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여행가방


                                  김수영


스무살이 될 무렵 나의 꿈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여행가방과 펠리컨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낯선곳에서 한 번씩 꺼내 엽서를 쓰는 것.


만년필은 잃어버렸고, 그것들을 사준 멋쟁이 이모부는 회갑을 넘기자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를 낳고 먼 섬에 있는 친구나, 소풍날 빈방에 홀로 남겨진 내 짝 홍도, 애인도 아니면서 삼년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남자, 머나먼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한 삼촌..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이따금 다락 구석에서 먼지만 풀썩이는 낡은 가방을 꺼낼 때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자그락거리며 침목을 밟고 간다. 그러나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주워온 돌들은 어느 강에서 온것인지, 곱게 말린 꽃들은 어느 들판에서 왔는지.


어느 외딴 간이역에서 빈자리를 남긴 채 내려버린 세월들. 저 길이 나를 잠시 내려놓은 것인지, 외길로 뻗어 있는 레일을 보며 곰곰 생각해 본다. 나는 혼자이고 이제 어디로든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

봄 햇살 따스한 날
부실한 다리도 쉬고, 눅눅한 기분도 말릴 겸,
길게 누운 나무 의자에 살짝 걸터앉았다.


꽃은 잠깐 폈다, 밤 사이
하염없는 봄비에, 심술궂은 봄바람에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봄 볕의 따스함이야
겨우내 떨어봤으니 잘 알 터.


봄 기운에 나른해진 몸,
아쉬움을 보태 묵직해진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반 접어올린 소맷자락에
찰싹 달라붙었던 꽃잎 한 장.
포르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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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종택


평생 한 번도
바람에 거슬러 본 적 없었다
발목이 흙에 붙잡혀
한 발자국도 옮겨보지 못했다
눈이 낮아
하늘 한 번 쳐다보지 못했다
발바닥 밑 세상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었으므로
참, 모질게도, 나는 살았다.
.............................................................

'여기까지 잘 오셨습니다' 는
말 한마디가 가슴을 쾅 치고 지나가더니
종일토록 눈물이 멎을 줄 모른다.


슬픔은
하얀 꽃잎 가득 날리던 자리에도
푸른 바람 따라
연초록이 가득 번진 산등성에도
노을 붉은 해질녘 언저리에도 있었다.


푸른 눈물로 씻고 또 씻고
붉은 산등성이 너머
하얀 바람이 불어도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꽃 진 자리엔
또 초록이 나고
또 초록이 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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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인(火印)


                            도종환


비올바람이 숲을 훑고 지나가자
마른 아카시아 꽃잎이 하얗게 떨어져 내렸다
오후에는 먼저 온 빗줄기가
노랑붓꽃 꽃잎 위에 후두둑 떨어지고
검은등뻐꾸기는 진종일 울었다
사월에서 오월로 건너오는 동안 내내 아팠다
자식 잃은 많은 이들이 바닷가로 몰려가 쓰러지고
그것을 지켜보던 등대도
그들을 부축하던 이들도 슬피 울었다
슬픔에서 벗어나라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섬 사이를 건너다니던 새들의 울음소리에
찔레꽃도 멍이 들어 하나씩 고개를 떨구고
파도는 손바닥으로 바위를 때리며 슬퍼하였다
잊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이제 사월은 내게 옛날의 사월이 아니다
이제 바다는 내게 지난날의 바다가 아니다
눈물을 털고 일어서자고 쉽게 말하지 마라
하늘도 알고 바다도 아는 슬픔이었다
남쪽 바다에서 있던 일을 지켜본 바닷바람이
세상의 모든 숲과 나무와 강물에게 알려준 슬픔이었다
화인(火印)처럼 찍혀 평생 남아 있을 아픔이었다
죽어서도 가지고 갈 이별이었다
...............................................................................

미안하다.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오늘.

하루 종일 등짝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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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위한 서시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

이것은 아슬아슬한 줄타기 아니, 버티기...
마치 짐승의 울부짖음 소리가 등줄기를 따라 흐르며 잦아든다. 숨소리도...
솨아아...꽃향기 흙비린내 뒤섞인다.
산듯한 봄바람이 흔들고 지나간 목줄기는 말라들어가고

송글송글 빗방울이 탁탁 튀어오르자

우수수 꽃 진다. 수북하게 쌓인 꽃잎 위를 다시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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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미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

요즘들어 부쩍 불편해진 화장실 용변 보기
힘겹게 일을 마치고 손을 씻다가
문득, 언젠가 내 스스로 뒷처리조차
말끔히 못하게 되는 순간을 맞게 되면
삶이 무척 서러워지겠다 싶었다.

우선 그때까지는 깔끔하게
뒷처리를 하겠다 마음 먹으며
손이 벌개지도록
씻고 또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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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


                       강미정


거미줄이 심하게 흔들린다, 기다려야 한다, 거미줄이 심하게 퍼덕인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거미줄이 심하게 헝클어진다, 아직은 좀더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한다, 심하게 흔들린 거미줄이 멈춘다, 심하게 퍼덕이던 거미줄이 멈춘다, 심하게 헝클어진 거미줄이 멈춘다, 거미는 심하게 흔들린 고통을 먹는다, 거미는 심하게 퍼덕인 고통을 먹는다, 거미는 심하게 걸려든 고통을 먹는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고통을 먹는다, 천천히 거미가 되는, 고통은 언제나 흔들린다, 흔들리는 고통은 언제나 배가 고프다, 배고픔에 걸린 고통은 언제나 달콤하다, 달콤한 고통은 언제나 골과 뼈를 빤다,


나는 걸려들지 않으려고 버둥거린다,

..................................................................

한 발씩 한 발씩 옮기는 걸음마다
서걱거리며 무너지는 서릿발


얼마나 걸었을까?
삭정이같은 이 길을 참 오래 걸었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길을
얼마나 가야 끝에 닿는지도 모르는 이 길을.


두려우냐?
검은 그림자는 은밀한 질문을 꽂고

나는 두렵지 않다고 짧게 잘랐다.


차마 외돌아 갈 수 없었던
내 고집스런 발걸음이 옳기를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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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을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면서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마가리 : 오막살이.
고조곤히 : 고요히, 소리없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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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먹는 저녁


                       이상국


섭섭한 저녁이다
썰렁한 어둠을 앉혀놓고
눈 내리는 고향을 생각한다
마른 수국대궁에도 눈은 덮였겠지


고만고만한 지붕 아래서 누가 또 쉬운 저녁을 먹었는지
치킨 배달 오토바이가 언덕배기를 악을 쓰며 올라가고


기운 내복 같은 겨울 골목
주황색 대문집
페이스북으로
이름만 아는 여자가 나를 찾아왔다
머리에 눈을 이고 왔다
어디선가 다들 외로운 모양이다


산간 지방엔 폭설이 내린다는데
쓸데없이 섭섭해서
밥은 늘 먹는다고
저녁에 라면을 끓인다
.....................................................................

사람만큼 허술한 것이 없어.
튼튼한 팔다리도, 날카로운 발톱도, 단단한 뿔도,
뾰족한 이빨도, 예민한 감각도 없으니.


사랑만큼 허술한 것도 없어.
죽자사자하는데 따져보면
줄 것도 변변치 않고, 받을 것도 별로 없는.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그렇다고.


허술한 난간에
홑겹 쌓인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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