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 9. 27. 전주. 학살된 시신의 사진만 남아 있고 가해자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구천을 헤매는 그들의 원혼에 묵념을 드린다.
▲ 1950. 9. 27. 전주. 우리 아버지는 어디에 계실까?
▲ 1950. 9. 29. 충주. 마을 주민들이 학살의 현장을 파서 시신을 확인하고 있다
▲ 1950. 9. 30. 진주. 한 소년이 씨레이션 상자를 조심스럽게 들여다 보고 있다
▲ 1950. 10. 10. 함흥 부근의 한 동굴에서 300여 명의 시신을 꺼내고 있다
▲ 1950. 10. 10. 함흥. 가족을 찾아 헤매면서 울부짖는 아낙네들
▲ 1950. 10. 13. 함흥. 우물에서 학살된 시신을 건져 올리고 있다.
▲ 1950. 10. 19. 함흥. 시신더미에서 가족을 찾고 있다.
▲ 1950. 10. 19. 함흥. 지아비의 주검 앞에서 오열하는 지어미.
▲ 1950. 10. 19. 함흥. 학살에는 남녀가 없었다

 


▲ 1949. 3. 제5차 소련 최고회의에 참석한 김일성(오른쪽 끝)과 박헌영(김일성 바로옆 안경쓴 사람)

▲ 1945. 8. 평양 붉은 광장에서 젊은이들이 스탈린과 김일성을 환호하고 있다.

▲ 1949. 9. 6. 미군사고문단이 국방경비대에서 기관총 훈련을 지도하고 있다.

▲ 1950. 7. 7.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파병안을 통과시키고 있다.

▲ 1950. 8. 미군 포로들이 서울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 1950. 8. 원산, 북한군 선전 벽보.

▲ 1950. 9. 16. 인천상륙 적전 후 텅빈 시가지에서 한 소녀가 울고 있다.

▲ 1950. 11. 21. 압록강변의 혜산진까지 올라간 국군과 유엔군.

▲ 1950. 12. 3. 평양, 부서진 대동강 철교를 넘어 남하하는 피난민 행렬.

▲ 1950. 12. 9. 중공군의 참전으로 혹한 속에 후퇴하는 유엔군.

 


▲ 1950. 9. 30. 전화(戰禍)로 폐허 가 된 대전역

▲ 1950. 11. 24. 불타버린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

▲ 1950. 10. 7. 불타고 있는 김포 비행장

▲ 1950. 10. 18. 전화에 그을린 중앙청

▲ 1950. 10. 18.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멀리 북악산과 중앙청 돔이 보인다.

▲ 1950. 9. 20. 왜관, 낙동강 철교 복구 공사

▲ 1950. 10. 12. 미조리호 군함에서 청진항을 향해 함포사격을 가하고 있다

▲ 1950. 10. 20. 400여 명의 낙하산부대가 평양부근에 투하되고 있다

▲ 1950. 12. 18. 북한군에게 뿌린 귀순 권유 전단

▲ 1950. 11. 2. 적십자사에서 피난민에게 구호물자를 나눠주고 있다

 

 

 


▲ 1950. 10. 13. 경기도 파주, 참혹하게 학살된 시신들


▲ 1950. 11. 1. 서울 중앙청 앞 지금의 문화관광부 자리, 주민들이 폐허더미에서 땔감이나 돈이 될만한 물건을 찾고 있다.


▲ 1950. 11. 2. 원산의 한 성당, 폐허가 된 성당 내부를 신도들이 청소하고 있다


▲ 1950. 11. 6. 북한의 어느 농촌, 탈곡한 볏단을 달구지에 싣고 있다

▲ 1950. 11. 6. 북한의 어느 농촌, 전란 중에도 추수를 하고 있다. 바람개비로 알곡을 가리는 농부들


▲ 1950. 11. 19. 북한의 한 지하 무기 공장 내부


▲ 1950. 11. 20. 국경지대, 미군들이 소달구지로 보급품을 운반하고 있다.


▲ 1950. 11. 18.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흥남비료공장


▲ 1950. 11. 18.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흥남송전소


▲ 1950. 11. 23. 함경도 갑산, 미군 폭격으로 성한 집이 드물다


▲ 1950. 11. 1. 황해도 평산에 진격하는 유엔군을 두 여인이 전신주 뒤로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 1950. 12. 4. 평양을 떠나 대동강을 건너 후퇴하는 국군


▲ 1950. 12. 6. 황해도 사리원, 남행하는 피난열차에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있다.


▲ 1950. 12. 8. 경기도 금촌, 38선을 넘어 후퇴하는 유엔군 차량들.


▲ 1950. 12. 9. 끊어진 한강철교.


▲ 1950. 12. 10. 포화에 불타는 마을.


▲ 1950. 12. 12. 한강 부교를 통하여 후퇴하는 차량들.


▲ 1950. 12. 12. 피난민들이 한강을 나룻배로 건너고 있다 .


▲ 1950. 12. 12. 유엔군들이 인천항을 통해 장비들을 후송시키고 있다.


▲ 1950. 12. 12. 유엔군들이 후퇴하면서 다리를 폭파시키고자 폭약을 장치하고 있다.


▲ 1950. 12. 3. 평양, 남행 피난민 행렬 속의 한 소녀.

▲ 1950. 12. 10. 중공군의 참전으로 강추위 속에 후퇴 행렬. 한 병사가 너무 추운 날씨로 모포를 뒤집어쓰고 있다.

▲ 1950. 12. 12. 흥남부두, LST 함정에 가득 탄 군인과 피난민들. 미처 함정에 오르지 못한 피난민들이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원자탄이 투하된다는 말에 피난 행렬에 나섰다고 한다. 몇 날의 피난 길이 50년이 더 지났다.

▲ 1950. 12. 14. 서울역, 남행 피난민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 1950. 12. 16. 흥남, 국군과 유엔군들이 후퇴하고자 부두에서 수송선을 기다리고 있다.

▲ 1950. 12. 27. 흥남, 얕은 수심으로 수송선이 해안에 닿을 수 없자 유엔군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LST로 가고 있다.

▲ 1950. 12. 24. 흥남, 유엔군들이 철수 후 부두를 폭파시키고 있다.

▲ 1950. 12. 19. 묵호, 흥남에서 철수한 장비를 묵호(동해)항에 내리고 있다.

▲ 1950. 12. 28. 서울, 피난민들이 강추위 속에 한강 얼음을 깨트리며 나룻배로 남하하고 있다.

▲ 1951. 1. 5. 피난 행렬 속의 소년과 소녀. 소달구지가 힘겨워하자 힘을 보태고 있다.

 


▲ 1950. 8. 20. 경북 어느 지역, 아이를 업고 머리에는 가재도구를 이고 있는 여인은 내 고모 아니면 이모일지도. "같이 갑세" "퍼뜩 안 오고 머하노. 쌕쌕이가 벼락친데이. 싸게싸게 따라 오이라."

▲ 1950. 8. 23. 경남 함안, 기차를 타기 위해 늘어선 피난민들. 할아버지 등에는 온갖 가재도구가 짊어져 있고, 오른 손아귀에는 손자가 잡혀 있다.

▲ 1950. 8. 23. 경남 함안, 기차표를 사고자 늘어선 피난민들로 남녀노소없이 피난 봇짐을 이고 지고 있다.

▲ 1950. 8. 23. 경남 함안, 언제 올지 모르는 기차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 1950. 8. 24. 경북 낙동강 유역, 꼭 필자의 고향(구미) 마을 같다. 온갖 가재도구를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진 피난민 행렬.

▲ 1950. 8. 24. 경북 낙동강 유역, 뙤약볕 속의 피난 길. 어데로 가야 목숨을 부지할지.

▲ 1950. 8. 24. 경북 왜관 부근. "피난 간 새 지발 집이나 무사해야 할 건데..." 뒤돌아 보고 또 돌아보고...

▲ 1950. 8. 24. 경북 낙동강 유역, "할배, 어데 갑니까?" "나 집에 간다." "못 갑니다." "와! 나 죽어도 내 집에서 죽을란다. 어이 비켜라."

▲ 1950. 8. 25. 장소 미상, 기총소사에 쓰러진 피난민들. "이렇게 객사할 바에야 차라리 집에서 죽을 걸."

▲ 1950. 9. 6. 경북 칠곡 다부동, 가도 가도 끝없는 피난 행렬. 위정자를 잘못 만난 불쌍한 무지렁이 핫바지 백성들이여!



▲ 1950. 10. 11. 서울 교외, 부서진 북한군 전차 위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 1950. 11. 1. 전란으로 폐허가 된 서울


 

▲ 1950. 12. 28. 끊어진 한강 철교, 오른쪽은 임시로 만든 부교.


 

▲ 1951. 1. 3. 한강 철교 부근의 언 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


 

▲ 1951. 3. 16. 서울 중구의 수도극장(현 스카라 극장) 일대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광화문 세종로 일대.


 

▲ 1951. 3. 16.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왕십리 일대, 멀리 고려대학교 건물이 보인다.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서울역 일대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경복궁, 수송동, 팔판동 일대.

 

▲ 1951. 3. 19. 구호 양곡을 먼저 탄 소년과 양곡을 타기 위해 줄을 선 주민들.

▲ 1950. 10. 12. 원산. 학살된 시신들.


▲ 1950. 12. 11. 고단한 피난길.


▲ 1950. 12. 16. 폭격에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교.


▲ 1950. 12. 17. 보급품을 실은 화물 열차가 폭격에 불타고 있다.


▲ 1950. 12. 18. 대구. 훈련소에서 교육을 마친 신병들이 전선으로 가고자 대구역전 광장에 집결해 있다.


▲ 1950. 12. 18. 전방으로 떠나는 신병들.


▲ 1950. 12. 18. 대구역. "총알을 요리조리 잘 피해서 어예든동 살아오이라." '어무이 걱정 꽉 붙들어 매이소. 어무이 아들 아잉기요. 내는 꼭 살아돌아올 깁니다."


▲ 1950. 12. 21. 경북 왜관. 낙동강 철교 어귀에 부서진 북한군 소련제 탱크.


▲ 1951. 1. 20. 아버지와 아들의 피난길, 다른 가족은 전란에 모두 죽었다.

 


▲ 1950. 6. 18. 6.25 한국전쟁 발발 일주일 전 의정부 북방 38 접경에서 미 국무장관 덜레스(가운데) 일행이 38선 너머 북쪽을 살피고 있다(덜레스 오른쪽 신성모 국방장관).
▲ 1950. 6. 18. 미 국무장관 덜레스 일행이 38 접경 지대를 살피고 있다.
▲ 1950. 7. 한미 수뇌부들이 환담하고 있다(왼쪽부터 조병옥 내무장관, 신성모 국방장관, 무초 주한 미대사, 임병직 외무장관, 워커 주한 미군 사령관).
▲ 1950. 7. 26. 맥아더 장군이 전선을 시찰하는 중, 종군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오른쪽 워커 장군.
▲ 1950. 8. 15.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낸 후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신 국방장관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라고 상대의 전력도 모른 채 큰 소리쳤으나 6.25 발발 후 서울시민은 팽개치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갔다.
▲ 1950. 8. 18. 백선엽 장군(가운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세우고 있다.
▲ 1950. 9. 16. 구포 신병 훈련소에서 훈시하는 이승만 대통령.
▲ 1951. 2. 7.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장군.
▲ 1951. 2. 15. 대한민국 해상 이동방송선(HLKT)을 방문한 장면 총리 일행.
▲ 1951. 9. 콜트 미 8군 부사령관의 이임식장(왼쪽부터 허정, 콜트. 무초 주한 미대사).
▲ 1950. 8. 25. 부산 근교의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이 심문을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 1950. 8. 28. 유엔군에게 잡힌 북한측 포로.


▲ 1950. 10. 영동, 생포한 북한 측 유격대원들

▲ 1950. 11. 15. 영흥, 유엔군들이 생포한 유격대원들

▲ 1951. 1. 16, 부산, 북한 측 여자포로들.

▲ 1951. 2. 26. 포로들이 임시 수용소로 실려와서 내리고 있다.

▲ 1951. 2. 26. 부산, 근교의 임시 포로수용소 전경.

▲ 1950. 3. 9. 유엔군들이 포로들에게 DDT를 살포하고 있다.
▲ 1950. 3. 7. 미군이 중공군 포로의 소지품을 검사하고 있다.

▲ 1951. 5. 10. 미군들이 중공군 포로들에게 DDT를 살포하고 있다.


▲ 1951. 5. 7. 거제포로수용소 전경.

▲ 1951. 5. 29. 화천, 중공군 포로들.

▲ 1951. 5. 29. 13세인 중공군 소년병.

▲ 1951. 6. 26.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이 예배를 보고 있다.

▲ 1953. 7. 27. 유엔군 측에서 송환되는 포로들에게 알리는 지시문.

▲ 1953. 10. 11. 북한측 포로가 자기 의사를 분명히 밝히면서 북으로 돌아가고 있다.

▲ 1954. 2. 16. 귀환을 거부하는 북한 측 포로를 북측 대표들이 설득하고 있다.

 

출처 : 용촉고을
글쓴이 : 가을하늘 원글보기
메모 :

 

사진으로 보는 한국전 30편


여기 실린 사진은 미국 메릴랜드 주에 있는 NARA(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5층 사진자료실에 보관된 'KOREA WAR(한국전쟁)' 파일의 사진들입니다. 날짜와 장소는 사진 뒷면에 있는 영어원문을 따랐음. 이 사진이 기록물이 부족한 우리나라에 자료로 남기를 바랍니다. 생사가 교차되는 전선에서 귀한 사진을 남긴 카메라맨들에게 경의를 드립니다.
시리즈로 #1 에서 #30까지 연재로 작성한 것을 한 화면에 올렸습니다.  특히 6.25를 겪은 6학년세대들에게는 직접 피부에 와 닿는 생생함 그대로 입니다. 이 자료는 "Oh My News" 에 박도(Park Do)기자가 올린 글 소개입니다.(註:再具成)



▲ 1950. 10. 22. 평양, 북한 주민의 학살 현장. 누가 그들을 죽였을까?

▲ 1950. 11. 2.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고 있다. 눈망울이 초롱한 아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 1950. 11. 11. 바지 저고리들의 포로들. 총이나 한 번 제대로 잡아보고 포로가 되었는지?

▲ 1950. 8. 12. 북한군 포로.

▲ 1950. 8. 10. 폭격으로 불타는 마을

▲ 1950. 8. 10. 핫바지들을 인솔하는 미 해병대.

▲ 1950. 7. 29. 경북 영덕, 포화에 쫓기는 피난민.

▲ 1950. 7. 29. 경북 영덕,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지향없이 떠나는 피난민 행렬.


▲ 1950. 7. 29. 경북 영덕, 논두렁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북한군 병사


▲ 1950. 7. 29. "뜨거운 전우애" 한 병사가 부상당한 전우를 업어가고 있다


▲ 1950. 7. 29. 마을 소년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군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 1950. 7. 29. 야간 전투 후 주간 취침.

▲ 1950. 7. 29. 취침 후 병기 손질

▲ 1950. 8. 4. 피난민들의 보금자리 산동네 판자촌

▲ 1950. 8. 8. 누가 이 아이를 버리게 했을까?

▲ 1950. 8. 8. 다리 아래 피난민 움막

▲ 1950. 8. 9. 임시 포로수용소

▲ 1950. 8. 2. 금강철교

▲ 1950. 8. 3. 뙤약볕 속에 전선으로 가는 국군 행렬

▲ 1950. 8. 3. 한국전쟁 무렵의 부산항, 멀리 영도가 환히 보인다.

▲ 1950. 7. 29. 경남 진주 부근에서 생포한 빨치산(?). 원문은 포로로 되어 있다.

▲ 1950. 12. 16. 흥남부두. 후퇴하려고 수송선을 기다리는 병사들

▲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텅 빈 흥남부두

▲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불타는 흥남항


▲ 1950. 12. 27. 인천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한 피난민들

▲ 1950. 1. 3. 1·4 후퇴를 앞두고 불타고 있는 서울 시가지

▲ 1951. 1. 5. 1.4 후퇴 피난 행열
▲ 1951. 1. 5.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
▲ 1951. 1.4. 한강나루터에서 건너야 할 강을 바라보는 피난민 아이들
▲ 1951. 1. 4. 한강 임시 부교
▲ 1950. 12. 29. 양평 , 생포된 포로들
▲ 1950. 11. 29. 최전방의 간호사들
▲ 1951. 1. 6. 수원역에서 남행열차를 기다리는 피난민들
▲ 1951. 1. 5. 한미 합작의 한국군 병사 장비. 신발, 겉옷 , 모자 : 한국제. 코트, 소총, 탄환 : 미제
▲ 1951. 1. 5.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미군 부대에 몰려온 한국의 노무자들
▲ 1951. 1. 4. 무개화차에 몰린 피난민들

▲ 1951. 1. 16.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M1 소총 사격 교육을 받고 있다.

▲ 1951. 1. 4.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PRI(사격술 예비훈련)을 받고 있다.

▲ 1950. 11. 5. 국군과 유엔군이 수복한 북한의 어느 지역(평산)에서 주민들이 지역 대표와 치안대장을 뽑고 있다. 그들 대표는 무슨 색깔의 완장을 찼을까?

▲ 1951. 1. 5. 서울. 꽁꽁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조심조심 건너 남하하고 있다.

▲ 1950. 9. 22. 전쟁에는 2등이 없다. 포로가 되는 순간부터 치욕이다. 미군들이 생포된 포로의 온 몸을 수색하고 있다.

▲ 1950. 9. 20. 미군이 인민군 포로들을 발가벗긴 채 수색하고 있다.

▲ 1950. 9. 17. 인천.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후 함포사격 포화에 무너지고 그을린 인천시가지

▲ 1950. 9. 18. 인천에 상륙하기 위해 전함에서 병사들이 하선하고 있다.

▲ 1951. 5. 28. 38선 부근 6마일 남쪽 마을에서 탱크의 포화소리에 귀를 막는 소년들. 이들의 누더기 바지 차림이 그 무렵 소년들의 대표적 옷차림이다.
 


▲ 1950. 8. 18. 애송이 북한군 소년 포로를 미군 포로심문관이 취조하고 있다. 곁에는 통역 겸 여비서라고 표기돼 있다. 엄마 젖 떨어진 지 얼마나 되었을까?

▲ 1950. 8. 18.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신상명세서를 만들고 있다

▲ 1950. 8. 18. 포로수용소 전경

▲ 1950. 8. 18. 포로수용소 천막 안에서 밥을 먹고 있다

▲ 1950. 8. 18. 포로들이 줄을 서서 밥을 타고 있다

▲ 1950. 8. 11. 그해 여름 피난민들의 움막. 필자도 이런 곳에서 지냈던 기억이 난다.

▲ 1950. 8. 13. 잠깐의 휴식시간에 LMG(기관총) 병기 손질을 하고 있다


▲ 1950. 8. 15. 피난민 행렬

▲ 1950. 8. 15. 창녕 남지철교. 국군의 최후 방어선으로 핏빛으로 강물이 물들 만큼 피아 엄청난 희생을 치렀던 격전의 현장이었다.

 

▲ 1950. 8. 24. 모정 무한, 젖을 먹이는 어머니
▲ 1950. 8. 23. 머리에 이고 등에 업고 앞에 붙들고... 고단한 피난 행렬.
▲ 1950. 8. 18. 낙동강 전선에서 쌕쌕들이 폭격을 가하고 있다.
▲ 1950. 8. 25. 폭격에 불타고 기총소사에 죽어가다
▲ 1950. 8. 15. 마산 부근, 피난민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
▲ 1950. 8. 15. 전란으로 폐허가 된 마을
▲ 1950. 8. 22. 불을 뿜는 전함
▲ 쌕쌕이의 융단 폭격으로 초토가 된 경북 왜관
▲ 1951. 1. 2. 누가 이 여인을 모르시나요?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 1950. 8. 포항 부근의 한 마을이 포화에 불타고 있다


▲ 1950. 9. 16. 인천시가지에서 생포한 북한군들

▲ 1950. 9. 16. 월미도에 나뒹구는 북한군 시신들

▲ 1950. 9. 15. 인천에서 생포한 포로들

▲ 1950. 9. 17. 서울 진격 작전

▲ 1950. 9. 23. 서울 탈환을 눈앞에 둔 노량진에서 바라본 끊어진 한강 철교

▲ 1950. 9. 25. 한강 도하 작전

▲ 1950. 9. 29. 미군 전차가 서울 시내 중심가로 들어오고 있다.
▲ 1950. 9. 27. 경인가도에서 국군 수복을 환영하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북한군이 내려왔을 때는 또 다른 깃발을 흔들어야 했던 불쌍한 백성들
▲ 1950. 10. 1. 서울 시청 일대
▲ 1950. 10. 1. 소공동 일대
▲ 1950. 10. 1. 남대문에서 바라본 서울역
▲ 1950. 10. 1.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에서 바라본 서울 시가지, 멀리 중앙청이 보인다.
▲ 1950. 10. 1. 반도호텔에서 바라본 을지로
▲ 1950. 9. 30. 서울의 아침, 폐허가 된 시가지에 사람들이 부산하게 오가고 있다
▲ 1950. 9. 29. 서울 탈환 환영대회 직전의 중앙청 홀,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맥아더 장군
▲ 1950. 9. 29. 유엔 깃발로 펄럭이는 중앙청 광장, 서울 탈환 환영대회가 끝난 직후 바로 옆 건물이 불타고 있다


▲ 1945. 9. 9. 미군이 서울에 입성하고 있다

▲ 1945. 9. 9. 미군들이 서울시민들의 환영 인파에 싸여 있다

▲ 1946. 1. 16.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 대표가 기조 연설을 하고 있다

▲ 1947. 5. 25. 개성 인근의 38선 미군 초소, 그때만 해도 요란한 철조망은 없었다


▲ 1948. 5. 10.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5. 10 총선거에 유권자들이 투표하고 있다

▲ 1948. 5. 10. 선거 방해 사범으로 체포된 5인, 맨 왼쪽 여인은 장택상을 암살하려다가 체포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 1948. 5. 31. 국회 개원식 날 국회 의사당 앞에서 서북청년단들이 소련 철수를 주장하는 데모를 하고 있다

 

휴전회담

 

▲ 1951. 7. 8. 개성, 임시 정전회담 장소였던 한 한옥. 이 장소는 그해 10월 24일까지 사용되다가 유엔군 측 요구로 10월 26일부터 판문점으로 옮겨졌다.

▲ 1951. 7. 8. 개성, 정전회담으로 가는 북한 측 대표와 통역관 리차드 언더우드(Richard Underwood).

▲ 1951. 7. 8. 개성, 헬기에서 내린 유엔군 측 정전회담 실무자를 맞이하는 북측 실무자들.

▲ 1951. 7. 8. 정전회담을 위한 유엔군 측과 북측의 첫 만남.

▲ 1951. 7. 10. 개성 정전회담을 마치고 나오는 유엔군 측 대표.

▲ 1951. 7. 15. 개성, 정전회담에 열띤 취재를 벌이는 기자단.

▲ 1951. 7. 18. 북측이 제공한 유엔군 측 대표 휴게소.

▲ 정전회담장에 나타난 북측 대표. 왼쪽 두 사람 중공군 대표, 가운데 남일 대장, 다음 이상조 소장.

▲ 1951. 7. 27. 문산, 정전회담 유엔군 측 한국인 옵서버들(왼쪽부터 변영태, 손원일, 김정렬, 유재홍, 백선엽)


▲ 1951. 7. 11. 서울, 서울시민들이 덕수궁에서 정전회담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 1951. 7. 18. 개성, 정전회담장 밖에서 유엔군 측 기자와 중공군 통역관이 담소하고 있다.

▲ 1952. 12. 4.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가 취임에 앞서 한국전선을 시찰하고 있다. 뒤에 탄 사람이 클라크 주한 유엔사령관.

▲ 1953. 4. 11. 판문점 정전회담 연락장교회의에서 부상병 포로 교환 합의서에 양측이 서명하고 있다.

▲ 1953. 5. 8. 정전회담 북한 측 남일 대표가 회담장을 떠나고 있다.

▲ 1953. 6. 11. 부산, 학생들이 정전회담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 1953. 7. 26.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정전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 1953. 7. 28. 개성, 중공군 총사령관이 정전 협정 조인에 서명하고 있다.

▲ 1953. 7. 29. 미 해병대 병사들이 정전협정 소식에 환호하고 있다.
▲ 1951. 11. 27. 판문점 정전회담장에서 북한 측 장춘산 대표와 유엔군 측 머레이 대표가 지도를 펴고 휴전선 획정을 협의하고 있다.

 


 

 

출처 : 용촉고을
글쓴이 : 가을하늘 원글보기
메모 :

 

어느 날 문득 발견한 행복.

 

2.jpg


오래 전 코니 아일랜드의 바닷가,

산책로에서 만난 사람에게,

가장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13.jpg


 

12월이었습니다.

동절기에 노숙자들이 겪는,

고난에 대한 글을 쓰던 참이었습니다.



5.jpg


 

해변가의 산책로에 그와 나란히 앉았지요.

다리를 바닷가 쪽으로 내밀고 말입니다.



10.jpg


 

그는 계절에 따라 어떻게 사는 지 말했습니다.



11.jpg


 

여름이 지나고 바닷가에 인적이 끊기면,

큰 길에 나가 구걸을 하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교회에서 잔다더군요.



23.jpg


 

경찰과 비바람을 피해가며 그렇게 산다고요.



14.jpg


 

하지만 대개는 산책로에 나와,

지금처럼 이렇게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고 했습니다.



15.jpg


 

왜 그러느냐고 물어 보았지요.

왜 노숙자 쉼터로 가지 않았느냐고.

병원에 가면 검사를 받을 수 있을텐데 왜 안 갔느냐고.



16.jpg

 

그러자 그는 바다를 응시하며 말했습니다.

“저 풍경을 봐요, 아가씨. 저 풍경을 보라구요.”




21.jpg


 

22.jpg


 

33.jpg


 

27.jpg


 

28.jpg



30.jpg


 

31.jpg


32.jpg







-애너 퀸들런의 <어느 날 문득 발견한 행복> 中에서-





♬♪ Sidewalk Cafe...Blonker

 

출처 : 좋은글과 좋은음악이 있는곳
글쓴이 : 청파 원글보기
메모 :

한 시대를 풍미했던 조선 주먹의 황제 김두한

 

 

 

김두한의 가족들(가운데 따님 김을동)

김두한의 결혼식 사진

우리들의 영원한 큰 형님 김두한

 민중들 앞에서 연설하는 김두한

 

혁명자 박정희 소장과 함께

 그 당시 우미관 식구들

 한때나마 김두한으로 불리었던 세 사람

졸린 눈에 팔자걸음? 이 사람이 바로 전설의 싸움꾼 시라소니

 

 

 

이 사람이 바로 정치 깡패 이정재 (박정희의 혁명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짐)


雜詩 (歲月不待人)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人生無根체(인생무근체)
인생은 뿌리도 꼭지도 없으니 
飄如陌上塵(표여맥상진)
들길에 날리는 먼지와 같은 거라. 
分散逐風轉(분산축풍전)
흩어져 바람 따라 굴러다니니 
此已非常身(차이비상신)
이것이 이미 불변의 몸뚱아리 아닌지. 
落地爲兄弟(낙지위형제)
태어나면 모두 형제가 되는 것 
何必骨肉親(하필골육친)
어찌 한 핏줄 사이라야 하랴. 
得歡當作樂(득환당작악)
즐거울 땐 응당 풍류 즐겨야 하니 
斗酒聚比隣(두주취비린)
한말 술로 이웃과 어울려 본다네. 
盛年不重來(성년불중래)
한창 나이 다시 오는 거 아니고 
一日難再晨(일일난재신)
하루에 두 새벽이 있기는 어려워. 
及時當勉勵(급시당면려)
늦기전에 면려해야 마땅한거야 
歲月不待人(세월불대인)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으니. 
글/ 도연명(陶淵明) 
그림/ 운보(김기창)화백님의 청산도 중에서
출처 : 그리움은 강물되어
글쓴이 : 오경 원글보기
메모 :
수원 장안문(長安門) 수원 화성(華城)의 북문으로 정조 때 건축되었다. 서울의 남대문과 비슷한 형태지만 규모가 더 크고 바깥에 옹성을 갖추었다. 무지개문 위에 2층 누각을 올리고 양쪽 계단으로 오르게 했다.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안에 있는 조선 후기의 2층 건물. 인조 때 남한산성을 축조하면서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았다. 아래가 넓은 데 비해 2층은 좁은 형태이다. 정면에 ‘수어장대’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수원 화서문(華西門) 수원 화성의 서문으로 보물 제403호. 단층 누각에 옹성을 쌓았다. 멀리 장안문이 보인다. 화성은 남문인 팔달문과 북문인 장안문이 통행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화서문은 비교적 한적한 편이었다.

수원 화홍문(華虹門) 수원 화성의 북쪽 수문으로 북수문(北水門)이라고도 불렀다. 7개의 석조 무지개로 수문을 만들고 수문 돌다리 위에 다시 처마 곡선이 유연한 문을 만들었다. 왼편 뒤쪽으로 장안문이 보인다. 주변의 자연풍광이 아름답다.

수원 전경 멀리 화성이 보이는 수원의 모습. 동생을 업은 아이 앞으로 물이 마른 내와 다리가 보인다. 기와집과 초가집이 뒤섞여 있다.

수원 화홍문과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왼쪽이 화홍문이고 오른쪽 바위 위에 세워진 정자가 방화수류정이다. 이 정자에 오르면 주변을 두루 살피고 경치를 즐길 수 있었다. 소를 매어두고 한가롭게 쉬는 농부와 주변 경관이 썩 잘 어울린다.

건릉(健陵) 경기도 화성군 안녕리에 있는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孝懿王后 金氏)의 합장릉. 홍살문 뒤에 제례를 치르는 정자각(丁字閣)이 있다. 정조가 승하한 직후에는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 묘인 현륭원(顯隆園 ; 현재의 융릉) 동쪽에 능을 만들었지만 훗날 왕후와 합장하며 서쪽으로 옮겨 건릉이 되었다.

화성장대(華城將臺) 성벽 정상에 있어 안팎을 두루 살피며 군사를 지휘하던 2층 문루다. 정조가 쓴 ‘화성장대’ 현판이 걸려 있었다. 화성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어 서장대(西將臺)라고도 불렀다.

화녕전(華寧殿) 정조의 어진(御眞)을 보관하는 전각. 부왕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를 지극한 효성으로 받든 것을 본받고 기리기 위해 순조가 세웠다.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蒼龍門) 옆에 있는 돈대(墩臺)다. 공심돈이란 속이 빈 돈대라는 뜻. 내부는 3층으로 되어 있는데 둥근 벽을 따라 계단이 놓여 있어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 화성에는 모두 세 곳에 공심돈이 설치되어 있었다.

수원의 서호(西湖) 화성의 서쪽에는 농업용 관개시설로 만든 인공호수 축만제(祝萬堤)가 있다. 서호라고도 하며 정조 때 축조됐다. 항미정(杭尾亭)이라는 정자가 이곳의 경관과 풍치를 돋보이게 했는데, 사진은 항미정에서 바라본 서호 풍경이다.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 1906년 일제 통감부가 일본 농법의 한국 이식을 목적으로 수원에 세운 기관이 권업모범장이다. 한국 농업의 시험·조사보다는 일본 농법의 지도·권장에 치중했다.

방화수류정과 용연(龍淵) 방화수류정은 용두암(龍頭岩) 위에 세워졌으며 아래에 있는 연못은 용연이라 불렀다. 용연 주위에는 버드나무를 심어 수원 성곽 주변에서 가장 경관이 좋았다. 못가에는 돌로 만든 용두가 자리잡고 있었다.

용주사(龍珠寺) 경기도 화성군 화산(花山)에 있는 절.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을 관리하기 위해 세운 능사(陵寺)다. 정조가 김홍도(金弘道)에게 그리게 해 목판으로 만든 ‘불설부모은중경판(佛說父母恩重經板)’이 보관되어 있다.

수원 남제(南堤)의 버드나무길 남제는 수원 남쪽에 있는 저수지로 순조대에 축조되었다. 이 곳의 긴 버드나무길은 남제장류(南堤長柳)라 하여 수원8경 가운데 하나였다. 소에 물건을 싣고 지나던 장정이 사진에 담겼다. 우산을 든 모습이 인상적이다.

인천항과 시가 인천은 1883년 1월 개항했다. 서울의 관문인 만큼 일찍부터 도시가 발전하여 시가를 형성했다. 사진은 만국공원(萬國公園)에서 내려다본 인천항.

인천 일본인 거리 인천의 중심가. 일본식 4층 건물이 들어서 있고 오른쪽에는 서양식 3층 건물도 보인다. 한복을 입은 한국인이 일본인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인천의 일본인 거주지 1883년 개항 이후 인천에는 일본인이 모여 사는 조계(租界)가 만들어졌다. 지금의 자유공원 남쪽이다. 사진은 일본인 거류자가 급증하면서 형성된 주택가. 곳곳에 전신주가 서있다.

인천 부두 배에 실을 물건과 부린 물건이 즐비하게 쌓여있다.

인천 일본영사관 인천이 개항되자마자 일본은 서양식 2층 목조건물의 영사관을 준공했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된 후에는 영사관을 이사청으로 개편해 청사로 사용했다. 1910년 이후에는 인천부 청사로 사용되었는데, 오늘날 인천 중구청 자리이다.

북한산 중흥사(重興寺) 대웅전 중흥사는 숙종대에 북한산성이 축성된 뒤 산성을 지키는 승군(僧軍)을 관장하며 큰 사찰이 되었으나, 1915년 홍수로 무너진 뒤 중건되지 못했다. 지금은 주춧돌과 축대만이 남아 있다.

파주 용미리 쌍미륵 경기도 파주 광탄면 용미리 용암사에 있는 마애입상. 보물 제93호. 고려 초기 석불로 알려져 왔으나 근래 들어 조선 세조 11년(1465)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세조와 정희왕후의 모습을 미륵불로 조각한 것이다.

개성 관아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은 조선시대에 개성부가 되어 유수(留守)가 파견되었다. 1906년 개성군으로 격하되었다가 1930년 다시 개성부로 환원되었다. 문루는 이층으로 위층엔 마루를, 아래층엔 4각으로 다듬은 돌기둥을 놓았다.

개성 서대문 원 사진첩에는 이 사진에 ‘개성 서대문’이라는 간단한 설명만이 붙어 있다. 오른쪽 큰 나무 아래 있는 정자는 길 가던 이들이 잠시 쉬어가는 자리였을 것이다.

개성 인삼밭 개성은 인삼재배의 중심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산삼이 수요에 비해 크게 모자라자 인삼재배가 시작됐는데, 조선 후기부터 개성이 대표적인 재배지로 떠올랐다. 이 때문에 개성상인은 인삼교역으로 유명했다.

개성 관음사 대웅전 개성 천마산 기슭에 있는 관음사의 대웅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관음사는 주변 경치가 빼어나 ‘개성금강’이라고도 불렸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고, 앞에 높이 4.5m의 7층석탑이 있다.

개성 선죽교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가 피살된 곳으로 알려진 개성의 돌다리. 앞에 보이는 비각에는 정몽주의 사적을 새긴 비석이 있다. 아직도 정몽주의 혈흔이 남아 있다고 전해지는 다리 옆 시내에서 아낙들이 빨래를 하고 있다.

개성 두문동비(杜門洞碑)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 골짜기인 두문동은 고려 멸망 후 신흥 조선왕조에 반대한 충신 72명이 은거하다가 불타 죽었다고 전해지는 곳. 영조대에 이들을 추모하는 비문이 세워졌고, 정조대에 표절사(表節祠)가 세워져 이들의 충절을 기렸다.
고려 태조릉 경기도 개풍군에 있는 고려 태조 왕건과 비 신혜왕후 유씨(神惠王后 柳氏)의 묘. 능호는 현릉(顯陵). 송악산 서쪽 기슭 좌청룡·우백호 지세의 야산 자락에 자리잡았다. 능역 중앙에는 정자각(丁字閣)이, 입구에 홍살문이 있다. 오른쪽에 보이는 것은 비각이다. 현재 홍살문과 비각은 훼손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은진미륵(恩津彌勒) 논산 은진면 관촉사에 있는 고려 초기의 미륵보살상. 보물 제218호. 머리 부분이 커서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는다. 높이가 18.2m나 되는 고려시대 최대의 석불입상으로, 앞에 서 있는 사람과 비교하면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석불 앞에 보물 제232호인 석등이 보인다.

공산성에서 바라본 금강 공주 공산성(公山城) 쌍수정(雙樹亭)에서 금강을 내려다본 풍경. 인조는 이괄(李适)의 난을 피해 이곳에 잠시 머문 적이 있는데, 쌍수정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영조대에 세워졌다는 정자다.

공주 진남루(鎭南樓) 공산성의 남문. 높은 석축기단을 좌우 대칭형태로 조성한 후, 두 석축기단에 걸쳐 누각을 세워 2층과 같은 효과를 냈다.

충주 충렬사(忠烈祠) 임경업어제비(林慶業御製碑) 충주 충렬사에 배향된 충민공(忠愍公) 임경업 장군을 기리는 정조의 어제비. 임경업은 조선 인조 때의 무장으로 친명반청(親明反淸) 활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억울하게 죽었다고 하여 고려 무신 최영(崔瑩)과 함께 무속신앙에서 가장 존숭받고 있다.

충주 약사(藥寺)의 약사전과 삼층석탑 약사는 충주시 단월동에 있는 단호사(丹湖寺)의 옛 이름. 창건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조선 숙종 때 중건되었다. 약사전 내에는 고려시대 철불좌상(보물 제512호)이 봉안되어 있다. 앞뜰의 3층석탑과 깊게 휜 소나무가 단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충주 관아 비석 조선시대 관아 근처에는 전임 수령을 기리는 비석이 많았다. 대개는 수령들의 치적과 무관하게 만들어지곤 했다고 한다. 사진 전면의 비석에 새겨진 희미한 글귀로 보아 어느 현감의 ‘불망비(不忘碑)’였음을 알 수 있다.

폭포 충주와 제천 사이의 어느 산속에 있는 폭포인 듯한데, 정확한 위치는 확인할 길이 없다. 바위를 끼고 쏟아져내리는 물줄기가 용의 모습을 닮았다. 여름철 피서지로 인기를 누렸을 법하다.

충주 육각당(六角亭) 연꽃이 만발한 연못 한가운데 있는 육각 정자가 운치를 자아낸다. 현재 육각정과 연못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충주교육청이 들어서 있다.

대구 거리 상점들이 즐비한 대구의 거리. 한복 차림을 한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대구 달성공원(達成公園) 달성은 본래 삼국시대의 성곽인데, 1906~07년에 성곽을 해체하고 도로를 만들어 공원으로 사용했다. 일본거류민단이 이곳에 신사(神社)를 세웠다고 하는데, 사진에 보이는 것이 그 신사로 추정된다.

부산 일본인 거리 부산의 일본인 거리. 지게로 짐을 나르는 짐꾼은 한국인이다.

부산항 부산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로 개항장이 되었다. 일제는 1905년 전후 경부선 철도 개통과 관부연락선(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던 배) 취항, 부산항 축항(築港)공사 등 일련의 사업을 통해 부산을 한국침략의 발판으로 삼았다. 사진은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는 아미산에서 내려다 본 부산항.

부산 초량 부산 용두산 아래 초량은 숙종대부터 왜관(倭館)이 있던 곳. 개항 이후 이곳은 일본인 거류지가 되었다.

부산항 매립지 부산은 연안의 땅이 몹시 좁았기 때문에 새로운 땅을 만들기 위해 1902년 개펄 매립공사를 시작했다. 매립지에 부산역 부지가 만들어지고 부두지역이 확대되어 세관과 제1부두가 완성됐다.

부산항 잔교(棧橋) 1905년 관부연락선이 취항하자 일본에서 한국으로 오는 일본인이 크게 증가했다. 이에 일제는 1906년 항만에 철도잔교를 놓아 통행을 도왔다가 1918년에 철거했다. 사진은 관부연락선에서 내려 잔교를 건너는 일본인들.

부산세관 부산이 무역항이 되면서 관세수입이 증가하자 1882년 해관(海關)이 설치되었다. 부산세관으로 이름이 바뀐 1906년 무렵 일본인들은 세관을 새로 지었다. 사진은 공사에 필요한 목재를 나르는 장면으로 보인다.

부산 일본군수비대 1895년 일본군이 부산에 주둔했지만, 이 무렵 한국군은 본래 있던 군진과 수영마저 폐지되고 진위대(鎭衛隊)도 파견되지 않았다. 일본군수비대는 송현산 북쪽 기슭에 병사를 짓고 주둔하다가 훗날 대신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목포이사청과 우편국 목포는 1897년 개항했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일본영사관이 이사청으로 개편되었다. 이 건물을 중심으로 일본 기관들이 들어섰고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었다.

군산 전경 1899년 개항한 군산은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보내는 항구였다. 미곡반출의 관문이었던 것. 사진에 한옥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일본인 거류지임을 알 수 있다.

목포 시가 바다가 보이는 목포 시가지. 일본인 거류지로 보인다.

함흥 남대문 함흥성의 정문으로 남화문(南華門)이라고도 불린 2층 누각. 왼쪽에 보이는 종각의 범종은 현종 때 주조된 것이라고 한다. 오가는 사람이 많고 상점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함흥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함흥 북문과 성천강 함경도에서 가장 넓은 평야인 함흥평야를 가로지르는 강이 성천강이다. 함흥 북문은 성천강으로 나가는 관문이었을것이다

함흥 전경 함흥은 함경도의 중심도시로 함경남도 관찰부가 있었고 일제시대에도 도청 소재지였다. 본래 여진이나 거란이 발호하던 지역이라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도시였지만 주변 평야에서 생산되는 산물의 집산지이기도 했다.
형제암 사진에는 복가동(福哥洞) 형제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두 바위의 모양이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인 것으로 보인다. 사진 왼쪽 아래 물가에 갓을 쓴 한국인이 앉아 있고 오른쪽에는 일본군 몇 명이 한가롭게 쉬고 있다.

함흥 만세교(萬歲橋) 성천강을 가로지른 나무다리로, 군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한다는 뜻에서 조선 태조가 붙인 이름이라 한다. 1905년 러일전쟁 중에 소실된 것을 일본군이 1908년 다시 세웠으나, 1928년 대홍수로 유실되자 1930년 철근콘크리트로 건설했다. 정월대보름에는 이곳에서 다리밟기 놀이를 했다.

함흥 향교 조선 초기에 현유(賢儒) 배향과 지방민의 교육 및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유생들이 모여 있는 누각이 제월루(霽月樓)다. 대성전과 명륜당 등 여러 건물이 들어서 있다.

함흥의 한국인 마을 함흥 어딘가에 있었을 한국인 마을. 사내들이 마을을 가로지른 내에서 지게로 져온 무를 씻고 있다. 담뱃대를 든 노인, 물건을 이고 가는 아낙, 아이들, 강아지까지 한가한 마을의 하루를 짐작할 수 있다.

함흥 동문 밖 귀주사(歸州寺) 고려 때 창건된 귀주사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글을 읽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대웅전 앞에서 일본인 가족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함흥 남문 밖 거리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 한가운데 짐을 실은 소달구지가 서 있다. 분위기로 봐서는 장터인 듯하다. 사진 왼편 병원 간판을 내건 가게 옆으로 더벅머리 청년이 지나간다.

회령 시가지 회령은 함경북도 국경지역으로 조선 후기부터 청국과 무역을 하던 곳이다. 두만강 연안의 이 도시는 탄광 덕분에 빠르게 발전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의 회령 시가지에 소달구지들이 분주히 오간다. 오른쪽 산 중턱에 성문이 보인다. 전선줄이 하늘을 가른다.

회령 동문 안 거리 회령 동문 어귀의 풍경. 쉬고 있는 소달구지며 한가해 보이는 노인네, 성을 나서는 아낙의 모습이 마냥 평화롭다.

회령우편국 회령에 설치돼 있던 우편국 전경.

회령 현충사비(顯忠祠碑) 회령읍내의 현충사에 있는 비.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8명의 공적을 기려 세운 것으로, 높이 182㎝, 너비 60㎝ 크기의 현무암 석비다. 숙종 때 만들어졌다.

배로 두만강을 건너는 풍경 두만강을 건너면 간도(間島)다. 많은 한국인이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간도지방으로 이주했다. 두만강을 건너는 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본 관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훈춘(琿春) 시가 훈춘은 중국 지린성(吉林省) 훈춘현의 중심지로, 간도로 이주한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곳이다. 1920년 이른바 ‘훈춘 사건’이 일어나 많은 한국인이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하기도 한 가슴 시린 고장이다.

옌지(延吉) 국자가(局子街) 중국 지린성의 옌지에도 한국인이 많이 살았다. 지금은 옌볜조선족자치주의 주도(州都)가 되었다. 국자가는 옌지의 중심지인데, 사진은 청나라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담았다.

안둥현(安東縣) 부두 중국 랴오닝성(遼寧省)의 도시로 지금의 단둥(丹東). 평안북도 신의주와는 철교로 연결돼 있다. 한국인들이 만주나 중국으로 나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관문이었다. 사진은 안둥 부두에 정박한 한국 사람들의 목선이다.


출처 : 그리움은 강물되어
글쓴이 : 오경 원글보기
메모 :

옛날 자동차 광고 다양한 사진












.
 
 
 
 
우리나라의 옛 자동차
 
 


포니






맵시나






브리사






제미니






코로나






코티나






프레스토






포드20






그라나다

 

 

 

 

 

출처 : 그리움은 강물되어
글쓴이 : 오경 원글보기
메모 :

 
1. 70년대 후반 만담콤비로 명성을 떨친 장소팔.고춘자씨.
후라이보이 곽규석씨와 이기동씨의 코미디가 전성기를 이루던 시기였다.

2. 1980년 김미숙씨. 당시 김미숙씨는 신인이었고 잘 운이 따르지 않는 케이스였다.
그녀는 주연으로 올라서는데 장장 4-5년이라는 시간을 인내해야만 했다.
 


3. 70년대 중반에 섹시스타로 이름을 날리던 염복순씨


4. 역시 김미숙씨

 


 

5. 70년대말 장미희씨. 그 당시는 아직 확고부동한 톱스타의 자리는 아니었다.
80년에 그녀가 TBC의 [달동네]에서 식모역할을 연기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80년대 초반에 신 트로이카로 명성을 떨치지만... 미국으로 원치않는 오랜기간의
외유에 나서야만 했다.


6. 70년대말 장미희씨.


7. 70년대 한혜숙씨..


8. 1984년 최절정기를 달리던 탤런트 유지인씨.
당시 대히트를 기록한 KBS 일일 연속극 [보통사람들]에 출연하던 때이다.

 

 

 

9. 70년대 말 MBC 하이틴 드라마 [제 3교실]에 출연할 당시의 임예진씨


10. 윤수일


11. 토끼소녀.. 쌍둥이 아이돌로 바니걸스로 출발했다가 나중에 토끼소녀란 이름으로 무대에 나선 기억이 있다.


12. 장덕. 70년대말 사진이다.


 
13. 원조 컨츄리 꼬꼬인 [서수남과 하청일] . 입담이 최고다.

                           


                       14. 20대때 연예계에 갓 입문한 이수만씨


 

15. 후라이보이 곽규석과 구봉서


16. 이기동과 배삼룡.
 
70년대말 MBC의 [두더지 대작전]이라는 코미디 프로를 기억하는가? 이기동과 배삼룡은 당시 코미디계의 명 콤비로 
최대의 전성기를 달리던 연예인중의 한명이었다

출처 : 오경의 인연 만들기
글쓴이 : 오경 원글보기
메모 :

책가방 속에 도시락

 












출처 : 새벽바다의 향기속으로
글쓴이 : 새벽바다 원글보기
메모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