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강영은


캄캄한 어둠을 더듬어
목숨의 심지를 세운다
둥근 고리의 문 안
무덤처럼 쌓이는 촛농
점점 커지는
저 무덤은 촛불의 집이다
일렁이는 그림자를 벽에 던지며
녹아내리는 슬픔은
온전히 그의 몫이지만
화농의 상처로 단단해진
생의 내벽이 그러하듯
둘레의 어둠을 껴안은
집의 내부는 뜨겁다
무명심지 같은 목숨이
生을 끌어안을 때
가물거리며 다시 일어서는 불빛


가장 단단한 심지는
우리 내부에서 만들어진다
......................................................

너 그리고 내 삶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
매순간 내 행복에 집중하는 것.

 

너 그리고 내 삶의 방향이 옳다면
너무 멀리 가버려 돌아올 수 없는 것이 아니라면
꼭 제 길로 돌아오지
저절로 다 밝아지지.

 

늘 여기가 어디인지를 물어야 하는 게
기도 아닌가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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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수캐


                         공광규

 
수캐를 향나무 아래 매어놓고 키운 적이 있다
쇠줄에 묶였으나 나처럼 잘 생긴 개였다
나는 창문을 열고 그 개를 가끔 바라보았다
그 개도 나를 멀뚱히 쳐다보며 좋아했다
우리는 서로 묶인 삶을 안쓰러워 하였다
언젠가 한밤중, 창이 너무 밝아 커튼을 올렸다가
달빛 아래 눈부신 광경을 보았다
희고 예쁜 암캐가 와서 그의 엉덩이를 맞대고 있었다
화려한 창조 작업의 황홀경, 나는 방해가 될까봐
얼른 소리를 죽여 커튼을 내렸다
엄마 아빠의 그것을 본 것처럼 미안했다
나는 그 사건을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그 개의 사생활을 그 개의 비밀을 지켜 주고 싶었고
그 암캐가 향나무 아래로 자주 오길 기대했다
암캐는 안보이고, 어느 날부터 수캐가 울기 시작했다
동네사람들은 개가 울어 재수없다고 항의했다
나는 개장수에게 전화하라고 아내에게 화를 냈다
헌 군화를 신은 개장수가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개장수는 철근으로 짠 상자를 마당에 내려놓았고
당황한 개는 오줌을 질질거리며 주저앉았다
개장수는 군홧발로 마구차며 좁은 철창에 개를 구겨넣었다
한 두번 낑낑대다 발길질에 항복하던 슬픈 개
나는 공포에 가득 찬 개의 눈길을 피했다
폭력 앞에 비굴했던 기억이 떠올라 괴로웠다
개는 오토바이에 실려 짐짝처럼 골목을 빠져나갔고
나는 절망의 눈초리가 퍼붓던 개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얼마후, 골목에서 어슬렁거리던 강아지떼를 보았다
아비 없이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이를 구하는
설설대는 강아지들을 거느린 슬픈 암캐
나는 그 암캐가 향나무 아래로 몇 번을 찾아왔었는지
팔려간 수캐에게 몇 번째 암캐였는지 모른다
수캐는 나에게 그걸 말하지 않았고 나는
알았어도 그걸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달빛을 잘 받는 목련나무 아래 수캐를 매어놓았더라면
그가 더 황홀한 일생을 보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미안하다, 평생을 묶여 살다 도살장으로 실려간 수캐. 
.............................................................................................

우리 생에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날이 얼마나 될까?

중복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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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女子)


                      송수권


이런 여자라면 딱 한 번만 살았으면 좋겠다
잘하는 일 하나 없는 계산도 할 줄 모르는 여자
허나, 세상을 보고 세상에 보태는 마음은
누구보다 넉넉한 여자
어디선가 숨어 내 시집 속의 책갈피를 모조리 베끼고
찔레꽃 천지인 봄 숲과 미치도록 단풍 드는
가을과 내 시를 좋아한다고
내가 모르는 세상 밖에서 떠들고 다니는 여자
그러면서도 부끄러워 자기 시집 하나 보내지 못한 여자
어느 날 이 세상 큰 슬픔이 찾아와 내가 필요하다면
대책없이 떠날 여자, 여자라고 말하면
'여자'란 작품 속에만 숨어 있는 여자
이르쿠츠크와 타슈켄트를 그리워하는
정말, 그 거리 모퉁이를 걸어가며 햄버거를 씹는
전신주에 걸린 봄 구름을 멍청히 쳐다보고 서 있는
이런 여자라면 딱 한 번만 살았으면 좋겠다
팔십리 해안 절벽 변산 진달래가
산벼랑마다 드러눕는 봄날 오후에
...................................................................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해맑은 웃음으로
채 털어내지 못한 이른 잠을 깨우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싱그런 아침 바람의 얘기를 전하고
따뜻한 손길로
간밤 나눴던 사랑의 온기를 전하고
새하얀 허벅지를 베 주는 여자


밤새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쓸어내리며
잘 잤느냐고 귓전을 간질이며 속삭여주는,
새하얀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아주 편안하게 잤다고 웅얼거리는 말 한마디를
행여 흘릴까 귀 기울여 듣고
잔잔한 미소로 답하는 여자


이 순간이,
기적같은 일상의 매 순간이
모두 감사임을 안다고...
그 소중함을 간직하고 산다고...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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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당기행


                     이수인 


기차에 오르며
멀리 흰 종이꽃 눈물처럼 달고 가는
아침 상여를 보았다.
아직 길 떠나기에는 이른 새벽,
서둘러 길을 나선 저 서운 생애는
또 무엇이 되려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강물처럼 출렁이는 기차,
기차처럼 흔들리는 강물에
늦가을 마른 풀잎 같은 나를 싣고 예당 가는 길
남평, 앵남, 증주 그리고 삭정, 이양 …
들꽃 이름을 닳은 마을들을 스쳐
덩치 큰 미루나무 줄지어 선 보성을 지나
예당에 이르면
빗장 풀린 그리움들 확 쏟아져
흐린 안개되어 길을 막는다.


기차는
철길을 놓으며 떠나고
말없이 먼 길 따라오던 산맥들 바라보며
나는 문득,
산 같고 강물 같던 그 사내,
찔레꽃처럼 수줍고 아린
스무살 어귀의 내 첫사랑을 생각했다
그리움은 언제나
제 가슴 태우며 번지는 들불처럼
먼 길 떠나와 이젠 아득해져 버린 벌판 위에
나를 혼자 세워두곤 하고,
키 작은 옥수수밭 지나
찬찬히 길 내어주며 이루는 숲 위로
소쩍새며 뻐꾸기들
손풍금 소리처럼 쓸쓸하게 울며 날아가는데,
지독한 안개로도 다 지우지 못한 지나간 시간들
나는 작은 배에 실어 떠나보낸다.
........................................................................

넉넉히 여비 챙겨 나섰던 길이 있었나?
아무런 준비없이 떠밀리듯 나선
길 위에서
이유도 없이 눈물 나도록 서러웠던,
그렇게
정신없이 멀어져 가는 철로 위에
한없이 굵은 눈물 흘렸던
푸르디 푸른
어느 늦은 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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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셍

 

           김광균


1

향료를 뿌린 듯 곱단한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먼- 고가선 위에 밤이 켜진다.


2

구름은
보라빛 색지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


목장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부을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

파스텔화 같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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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오후

 

                             김선우


늙은네들만 모여앉은 오후 세시의 탑골공원
공중변소에 들어서다 클클, 연지를
새악시처럼 바르고 있는 할마시 둘
조각난 거울에 얼굴을 서로 들이밀며
클클, 머리를 매만져주며
그 영감탱이 꼬리를 치잖여- 징그러바서,
높은 음표로 경쾌하게
날아가는 징 그 러 바 서,
거죽이 해진 분첩을 열어
코티분을 꼭꼭 찍어바른다
봄날 오후 세시 탑골공원이
꽃잎을 찍어놓은 젖유리창에 오룽어룽,
젊은 나도 백여시처럼 클클 웃는다
엉덩이를 까고 앉아
문밖에서 도란거리는 소리 오래도록 듣는다
바람난 어여쁜 엄마가 보고싶다.
....................................................................

흩날리는 꽃잎보다 가벼운 말
마음대로 덧칠하고 허공에 날려버리는...
젊은 날, 그렇게 마음 졸이며 기다렸던 외출은
내가 보았던 가장 화려했던 꽃잎 흩날리던 날
꽃잎보다 가벼이 흩어졌지.
다시 마주칠 일 없을 거라는
낡은 꽃잎 같은 너의 말을
아주 오래 오래 낡은 시집에 넣어두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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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베개


                           박성우


오지 않는 잠을 부르러 강가로 나가
물도 베개를 베고 잔다는 것을 안다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오종종 모인 마을이 수놓아져 있다


낮에는 그저 강물이나 흘려보내는
심드렁한 마을이었다가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
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무너진 돌탑과 뿌리만 남은 당산나무와
새끼를 친 암소의 울음소리와
깜빡깜빡 잠을 놓치는 가로등과
물머리집 할머니의 불 꺼진 방이 있다


물이 새근새근 잠든 베갯머리에는
강물이 꾸는 꿈을 궁리하다 잠을 놓친 사내가
강가로 나가고 없는 빈집도 한 땀,


물의 베개에 수놓아져 있다
....................................................................................................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싱그런 바람의 노랫소리.
언제나 그렇게 있었던 바람의 노래가 새롭게 들리는 아침은 분명 축복이다.
무언가를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은 축복이다.
늘 그렇게 있었음에도 알지 못했던 이유는
내 눈을 뜨지 못했고, 내 귀를 열지 못했고, 내 마음을 쓰지 못했던 것.
앎은 그렇게 온다.
눈을 떠서 바라보고, 귀를 기울이고, 내가 마음을 써야 온다.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은 늘 그렇게 내 곁에 있었다. 그걸 알게 되는 기쁨은 꽤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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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규관


가자고 간 건 아니었지만
간 자리마다 허무 가득한 심연이다


떠나고자 떠난 건 아니었지만
두고 온 자리마다 가시덤불 무성한 통곡이다


지금껏 품은 뜻은 내 것이 아니었고
꾸었던 꿈도 내 소유가 아니었는데


지나온 길 위에 남긴 흔적에
왜 가슴은 식을 줄 모르는가


멈추자 해도 가야 하고
머물자 해도 떠나야 하는데


왜 설렘이고 번민인가
바람이고 생명인가
......................................

 

푸른 하늘 빛과 물 빛이
맞닿은 곳
연초록빛 들판에
형형색색 들꽃이 번져
생과 사의 경계조차 모호한 곳

이름 모를 바람이 들판을 휘휘 돌아
푸른 물길로 눈 맞아 달아나고
여전히 군데 군데
풀 누운 자리
꽃 진 자리 남았다.

가슴 속의 푸르름은 변함이 없건만
눈뜨고 보니 나는 꽤 먼 곳까지 와 있다.
말로 풀기에도
글로 쓰기에도 너무
길고 긴 사연을 언제 다 얘기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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