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난 양말은 당연히 꿰메서 신는줄 알았죠

 



아이들을 많이 났던시대라 맡이가 동생들을 곧 잘보곤 했지요 !

 



예전에는 식구들이 많은탓도 있지만 예전풍습대로

여자들은 밥상에도 못끼고 바닥에 내려놓고 먹곤했답니다 !

 



그시절엔 뽑기와 달고나가 최고의 간식거리 였답니다 ~

 



남자들은 거의가 머리깍는기계로 빡빡밀기도 했답니다~

 



새끼줄에 낀 연탄을 낱장으로 사오기도하고

봉지쌀을 사다먹기도 했습니다 !

 



조개탄으로 교실 난방을 하던때라 난로위에 도시락을 올려놓아서

따뜻하게 먹곤했답니다 ~~!



교실바닥이 마루로 되어있어서

걸레를 만들어와서 광을 냈지요!



몇년 늦게 학교에 들어와 나이가 많은 학생도 더러 있었습니다!



수업중에 싸우거나 딴짖을 하면 꼭벌을 세웠답니다!

그때그시절이 그립습니다~~~!



출처 : 그리움은 강물되어
글쓴이 : 오경 원글보기
메모 :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숲속작은도서관이 도시의 삶을 접고 정말 숲 속으로 옮겨가기 위한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 중입니다. 우리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 숲속을 여행하는 것도

그 프로젝트의 하나인데요, 이번에 가까운 나라 일본의 숲속 동화나라를 견학하고 왔습니다.

도서관 선생님들과 가족, 출판사, 계수나무 위정현 샘도 함께 하셨고요...총 20명의 방문단이었습니다.

 

어린이출판협의회 분들께는 도움될만한 내용같아서 이곳에 올려보고 싶은데....

(블로그에 내용을 올렸는데 네이버인지라 다음 카페에 퍼오기가 어려워 아쉬운대로 대략 옮겨봤습니다.

제 블로그에 방문하시면 사진도 보실 수 있어요.

http://blog.naver.com/supsokiz

(네이버 블로그에서 숲속작은도서관 검색하시면 됩니다)

 

길다란 일본의 남쪽 끝, 큐슈 중에서도 아래쪽에 자리한 미야자키현.

평범하지만 자연이 아름다운 시골 마을 그곳에는 이미 15년 전, 동화 같은 그림책마을이

들어섰습니다.

쇠락해가는 농촌 마을을 살리고자 '마을 부흥운동'으로 시작한 그림책 마을 만들기 프로젝트.

조용했던 시골 작은 마을은 이제 일본 뿐 아니라 한국과 세계 수 만명의 관광객들이

동화를 찾아, 동심과 휴식을 찾아 오는 큐슈 최대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림책 카페와 책방, 그림책 도서관과 소극장,

자연과 인간이 하나되어 어우러지는 야외 공연장, 물의 무대와 숲의 무대...

공간은 소박하나 자연을 인공적으로 탐하지 않아

땅과 숲, 나무와 사람, 하늘의 해와 별이 고스란히 우리 가슴에 들어와 안기는

키조 그림책 마을,

이야기가 살아있는 숲속 동화나라입니다.

 

 

키조그림책 마을을 이야기하려면 마을 촌장 쿠로키 이쿠토모 씨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자기가 나고 자란 이 고향의 아름다운 자연을 소중히 지켜가고 싶었다는 쿠로키상.

젊은이들은 마을을 떠나가고,

농촌 마을은 점점 쇠락해져가고,

노인들만 남은 시골엔 돈도 사람도 없어져 삶의 기쁨이 사라져만 가는데

그 마을을 다시 살리기 위해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지방자치단체 공무원과 마을 주민들의 고민이 깊어갈 때 쿠로키상은

"이곳에 그림책 마을을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마을 전체의 약 80%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깊은 산골에 그림책 마을이라니....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수만가지의 이야기들이 나왔으리라는 건 안봐도 짐작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마을을 만들어낸 것은 쿠로키상의 고집과 집념,

그에 감동한 마을주민의 전폭적인 후원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마을 부흥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중앙정부, 미야자키현, 키조마을이 각각 삼등분하여 재정을 마련,

1996년 4월, 숲속 그림책관, 숲속 책방, 그림연극 오두막 등의 시설로 이루어진

키조그림책 마을이 완성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찾아오라고 광고하지 않아도

텔레비전이나 신문 광고를 통해 애써 알리지 않아도

이곳이 문화를 만들어내고 문화를 전파하는, 문화의 발상지가 된다면

세계의 사람들이 그 문화를 흡수하기 위해 절로 찾아올 것이라는 게 쿠로키 촌장의

신념이었습니다.

 

 

미야자키현 키조지역에 그림책마을을 조성할 때

쿠로키 촌장은 세 가지 원칙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첫째, 자연을 지킨다.

둘째, 그림책 도서관이 자연을 훼손해서는 안된다.

셋째, 아이들에게 가장 소중한 건 자연의 체험. 책읽는 것보다 자연을 느끼고

시간을 즐기게 하는 곳이고 싶다.

 

세 가지로 나누어 말했지만 이는 결국 하나입니다.

바로 자연이지요.

 

이곳 그림책마을을 돌다보면 웬지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그건 마당에 잡초 하나도 뽑아내지 않는 자연의 가치 때문이지요.

 

그림책마을이 생기기 전, 마을 사람들은 자연에 대해 크게 인식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늘 자연과 더불어 살아왔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 아닐 뿐더러 때로 자연은 불편한 것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자연을 이용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며

자연이 아름답게 보존되어 있는 마을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되었지요.

이 마을에 와서 살고싶다는 사람도 점점 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멀리 한국에서부터, 또 세계로부터 키조그림책마을을 찾게 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그건 바로 이곳이 '스토리텔링'이 살아있는 공간이라는 점이지요.

건축의 기본으로부터 인테리어 하나, 소품 하나, 공간구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하나의 일관된 철학과 이야기를 바탕으로 꾸며져가고 있는 공간.

무턱대고 보기좋고 예쁘고 그럴듯한 것들을 마구잡이로 이식해서 꾸며놓은 공간과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고, 살아있는 그 이야기들이

우리의 귓가에 소근소근 사연들을 전해주기에 그림책마을은 그만의 생명을 갖고있는 것이지요.

 

 

 

 

이곳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가 '자연'이라면

그안에는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늘'과 '달'과 '별'입니다.

 

그림책 도서관 안의 책상과 의자는 모두 달과 별 모양입니다.

모든 가구들이 하나도 똑같은 크기, 똑같은 모양이 없습니다.

한 장의 설계도로 기계적으로 뽑아낸 디자인이 아니라는 설명입니다.

 

 

의자들 크기도 다 다르고, 높낮이도 다르고, 등받이의 높낮이도 각기 다릅니다.

의자 등받이 뒤에는 구멍이 뚫려있는데요....자세히 보니 이게 모두 별자리입니다.

벽에는 하늘을 타고 오르는 별을 따는 사다리가 걸려있고

아가들이 엄마와 함께 앉아서 책을 보는 책상은 조각달의 모습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릴 놀래킨 것은 도서관 한 쪽 벽을 왜 까맣게 만들어놓았을까 궁금했었는데

그건 바로 미닫이 문이었습니다.

까만 미닫이 문을 옆으로 옆으로 밀어내자 바깥의 데크가 그대로 무대가 되고

무대 뒷 편으로는 자연스럽게 관객석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안과 밖을 하나로 연결, 사람과 자연이 나누어지지 않고 하나로 소통하게 만든

이 도서관의 구조는 정말 매력적이었습니다.

 

도서관이 평소에는 책을 읽다가,

높은 천정에 조명을 밝히고 문을 열면 야외 공연장이 되는

복합형 설계 구조를 갖추고 있었던 겁니다. 이곳이 바로 '숲의 무대'입니다.

 

그리고 저 멀리 호숫가에는 '물의 무대'가 있고요.

마지막으로 산 위쪽에 '하늘의 무대'를 만들려고 한다고 하네요.

 

키조그림책마을의 포스터를 보면,

지구라는 별에서 그림책을 펴든 아이들이 우주로 교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의 그림책 읽는 소리는 저 먼 우주 어느 별에 가 닿습니다.

아주 작은 지구라는 별에 살고 있는 먼지같고 유한한 우리 존재가

말할 수 없이 광활한 우주 속에서 영혼의 언어로 소통할 때

비로소 우리 삶이 유의미함을 말해주는 듯하여 이 포스터가 정말 맘에 들었습니다.

 

키조그림책마을의 정신을 이 한 장의 그림이 다 말해주는 듯합니다.

 

그림책마을 안에 있는 책방에서는 많은 책이 판매된다고 합니다.

일본은 도서정가제가 지켜지고 있고 할인판매가 많지 않아서

이왕이면 내게 추억을 안겨주는 의미있는 장소에서 책을 구입한다고 하네요.

우리가 서점에서 책표지만 보고, 구입은 달랑 인터넷 서점에서 하는 것과 조금 구분되지요...

그래서 방문객들이 구입하는 책의 매출이 이곳 운영에 큰 힘이 된다고 합니다.

아울러 그림책마을에서는 차에 책을 싣고 인근 학교 도서관으로 책판매를 다닌다고 하네요.

학교 도서관에서는 그림책마을에서 권하는 책이라면 무조건 믿을만하다....는 신뢰로

책을 구매해주고...

그렇게해서 이 마을 1등 수입원은 바로 서점 책판매 매출입니다.

 

 

키조에 그림책마을이 생기면서 조용한 마을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쿠로키 촌장의 소원은 자연과 더불어 이 도서관이 살아 남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온,

한국의 그림책마을을 꿈꾸는 도서관 선생님들과 가족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발 밑의 벌레와 풀 한 포기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알고

마음 속에 자연과 생명의 책을 갖고 있다면

어디든지 바로 그곳이 가장 빛나는 당신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우주 저 너머에서 내게 공명해주는 별의 이끌림에 따라,

나의 꿈과 접속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돌아온 그림책마을 여행이었습니다.

 

 

키조그림책마을 홈페이지

http://service.kijo.jp/~ehon/hyousi.htm

 

출처 : 한국어린이출판협의회
글쓴이 : 숲속 원글보기
메모 :

비가 오면 짬뽕, 짜장면, 파전등 밀가루 음식이 땡긴다.  그러나..

오래 전 부터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먹을땐 맛있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좋지 않아 밀가루 음식 끊은지 오래.

후유증이 라면은 일주일, 국수는 사흘, 빵, 피자, 과자류 역시 먹으면 괴롭다.

근데 수입 밀가루 안들어간데가 없다.심지어 100%양조 간장에도(수입 밀가루가 13%, 수입콩13%,) 막걸리에도,

한번은  손님 접대차 중국집 코스 요리를 먹은 후 다음 날 얼굴이 찐빵처럼 부었다, 함께 먹은 동료도 마찬 가지.

그런데 우리 밀로 만든 음식은 아무리 먹어도 전혀 이상이 없어 그 이유를 찾아 보았다.

범 국가적인 대책이 필요한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건강을 사랑하는 밥물인들을 위해 올립니다.

입에는 맛있지만 몸에는 독이 되는 것들에 둘러 싸여 있는 상황에서 밥물인이 된 것이 다행스럽다.


수입 밀가루는 쥐도 안먹는다는데?
예전에는 쌀집에서 밀가루를 종이 봉투에 담아서 팔았었다. 그런데 그 밀가루를 집에다 오래 놔두면 벌레가 생기고, 날파리가 생겼었다. 그런데 요즘 밀가루는 백날을 놔둬도 절대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 아, 그래서 깨끗하고 좋은 것일까? 그게 그렇지를 않다. 벌레들이 살아남기에는 밀가루가 너무 독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어느 사찰의 스님은 재래식 화장실에다 밀가루를 뿌린다고 한다. 그러면 구더기가 꼬이지 않아서 화장실이 깨끗해진다는 것이다. 아, 벌레도 죽이고, 구더기도 죽이는 이 밀가루의 가공할 만한 위력! 밀가루가 어쩌다 살충 능력까지 갖추게 되었을까?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밀은 주로 미국에서 들어오는 것이고, 캐나다나 호주에서도 들어온다. 밀을 비행기에 실어나를 수는 없는 일이고, 천상 배타고 와야 하는 것인데, 수확하고, 선적해서, 태평양 건너 한국까지 당도하려면 몇 달은 걸린다. 갓 수확한 햇밀이 아니라면 수확한지 몇 년 된 밀도 들어오겠지. 이것이 배타고 한국까지 오는데 과연 벌레도 안생기고 깨끗한 상태로 올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고안해낸 방법이 바로 포스트 하비스트(post harvest)라는 것이다. 포스트 하비스트란 수확을 한 뒤에 또 농약을 치는 것을 말한다. 유통과정 중에 벌레 생기지 말라고, 썩지 말라고 농약을 치는 것이다. 이런 몹쓸 짓을 도대체 어떤 인간이 제일 처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농사를 짓는 중에 농약을 치는 것은 그래도 비바람을 맞으며 씻겨갈 기회라도 있다. 그러나 다 따놓고 나서 농약을 치면 고스란히 소비자의 입안으로 들어올 위험이 훨씬 더 큰 것이다. 밀 뿐만 아니라 수입 감자, 옥수수, 오렌지, 레몬, 바나나 같은 것이 포스트 하비스트 처리를 하는 농산물로 유명한 것들이다.

1992년 10월 호주산 수입밀가루에서 살충 효과가 있는 농약성분인 "치오파네어트메틸"이 허용기준의 16배나 함유되어 10만 부대가 불법으로 유통되었고, 1993년 2월에는 미국산 수입밀 1만9백6톤(13억3천만원어치)에서는 그것이 허용기준치의 130배가 검출되는 사건이 있었다. 한 마디로 먹고 죽으라는 얘기지.
치오파네이트메틸은 곡물을 보관하거나 운송할 때 변질을 막기 위해 수확한 뒤에 뿌리는 농약으로 하루 4mg 이상을 섭취할 경우 인후통, 객담, 피부발진, 결막염, 신장장애 등을 유발하는 독성을 지니고 있고, 발암성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밀을 배에 싣기 전에 농약물을 폭포처럼 붓는댄다. 수년 전에 그 광경을 찍은 비디오가 언론에 공개되어 큰 충격을 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건은 세월이 지나면 잊혀지는 법. 그러나 미국 어느 하늘 아래에선가 여전히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더 약오르는 것은 농산물을 수출하는 국가들이 자국 내에서 쓰는 농산물에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 남의 나라 사람들은 먹고 병이 나건 말건 상관이 없다는 말이지. 그리고 농약 잔류량 허용기준이라는 것이 정해질 때 보건적 차원에서 정해지는 것이라기 보다는 정치 경제적인 차원에서 정해진다는 것도 유념해야 할 일이다. 비록 허용 기준치 이하로 농약이 검출된다 하더라도 어쨌거나 수입밀에는 농약이 잔뜩 배어있다. 수입밀은 농약범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렇게 농약에 찌든 밀은 국내로 들어와서 새하얀 밀가루로 거듭난다. 그 과정에서 껍질과 씨눈은 다 날라가 버린다. 껍질에 있던 섬유질은 온데 간데 없고, 씨눈에 들어 있던 노화방지 물질과 비타민들도 다 날라가 버린다. 밀 속알갱이에 들어 있는 탄수화물과 단백질, 이것들은 껍질과 씨눈이 함께 섭취될 때라야 몸을 제대로 이롭게 할 수 있는 것이건만, 진짜 좋은 것은 다 없어지고 그저 새하얀 알몸 덩어리가 불쌍하게 가루로 남은 것이다. 하얗고 깨끗하게 보이라고 표백제까지 쓴대지? 별 영양가치도 없는 것, 그것이 바로 곱게 간 하얀 밀가루이다. 밀은 통밀을 갈아서 먹어야 한다. 그런데 농약에 찌든 그 밀을 어떻게 그냥 갈아서 먹는단 말인가.

헛간에 곡식을 쌓아둘 때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쥐다. 쥐들이 봉투를 뜯고, 가마니를 뜯어가면서 곡식을 낼름낼름 갉아먹기 때문. 그런데 수입 밀가루는 쥐도 안먹는댄다. 동물들은 먹으면 나쁜 것을 알아내는 천부적인 소질이 있댄다. 밀가루가 농약 범벅이라는 것을 쥐도 안다는 뜻이다. 그런데 쥐도 안먹는 것을 사람은 참으로 잘도 먹는다. 아무리 먹지 말라고 얘기해줘도 남들도 다 먹고 다 멀쩡하게 사는데 뭘 그러냐고. 나는 밀가루 음식을 즐겨먹는 사람은 잘 붓고, 소화 기능도 점점 약해지고, 변비도 잘 생기는 것을 숱하게 보아왔다.

우리가 우리밀을 포기하고 수입밀을 먹은 원인 중에 가장 큰 원인은 수입밀이 싸기 때문이다. 인간의 만물의 영장이다. 그런데 몸보다 돈을 더 아껴서야 되겠는가. 돈은 다른데서 아끼고 좋은 것 가려먹는데는 아끼지 말자. 쥐보다 낫게 살아야지

미국산 밀, '89 인천항, 아플라톡신 중독 하역노동자 사망 (허파, 대장, 신장, 피부암)
호주산 밀, '92 목포항, 치오파네트메칠(암, 변이, 기형) 기준치16배초과, 10만포대 유출
미국산밀, '93 부산항, 카벤다짐 132배 초과검출, 사료용 전환불구 5천 톤 시중유출
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모임, 시중유통 밀제품 36종 농약잔류검사, 33종제품에서 마라치온 등 농약검출(유전자 변이성)
미국의 경우 밀 수확후 농약처리 20종 공식허용.
95 국정감사자료, 녹색신고제에 의한 수입밀 농약살포 신고 내역. 미국산 15종(자국사용금지 EPN, 수출용에만 살포/한국사용금지 마라치 온, DDT, 파리치온메칠 등 살포) 호주산 12종, 캐나다산 9종 농약살포.
자 그럼 함봅시다. 우선 생산과정에서 쓰여진 농약들은 다행히도 햇빛에,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이라도 서서히 분해가 됩니다. 그렇다고 다없어지는거 절대 아닙니다. 문제는 유통과정이죠. 미국의 경우 선적지에다 컨베이어 벨트를 선치하고선 거기에 이 농약들을 그대로 분사해버립니다. 샤워시킨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거 얼마나 나쁘냐구요? 당장 가정의 밀가루로 간단한 실험을 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깨끗한 투명용기 같은곳에 수입산 밀을 넣고 그안에 아무벌레고 몇마리 집어넣어 보시길 바랍니다. 몇시간만에 싹 다 죽어버립니다.

그럼 인체에 얼마나 나쁘냐구요? 농약중독으로 일어날수 있는 모든질환이 다 나타난다고 보심 됩니다. 우선 면역력저하에 신경장애,각 기관 기능 저하로 인해 감기 잘 걸리고, 아토피 심해지고, 소화불량에 성질 더러워지고, 건망증도 심해지고 ..심지어 조로현상이 유발되어 중년의 나이에 일찍 얼굴살이 축축 처지기까지 한다고 합니다.한마디로 오만가지 질환을 다 유발시킨다고 보심됩니다. (보다 끔직한 실험결과도 많지만 그건 참을랍니다^^)

혹시나 또 신빙성 문제를 이야기 하시는 분이 계실까봐..시사메거진 2580에 보도된 내용 일부분을 발췌합니다.

 

수입밀가루 개미넣고 실험해 보았더니

 

유기농 수입밀 개미도 몇시간 못 넘기고 죽어

 

 

▲ 왼쪽부터 호주산 수입밀, 키르기스스탄산 유기농 수입밀(가운데), 국산 청국장가루(콩가루).
ⓒ 윤태
오늘은 먹을거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여러분들이 많이 즐기는 밀가루 제품 즉 칼국수와 라면, 자장면, 우동, 수제비, 만두, 햄버거, 피자, 빵, 케이크, 튀김, 온갖 과자류 등. 전 국민이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게 되는 밀가루 제품, 즉 밀가루는 99% 수입이라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다.

주로 미국산이 대부분이고 호주, 캐나다산 등이 들어온다. 그 수입밀가루가 태평양을 건너오는 그 오랜 기간 상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살충제, 방부제 등 어떤 화학 약품으로 처리가 되는지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전문용어로는 '포스트 하비스트' 처리라고 한다. 특히 수입밀가루는 수입바나나와 레몬, 오렌지 옥수수 등과 같이 포스트 하비스트 처리의 대표적인 품목인데, 밀 재배기간이 아니라 수확 후 유통과정상 변질과 부패 등을 막기 위해 농약 등 화학 약품 처리를 하는 것이다.

이 수입밀가루에 대한 해악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식품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일반인들도 이 해악에 대한 것은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지난 93년 <한겨레신문>에서는 부두에서 수입밀가루 하역작업을 하던 노동자가 농약에 중독돼 사망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그 이후로 '우리 밀 살리기 위한 운동'이 시작되기도 했다.

또 그런가 하면 수입밀가루는 "쥐도 안 먹는다"는 유명한 말이 있고, 또 유명한 일화 중에 어느 사찰 스님이 재래식 화장실에 수입밀가루를 뿌리니까 구더기가 꼬이지 않아 좋다는 말도 널리 알려진 대목이다.

즉 수확 후 태평양을 건너오는 동안 변질을 방지하기 위해 농약 등 어떤 화학 약품이 처리됐는지(포스트 하비스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시중에서 사먹는 일반 밀가루(99% 이상 수입)는 아무리 오래 놔두어도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 벌레가 나지 않을 정도로 '독한' 것이 우리가 흔히 먹고 있는 밀가루 즉 밀가루 제품인 것이다.

그래서 9일은 좀 '심각한' 실험을 해봤다. 수입밀가루의 해악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곤충실험을 진행했다. 처음에는 수입밀가루와 국산밀가루의 비교 실험을 하려고 했지만 동네 직판장, 공판장 등 웬만한 매장에서는 국산밀가루를 구입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우리나라 밀 수요가 적고 극소수만이 우리나라 밀 제품을 이용한다는 얘기다. 가격이 수입밀가루에 비해 네다섯 배 비싼 것도 수요가 적은 이유 중 하나이다. 그래서 일반 수입밀가루와 수입 유기농 밀가루, 그리고 집에서 농사지은 청국장(콩가루) 가루로 실험을 하기로 했다.

첫 번째, 시중에서 1kg에 1200원 하는 원산지 '100% 호주산' 밀가루를 구입했다. '무표백'이라고 표시돼 있었다.

두 번째, 시중에서 1kg에 3500원 하는 원산지 '유기농 100% 키르기스스탄산 밀가루'를 구입했다. 이 밀가루 제품에는 100% 유기농 원료를 사용했으며 유네스코 지정 생물권보존지역(MAB)인 키르기스스탄이스콜 농장에서 유기농법으로 재배했다고 표시돼 있었다. 이와 함께 화학비료, 농약 등을 3년 이상 사용하지 않은 깨끗한 원료로 만든 제품이며 '무표백제, 무 합성보존료'라는 표시가 돼 있었다.

세 번째, 집에서 농사지은 콩으로 만든 청국장(콩가루) 가루를 준비했다.


이 세 종류의 밀가루 및 콩가루를 물로 잘 헹궈 말린 요구르트병에 두 스푼 정도 넣고 생생한 개미를 각각 7∼8마리씩을 넣었다. 처음에는 이 세 개의 요구르트병에 있는 개미들이 우왕좌왕하더니 10분이 지나자 밀가루 및 콩가루를 먹는 모습이 보였다.

1시간이 지나자 100% 호주산 밀가루 속 개미들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또 키르기스스탄산 100% 유기농 밀가루 속 개미들 중 두어 마리의 활동이 둔해졌다. 약 3시간 후 호주산 밀가루 속 개미 중 5마리가 죽고 덩치가 좀 큰 두 마리만이 어느 정도 움직이고 있었다.

키르기스스탄산 100% 유기농 밀가루 속 개미도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키르기스스탄산 밀가루 속 개미도 3시간 만에 2마리만 약간씩 활동하고 나머지는 모두 죽었다. 다섯 시간이 지나자 호주산과 유기농 100%라는 키르기스스탄산 밀가루 속의 개미들이 모두 몸을 웅크린 채 죽어있었다.

반면 집에서 농사지은 청국장(콩가루) 가루 속 개미들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12시간이 지났지만 한 마리도 죽지 않고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것은 물론 청국장 가루 속에 집을 짓고 잘 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실험 후 청국장 가루 속 개미들은 방생해주었다.

독자 여러분! 위 실험 결과 어떻게 보셨는가. 동일한 조건에서 이루어진 실험에서 어떤 개미는 일찍 죽고, 어떤 개미는 좀 더 버텼고, 또 다른 개미는 시간이 많이 흘러도 멀쩡하게 활동을 한다는 실험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실험 결과가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유기농 밀이라 할지라도 우리나라로 건너오는 비교적 장기간 유통과정의 밀가루는 그다지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비록 수입밀과 국산밀을 비교, 대조 실험은 아니지만 일반 수입밀가루든 유기농 수입밀가루든 '수입된 밀가루' 속에서 개미는 몇 시간 못 버티고 죽고 말았다.

우리 밀 자급자족률이 채 1%도 안 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밀가루 제품 먹을거리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을 확산해 자급자족률을 높여야 할까? 물론 그렇게 된다면야 오죽 좋겠지만 우리나라 기후와 여러 여건상 쉽지 않은 일이고 값싼 수입밀가루가 이미 생활을 뒤덮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피하기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밀가루 제품, 식품 섭취. 먹지 않으래야 안 먹을 수 없는 제품. 독자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 키르기스스탄산 유기농 수입밀 속에 죽어있는 개미들.
ⓒ 윤태
▲ 호주산 수입밀 속에서 5시간 만에 죽어버린 개미들.
ⓒ 윤태

이 비교 실험 기사를 쓰게 된 이유는 언젠가 책에서 수입밀과 국산밀에 개미를 넣고 실험을 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실험 결과 수입밀 속 개미는 다 죽고 국산밀 속 개미는 살아있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실험에 나선 것이고 위와 결과를 얻은 것입니다.

쌀가루 만들어 드십시요.우리밀만 드십시요.

출처 : 그리움은 강물되어
글쓴이 : 서서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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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Ivan Ivanovich Shiskin (숲 속 In grove / 1865) 이 숲에 들어설 때마다 내 몸과 마음은 거덜 나 있었습니다. 마음은 사막처럼 모래먼지가 날리고 정신은 지칠대로 지쳐있을 때.... 숲은 그런 나를 받아주고, 내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게 하여 골짜기 물로 닦아주고 나뭇잎의 숨결로 말려주었습니다. 외로움 끝에 찾아오는 고요함을, 적막 끝에 다가오는 평화로움을, 두려움 끝에 찾아오는 맑은 생각을 나에게 주었습니다. 지친 그대가 이 숲에 오신다면 숲이 나무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나뭇잎을 흔들어 박수를 치며 그대를 받아줄 것입니다. 분주한 마음으로 이 숲에 오셨다가 고요해진 마음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대 혹시 사막에 계시지 않는지요? 한 손에 경전을 들고 일사분란하게 지도자를 따라가면서도 불안함을 떨칠 수 없어 다른 손에 무기를 숨겨둔 채 살고 있진 않는지요? 지켜야 할 수많은 계율이 있고 도처에 원수가 숨어 있으며 경쟁과 싸움을 피할 수 없어서 불안하다면 그대는 사막에 있는 것입니다. 그대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립니다.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그대가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도종환 시인의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중에서 아래는 레스카페님이 올리신 "이반 이바노비치 쉬스킨 - 숲의 화가 그림 여행" 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19세기 러시아 미술사를 읽다 보면, 상추 밭에 씨를 뿌리고 난 다음 며칠 지나면 빼곡히 올라오는 여린 잎들이 생각납니다. 대단한 화가들이 동시에 꼬리를 물고 등장하는데 이반 아이바조프스키가 ‘바다의 화가’라면 ‘숲의 화가’라는 말을 듣는 이반 이바노비치 쉬스킨 (Ivan Ivanovich Shiskin / 1832~1898)도 그 중 한 명입니다. 언젠가 썼던 기억이 나는데, 러시아 화가들이 묘사한 숲을 보면 숲의 정령들이 그 안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호수가 있는 풍경 Landscape with a lake / 1886) 호수 위로 맑은 하늘이 열렸습니다. 땅 위의 호수는 그 넓이만큼 하늘을 담고 있습니다. 맑고 투명한 가을 오후, 나지막한 언덕 너머로 지붕들이 고개를 내밀고 하늘과 산이 맞닿은 아스라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러시아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쉬스킨은 아버지가 좀 특이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수성가한 상인이자 고대 유물 애호가였습니다. 아들이 고대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하여 볼가강 유역의 고대 불가리아 왕국의 유적지에 데려가곤 했는데 어린 쉬스킨의 머리 속에 깊고 넓은 숲이 자리를 잡는 기회였을 것입니다. (숲 속 In grove / 1865) 숲 속 얕은 곳에 물이 고여있는 것을 보면 비가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농기구를 들고 일터로 나가는 두 여인의 뒤로 햇빛이 폭포수처럼 숲에 내리고 있습니다. 덕분에 숲도 환합니다. 걸어가는 여인들이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12살 때 공립중학교에 입학한 쉬스킨은 미술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난 것은 좋았지만 그림에 대한 그의 정열이 오히려 공부하는데 방해가 되었습니다. 좁고 닫혀진 학교 생활의 틀에 자신을 집어 넣는 것을 싫어했던 그의 기질도 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 나는 점원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라는 말을 하고는 4년째 여름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 가는 것을 포기합니다. 그의 아버지가 고민을 많이 하셨겠지요. 오랜 고민 끝에 아버지는 아들이 원하는 길을 갈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결심을 합니다. 좋은 아버지였습니다. 나는 좋은 아버지인가 ----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숲 속의 산책 Walk in a forest / 1869) 햇살 좋은 오후, 가족들이 숲으로 산책을 나왔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자작나무도 보입니다. 앞서 가던 개는 나무에 앉은 새가 영 거슬리는 모양입니다. 아버지에게 딸이 무언가를 조르는 듯 합니다. 난처해 하는 아버지의 자세를 보면 아마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다는, 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근처 지역의 스승 밑에서 그림 공부를 하다가 모스크바 예술학교를 거쳐 상페테스부르그 예술아카데미 (Academy of Arts)에 입학합니다. 그 때 그에 대한 평가는 ‘이미 예술가 수준을 넘어섰다’ 였습니다. 대단한 재능을 보였던 모양입니다. 아카데미 학생들의 여름 순례 코스인 바라암 섬에 자주 갔었는데, 자연을 완벽하게 재현하고자 했던 그의 정열이 바라암 섬의 풍경을 묘사한 작품 두 점에 녹아 들어 간 결과, 최우수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아르힙 쿠인지가 그린 ‘바라암 섬에서’ 라는 작품도 참 좋았죠. (핀란드만 근처 해안 Near coast of Gulf of Finland / 1888) 들꽃이 흐드러진 길 옆으로는 바다가 펼쳐있습니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 아래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더 없이 좋아 보입니다. 살면서 저렇게 평화롭게 길을 걸어 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몇 번이나 남은 걸까 -----. 그림을 들여다 보다가 마음에 울컥 떠 오른 생각이었습니다. 이 작품의 구도는 아리힙 쿠인지의 ‘크리미아 바다’ 라는 작품과 아주 닮았습니다. 물론 쉬스킨의 작품 연대가 10년 빠르지만요. 최우수상을 받은 그에게는 외국 유학을 갈 수 있는 정부의 장학금이 주어졌지만 쉬스키은 바로 떠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 많은 풍경을 그립니다. 이 점은 ‘바다의 화가’ 아이바조프스키와 똑같습니다. 상페테스부르그 예술 아카데미의 최우수 학생들의 전통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되면 언제고 한 번 추적해보고 싶습니다. 아내가 한 마디 했습니다. 별걸 다 ------. (스위스의 너도밤나무 숲 Beech forest in Switzerland / 1863) 잘 생긴 너도밤나무가 화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사실 너도밤나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목을 따라 갔습니다. 산에 가도 나무나 꽃 이름을 잘 모르는 저에게는 이렇게라도 제목이 붙으면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스위스의 산악 풍경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말을 듣는 그의 작품 중 하나인데 스위스 여행 중에 10여장의 스케치를 했지만 나중에 회화로 완성 된 것은 3점뿐이었다고 합니다. (폭풍이 불기 전 Before a thunderstorm / 1884) 폭풍이 밀려 오는 하늘 저 편이 어둡습니다. 검은 색의 어두움이 아니라 어두운 청색이지만 화면 앞의 노란색 들풀이 주는 느낌과 대비되어 긴장감은 오히려 더 높아졌습니다. 그의 독일 베를린과 뒤셀도르프, 드레스텐에서의 유학 생활이 유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곳의 권위적인 교수들의 지도 방법이 그의 기질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스러웠던 러시아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면서 급기야 향수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아마 언어 문제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프라하를 여행할 때는 생기기 돌았는데 주변에 러시아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숲 속의 양봉 Apiary in a forest / 1876) 물을 길러 오는 노인의 어깨가 구부정합니다. 생활의 무게가 한 짐 노인의 어깨 위에 내려 앉아 있습니다. 뒷 편의 오두막과 많지 않은 양봉통이 노인의 전 재산인 모양입니다. 그래도 숲은 그 안에 터전을 잡은 사람을 버리지 않습니다. 문득 지리산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유학생활은 그에게 또 다른 전기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스위스 쮜리히에서 에칭 기술과 펜화를 배우게 됩니다. 그의 에칭과 펜화 작품은 뒤셀도르프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쉬스킨이 남긴 기록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어디를 가든 사람들은 내게 그 놀라운 그림을 그린 러시아 화가냐고 물었다’ 조금 잘난 척 하는 느낌이 있지요? (숲 가장자리의 꽃 Flowers on an edge of a wood) 숲이 시작되는 곳에 꽃 밭이 열렸습니다. 키 작은 꽃 들을 지나면 숲이 이어지지만 눈 길은 자꾸 꽃에 머물게 됩니다. 기분이 그런가요, 키 큰 나무들이 꽃 밭을 보호하는 울타리 같습니다. 귀국 후 그는 방랑파의 회원이 됩니다. 아카데믹한 화풍의 구속에 반대하는 젊은 화가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이 모임은 러시아 전역을 기차로 돌며 순회 전시회를 갖게 됩니다. 이 모임에서도 쉬스킨은 주목을 받는 화가였습니다. 거대한 녹색 숲처럼 건강하고 즐거운 그의 성격이 모임에 모인 사람들을 감염시켰습니다. (안개 낀 아침 Foggy morning / 1885) 숲이 깨어나고 있습니다. 더불어 숲을 따라 흐르는 물도 다시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밤 숲과 강을 이불처럼 덮어 주었던 안개들은 서서히 자리를 뜨기 시작했습니다. 또 하루가 시작되는 숲 속의 순간을 고요하게 잡았습니다. 머리가 맑아 지는 순간입니다. 잘 먹고 잘 떠들고 가장 큰 목소리를 가진 그였습니다. 시간이 되면 그는 펜화를 그렸는데 모임에 참가한 화가들은 그의 등 뒤에서 숨을 꼴딱거리며 그의 어깨 너머로 그가 그리는 펜화를 보았다고 합니다. (폴시에 풍경 Landscape in Polessie / 1884)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에는 황량함과 여유로움이 동시에 머물고 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볏가리 같은 것인데 저렇게 쌓아 놓은 것을 뭐라고 하는지 어휘력 빈곤과 경험 부족의 저로서는 -----. 얼마 있으면 저런 벌판을 볼 수 있겠지요. 윗 단추 두 개쯤 풀고 벌판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만경, 만경에 가면 저런 벌판이 있었습니다. (인디언 썸머 Indian summer / 1888) 봄 날 같은 화창한 날씨를 인디언 썸머라고 하는데 그림 속의 분위기는 만추의 저녁 무렵입니다. 세상이 붉게 타 올랐습니다. 짙은 단풍을 볼 때 마다 한 해의 끝은 저렇게 화려해야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한 해의 끝 만 그럴까요 ----. 물도 붉게 타오르는 단풍을 싣고 흘러갑니다. 그의 회화 기법은 자연에 대한 분석적인 기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끝 없는 숲의 형태를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해 끝없는 노력을 기울였는데 몇몇 평론가들은 색깔이 입혀진 그림이지만 생명력이 없다는 평을 합니다. 생명력 ---? 평론가들이 말하는 생명력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하던 쉬스킨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완벽하게 정리된 작품들을 완성해 갑니다. (한 낮, 모스크바 근처 Noon, view near Moscow / 1869) 아, 정말 장쾌한 풍경입니다. 화면의 3분의 2를 하늘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빛으로 꽉 찼습니다. 벌판을 가로지르는 길은 황금색 벌판 사이로 끝없이 흰 선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멀리 뻗어 있는 길만 보면 발을 멈추는, 눈길을 고정 시키는 병이 이 작품을 보면서 여지 없이 재발하고 말았습니다. 이 작품은 평론가들로부터 ‘환희의 송가 (Song of joy)’ 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렇죠, 환희의 송가가 어울릴 법한 작품입니다. ( 전인 미답지 Backwoods /1872) 넘어져 있는 나무들 위로 이끼가 내려 앉았습니다. 나무 잎 하나 하나를 세밀하게 묘사한 쉬스킨의 공력이 놀랍습니다. 그의 별명이 ‘숲의 황제’ ‘ 외로운 참나무’ ‘ 늙은 소나무’ 였다는 것이 당연해 보입니다. 늙은 소나무는 아마 나이 들어서 얻은 별명이겠지요? (시골집 마당 Country courtyard) 화면의 대부분이 황토색입니다. 쉬스킨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우리에게도 편한 정경입니다. 시골 안마당은 어딜 가도 같은 모양입니다. 러시아 사람들에게는 다차라는 주말 별장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다는, 참 부러운 문화인데 쉬스킨의 많은 작품이 다차에서 완성 되었습니다. (북쪽 In the North wild / 1891) 차가움과 고요함 그리고 쓸쓸함이 눈을 뒤집어 쓰고 서 있습니다. 달 빛이 비치는 언덕에서 바라보는 북쪽은 끝없이 펼쳐진 평원입니다. 나뭇가지를 부러뜨릴 듯이 쌓인 것은 눈이 아니라 세월 속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생겨난 그리움입니다. (겨울 Winter / 1890) 처음 이 작품이 사진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부분 환한 낮과 밝은 계절을 그린 그의 많은 작품 중에서 특이한 것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서 그의 인생의 겨울이 언젠가 찾아 봤습니다. 그는 두 번 결혼 했고 두 번 다 아내와 사별했습니다. 아이들도 그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남자로서, 부모로서 이 보다 더한 고통도 없었을 것 같은데, 그의 그림에서는 그런 슬픔을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이 그림을 보자 쓸쓸한 그의 인생이 떠 올랐습니다. (폭풍 전의 숲 Forest before thunderstorm / 1872) 아직 폭풍의 징조는 보이지 않습니다. 폭풍을 직감한 새 한 마리가 목을 추기고 있고, 또 한 마리는 나뭇가지에서 잠시 쉬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폭풍 전야’의 고요함입니다. 그의 대표작들은 러시아 풍경화의 기준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40여 년의 화가 생활 중 수 백 점의 회화와 수 천 점의 드로잉을 남긴 그는 ‘숲 속의 왕국 (Forest kingdom)’이라는 작품을 그리다가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숲 속 시내 Brook in a forest / 1880) 쉬스킨은 또 다른 러시아 풍경화의 대가 이삭 레비탄에 비해서 그 시대 대중들로부터의 명성은 떨어졌지만 숲의 묘사에 관한 한 최고였습니다. 특히 젊은 화가들 사이에서는 말이 필요 없는 권위자였습니다. 오늘도 러시아 숲 어디선가 쉬스킨은 숲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겠지요. потрясающе! Rain in an Oak Forest View in the Vicinity of St. Petersburg. 1856. In the Grove. 1869. Promenading in the Forest. 1869. Willows Lit Up by the Sun. 1860s-1870s. Gathering Mushrooms. 1870. Path in a Forest. 1880. Deciduous Forest. Misty Morning. 1885. Pine Forest. 1885. Oak-Trees. 1886. Mixed Forest. Shmetsk Near Narva. 1888. The Mordvinovo Oaks. 1891. Pond in a Old Park. Study. 1898. Grove by the Pond. Preobrazhenskoye. 1896. Landscape with a Woman. 1872. The Teutoburg Forest. 1865. View near Dusseldorf. 1865. Morning in a Pine Forest. 1889. Portrait of Ivan Shishkin Portrait of Ivan Shishkin by Ivan Kramskoy, 1880. Ivan Ivanovich Shishkin (Russian: Иван Иванович Шишкин, 25 January 1832 – 20 March 1898) was a Russian landscape painter closely associated with the Peredvizhniki movement. Shishkin was born in the town of Elabuga of Vyatka Governorate (today Republic of Tatarstan), and graduated from the Kazan gymnasium. He then studied at the Moscow School of Painting, Sculpture and Architecture for 4 years, then attended the Saint Petersburg Imperial Academy of Arts from 1856 to 1860, graduating with the highest honors and a gold medal. He received the Imperial scholarship for his further studies in Europe. Five years later Shishkin became a member of the Imperial Academy in St. Petersburg and was professor of painting from 1873 to 1898. At the same time, Shishkin headed the landscape painting class at the Higher Art School in St. Petersburg. Blue Autumn  / Claude Choe
출처 : 화실Emotion
글쓴이 : 은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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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어린이출판협의회
글쓴이 : 길벗스쿨(진창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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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고종황제




고종황제




고종황제




고종황제




고종황제




고종과 순종.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가 입었던 붉은색 곤룡포 차림으로 1890년무렵의 모습이다. 아직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뀌기 전이라, 고종이 황제가 아니기 때문에 황룡포가 아닌 홍룡포 차림이다




고종황제와 신하들의 모습.




1910년 한일병탄 직후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자리를 함께 한 조선총독부 고위관리들과 대한제국 황족들. 앞줄 가운데 모자를 벗은 사람이 고종 황제이고, 그 오른쪽이 순종, 고종의 왼쪽은 영친왕이고, 그 옆은 데라우치 초대 조선총독.





고종이 대한제국 초기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국한문친서. 고종은 1909년 초 국외망명을 시도할 정도로 일제의 한국침략에 강경하게 맞선 군주였다.




일본 관리들이 쓰는 모자와 의상을 입고 궁궐을 나선 고종. 왕의 행차때 사용하는 일산을 받쳐들고 있지만 어가를 매고 있는 사람들은 일본인들이다. 1919년 촬영.



1919년 집무를 보기 위해 겨울옷을 입고 선원정에서 인정전으로 나서고 있는 고종황제의 모습




러시아 공사관 내 고종 황제 거실. 황제용 더블 베드-황태자용 싱글 베드-응접 세트가 전부였고, 옆 방에서 상궁 둘이 번갈아 기거하며 수발을 들었다.




고종이 파천해 집정할 당시의 러시아 공사관.




고종황제의 후궁 양씨(1882년생, 덕혜옹주의 생모).




엄황귀비. 명성황후의 상궁으로 있다가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고종황제를 모셨고, 이어 왕자 은(영친왕)을 낳았다. 1906년에 진명여학교를 설립, 한국 근대교육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권오창화백이 그린 명성황후 진영.




1903년 11월 29일자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지에 보도된 고종황제와 미국인 에밀리 브라운양 결혼 기사. [유일한 미국인 황후 어떻게 대관했는가]라는 제목으로 브라운양의 클로즈업된 모습과, 고종과 브라운 양이 일산(日傘)으로 가린 연(輦.임금의 수레)을 타고 궁을 나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대한문 앞을 지나고 있는 고종황제의 국상행렬.




고종황제 국장때 바닥에 엎드려 통곡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고종황제 국상 전날의 대한문 앞 모습.




1921년 고종황제 제사때의 모습. 중앙이 순종황제이다.
 
 
 
        

출처 : 오경의 인연 만들기
글쓴이 : 오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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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오경의 인연 만들기
글쓴이 : 오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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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자료는 69년도 아이들의 생활상을 담은 사진들입니다.

당시는 가난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힘겹게 살아오신 이분들은,

현재 50을 전 후 한 연세들이 되셨을겁니다..

고무신에 양말도 신지않고 지게로 나무를 지고 있는 모습이 가슴 찡합니다

바람이 불면 힘에 부처서 지게와 함께 넘어지고 굴러서 다치기도하고....

지게가 조그마한것이 앙증맞네요

 갯벌에 앉아서 무엇인가 캐고있는 모습입니다

 지금도 이 학교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공부도 하고 소도 키우는 모습이 아련한 옛추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겨울철 따사로운 양지쪽에 앉아서 책들을 많이 읽곤했지요

 학교 다녀오면 부모님 일을 돕는게 당연 지사로 알고 살았습니다

돼지에게 죽을 먹이고있네요.

동생은 아버지 장화 신고 너무커서 질질 끌고 다녔지요 ㅎㅎㅎ

 등교길 모습입니다,판자집/토담집에 초가지붕 ....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한 걸음에 운동장으로 달음박질.....

 당시 잡지에 실렸던 삼남매 연탄배달 기사입니다

 무척이나 가슴아픈 기사였습니다 만, 당시는 다들 이렇게 어렵게 살던

시절었답니다.동생은 연탄 내리고 누나는 나르는 모습이네요

 순창의 초등학교 모습입니다(사진에 소개 글)

 책 보자기= 모든 학생들이 책 보자기에 책과 도시락을 둘둘 말아서 허리나

어깨에 매고 학교를 다녔으며 책가방들고 다니는 학생들은 보기힘들었지요

도시락에 김치국 물이흘러서 책장이 빨갛게 물들곤 했답니다

 햑교다녀 오면 부모님 일부터 거들고 주로 밤에 호롱불 밑에서 웅크리고

앉아 꾸벅 꾸벅 졸면서 숙제를 하였지요,

숙제하다 그냥 책상에 엎드려 잠이들고.....

 학교 다녀오면 들로 산으로 소먹이로 다니곤했지요

돌아올땐 소먹이풀을 지게에 가득지고 한 손엔 소 고삐를잡고..

 등교길 징검다리를 건너는 모습입니다

친구들 집 앞을 지나칠때면 지나는 아이마다 "* *야 학교가자! 라고

크게 소리처 부르곤 했지요

 하나같이 빡빡머리에 이발비도 아끼고 머리에 이 생기는것도 방지하고..

나무 책상에는 가운데 줄을 그어놓고 사물이 서로 못넘어오게

다투기도 했지요

 선생님과 찍은 추억의 모습들입니다 

 길 거리에서 순경 아저씨로 부터 교통지도를 받는 모습입니다

 아! 저기 여고생의 모습입니다

아스라히 멀어저간 추억속의 교복....

 피로회 복제를 팔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체국 홍보 사진과 지금은 볼 수 없는 삼륜 자동차입니다

 나무 따게(삽)라고 생각이됩니다, 이름이 생각안납니다

삽질하는 여학생입니다

 학교 다녀오면 연탄불도 갈고......

 용돈을 벌려고 껌이나 피로 회복제를 팔러 다니기도 했지요

 요즘은 학교 다녀오면 학원이다 머다해서 가사일을 하는 학생들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예전엔 공부 보다도 부모님을 도와 일하는게

우선이었답니다, 문론 일 때문에 결석도 잦았지요

 빙상대회 사진입니다

 강원도 속초 모 초등학교에 장애를 가진 친구를 매일같이 학교까지 대려다

주며 돌봐주는 모습입니다(자전거를 개조한 휠체어)

 때로는 업고 마실을 다니기도하고....

 누이 동생이 오빠를 업고...

요즘 보기드문 장면에 눈시울이 뜨거워 집니다

 학교 다녀와서 거름치기도 하고...

 새끼도 꼬고....

 읍내까지 하교 다니는 아이들은 학교 마치고 시장에 들러 장보기도 했지요

 학교 다녀와서 물지게도 지고....

 목욕을 즐기고 있는 모습입니다

멀리 물놀이하는 아이와 달려가는 아이하며 무척이나 정겹습니다

요즘처럼 계절별로 옷이없고 보통 겨울 옷과 여름 옷 두 종류여서인지

날씨는 여름인데 두 아이는 아직 겨울 옷같네요

 우리 어머님들의 모습입니다

수십리 길을 걸어서 장보러 다니곤했지요

당신께선 굶주린배를 끈으로 한번더 꼬옥 조여 매시고 끼니도 굶고

수십리 먼길을 다녀 오시곤 했습니다

 흔히 볼 수있었던 개천가의 움막들입니다

 교실이 부족하여 노천에서 공부하는것은 예사였지요

 이곳에도.......

 이밝은 표정들이 조국 근대화에 견인차 역활을 했나봅니다

 대도시의 어느 초등학교 졸업식 모습입니다

시골과는 많은 차이가 나지요 

 짚으로 지붕을 덮기위해 용마름을 짜는 모습입니다

 가난하고 힘들어도 표정 많큼은 너무도 천진 난만하고 순수해 보입니다

 운동회 모습입니다

 수업 시간에 어린 동생을 학교에 대리고 나와서 공부 하는 모습입니다

부무님이 들에 가시면 어린 동생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도시의 어느동네 한 모퉁이같습니다

 가난했던 시절 허리가 휘어지고 뼈골이 부서지도록 자식들위해 고생하신

우리 모두의 어머님이 십니다.

출처 : 오경의 인연 만들기
글쓴이 : 오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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