짝 덮여서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가
해가 나면 너저분한 길바닥이 다 드러나는 것처럼
창문 틈으로 빛이 들어오면
떠다니는 먼지가 다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아주 고스란히 다시 기억이 나더라
다행히 그 가슴시림은 아주 조금 덜어진채로...


그래 너나 나나 겪을만큼 겪었나?
다 좋은데... 그게 남으면 안되는데...
그게 말끔히 잊혀지면, 깨끗이 정리되면 좋은데...


사람이란 게 그렇더라
어느 순간 벽보고 앉아
내 앞은 왜 이리 깜깜하냐고 통곡하고 있는 나를 본다


그냥 훌훌 털고 일어서서 나가면 되는데
이 밝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걸어나가면 되는데
매일 아니 매순간이 새로운
이 시간을 즐기고 누리면 되는데


사람이란 게 그렇더라
그렇게 허술하더라고...


지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데
웃으면서 얘기할 꺼리도 안되는데
바보같이 이러고 산다.


이 좋은 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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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결을 더듬다


                              길상호


그녀가 쓰던 나무주걱을 꺼낼 때
나는 지나온 길과 만나게 된다
나무의 결을 따라 깊이 새겨 있는
발자국, 그 소리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나를 축축하게 적시는 여자,
돌아오지 않는 사내를 마음에 묻고
그을음 어두운 부엌에 혼자 서서
뚝뚝 수제비 반죽을 떼 내고 있다
주걱 위에 올려진 새하얀 반죽이
손가락 끝에서 잘려 나갈 때
거칠게 일어나곤 하던 나무의 결들
얼마나 많은 세월을 주걱 위에서
그녀 지워 버렸을까, 끓는 가슴에
하나 둘 응어리로 떠올랐을 얼굴
휘휘 저으며 익혀내고 있던 것일까
이제 다시 주걱의 결을 더듬어 보니
그녀 옹이로 단단하게 박혀 있다
결은 옹이 쪽으로 부드럽게 휘어
더 촘촘하게 파장을 그린다
그 상처를 쉽게 지나칠 수 없어
오래 서성이다 흘러가는 것이다
나무의 결을 더듬어 가며 나는
아궁이의 불처럼 뜨겁게 달아오른다
............................................................

허리도 굽고 어깨도 제대로 못 펴는
일흔 두살 딸을 보고
깊은 주름을 쓸어가며
아흔 넘은 엄마가 돌아앉아 훌쩍 훌쩍 운다.


스무살에 전쟁으로 과부 아닌 과부가 된 여인.
그 젊은 날을 어찌할 거냐고
딸 하나뿐이니 재가하라는 주변의 말.
그 말을 알아챈 딸은
엄마를 보내면 어찌될까 두려워
죽어라 악다구니를 쓰며
닥치는 대로 온 동네를 상대로 맞서 싸워야했다.


한평생 엄마를 붙들고 살아 온 딸.
자식을 낳고,
허리가 휘고 어깨가 내려앉도록
앞만 보며 달렸던 세월


딸은 아흔 넘은 엄마와 눈도 못마주치고
돌아앉아 훌쩍 훌쩍 운다.
내가 철이 없어

엄마 청춘을 다 뺏았다고.
내가 엄마 청춘 다 뺏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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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에게.2002.겨울


                                한강  

      
바다가 나한테 오지 않았어.
겁먹은 얼굴로
아이가 말했다
밀려오길래, 먼 데서부터
밀려오길래
우리를 덮고도 계속
차오르기만 한 줄 알았나보다


바다가 너한테 오지 않았니
하지만 다시 밀려들기 시작할 땐
다시 끝없을 것처럼 느껴지겠지
내 다리를 끌어안고 다시 뒤로 숨겠지
마치 내가
그 어떤 것,
바다로부터조차 널
지켜줄 수 있는 것처럼


기침이 깊어
먹은 것을 토해내며
눈물을 흘리며
엄마, 엄마를 부르던 것처럼
마치 나에게
그걸 멈춰줄 힘이 있는 듯이


하지만 곧
너도 알게 되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는 일뿐이란 걸
저 번쩍이는 거대한 흐름과
시간과
成長,
집요하게 사라지고
새로 태어나는 것들 앞에
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걸


색색의 알 같은 순간들을
함께 품었던 시절의 은밀함을
처음부터 모래로 지은
이 몸에 새겨두는 일뿐인 걸

 
괜찮아
아직 바다는
우리에게 오지 않으니까
우리를 쓸어가기 전까지
우린 이렇게 나란히 서 있을 테니까
흰 돌과 조개껍질을 더 주울 테니까
파도에 젖은 신발을 말릴 테니까
까끌거리는 모래를 털며
때로는
주저앉아 더러운 손으로
눈을 훔치기도 하며
........................................................................

어느 해 겨울,
힘들었는데, 정말 힘들었는데...
이미 얼음장이 된 방은
추웠는데, 정말 추웠는데...


두개골 속이 아프도록 계속된 기침과
등골이 오싹하도록 식은 땀에 흠뻑 젖어버린 지난 밤의 잠자리
밤새 뒤척이던 시간 내내
떠오른 수많은 지난 시간의 기억이라는 게
겨우 기억해낸 지난 시간이라는 게
영하 16도의 한기가 가득한
한 겨울 동트기 전보다 춥고 메마르고 어둡다.


살짝 얼어붙은 눈두덩을 겨우 꿈적거리며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 팔을 겨우 휘적여
서걱서걱 언 잠을 겨우 털어낸다.


그래,
그 겨울,
힘들었는데, 정말 힘들었는데...
추웠는데, 정말 추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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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 1


                   함동선


산으로 겹겹이 싸인 간이역
하루에 몇 번 기차가 지나가면 그 뿐
밭둑의 민들레꽃도
산길의 딱정벌레도 그 자리에 잠이 든다
양지바른 절터엔
얼굴이 좀 얽은 돌부처가
서 있다
산그늘이 가로 긋는 오후 3시
막차 시간이 돼가는가
잠자리 한 마리가 날아온다
구름과 바람과 세월 속에
무게를 느낄 수 없는 시간이
이 산골엔
이미 정해진 것처럼
새가 날아가는 쪽으로 해가 진다
..........................................................

큰기러기 세마리 날아올랐다.
어미 둘에 새끼 하나.


각기 다른 날갯짓은 허공을 바삐 휘젓는다.
어수선하고 서툴게 보이는 그들의 날갯짓은
어느 순간 바람을 올라 타고는
하늘로 고요히 날아오른다.


물빛이 반짝 하늘에 비치고
그들의 교감은 비행의 거리와 고도를
자연스레 맞춘다.
눈물이 반짝 호수에 번지고
그들의 비행궤도에 주파수를 맞춰보려
눈을 감는다.


한 번도 날아 오른 적이 없었던 지난 시간에
반쯤 먹은 한쪽 귀를 기울인다.
이미 깊게 패인
미간의 주름을 찡긋...


멀어져 가는 큰기러기 세마리
허공을 가르는
어떤 소리도 자취도 없다.


순간 호숫가엔 소슬바람이 고요히
돌고
또 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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