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섬마을 선생, 가슴 아프게 / 1960년대 흑백 영화 포스터들 **

아래 영화 포스터들은 정확히 1967년 국내에 상영된 국산 흑백 영화들이다.
한국 영화 산업이 발달 하기까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굳굳이 발전을 거듭
하여 오늘 날의 한국 영화가 세계적인 수준까지 위상이 높아진 것이 아닐까 ?


 

 

 

 

 

 

 

 

 

 

 

 

 

 

 

 

 

 

 

 

 

 

 

 

 

 

 

 

 

 

 

 

 

 

 

 

 

 

 

 

 

 

 

 

 

 

 

 


[ 출처 : 다음블로그 ]
출처 : 오경의 인연 만들기
글쓴이 : 오경 원글보기
메모 :
이 자료는 정확히 70년 1~12월의 생활상을 담은 사진들입니다.
당시는 가난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힘겹게 살아오신 이분들은,
현재 50을 전 후 한 연세들이 되셨을겁니다..
누더기 옷에 헐벗고 굶주림에 살았어도 따스한 온정이 흐르던 시절이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영양 실조로 얼굴은 붓고 코에는 코물이 흐르고
손과 발은 동상에걸려 어렵게들 살아 오셨습니다
울다가도 먹을것 주면 뚝그치고 하루세끼 먹는 집은 잘사는 집안이었습니다




추운겨울 냉기가 감도는 방에서 나와 따듯한 햇볕에서
늘 언몸을 녹이곤 했지요.헤진 옷을 입고 살아도 다들 그렇게 사니
부끄러움이 먼지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어머니~ 추운겨울 양말이없어 맨말이 시려도
어머니 등에 업히면 엄마 품에서는 나는 젖내음과 따듯하고 포금함은
지금도 잊을수 가 없었습니다
투방집=나무로 얼기 설기 쌓아서 흙으로 빈 공간을 막아서 지은 집입니다




소 외양간에 창을 만들어 소 여물을 먹이는 모습이 정겹습니다
소가 재산목록 1호였으며 사람은 굶어도 소는 늘 따근하게 소죽을 끓여서
주곤했지요.문론 소없는 집이 대 다수였지만....




두메산골 추운 겨울을 나기위해 월동 준비를 해놓은 장작더미 앞의 세모자입니다
초라한 모습과 천진 난만한 표정이 가슴을 찡하게 만듭니다




굴피 나무 겁질로 지붕을 덮어놓은 너와 라는 지붕이지요




겨우살이를 위해 준비해둔 옥수수와 산골의 가정의 풍경입니다
옥수수 죽이나 감자등으로 연명하며 겨울 나기를 했지요




아이를 업고 김을 메는 우리들 어머님의 모습입니다




학교를 마치고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기위해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최고의 놀이 기구였지요.부모님들이 안계시면 몰래 끌고 나와서
온 동네 친구들 태우고,때론 굴러서 많이들 다치고....
떨어진 바지 시린손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그나마 도심에서는 만화방이 있어서 산골보다는 좋았지요.
만화방에서 책보는데 1원주면 6권정도...




생계를 위해 학교 다녀와서 껌팔이도 하고....




신문팔이,신문배달 참으로 어렵게들 사셨습니다.




추수가 끝난 동구밖 들판은 아이들의 놀이터로서 최고였지요




어촌의 아이들이 부모님의 일손을 도와 어포를 말리 중입니다.




생활은 어려워도 꿈과 희망이 넘첬던 시절이었습니다.
텃밭의 짚더미는 추위도 녹여주고 놀이터로 활용되고....




하교다녀오면 의례 부모님 일손을 돕고 밤이돼야 숙제를 할 수 있었습니다
가물 가물한 호롱불 밑에서 꾸벅 꾸벅 졸면서 숙제하다. 머리 카락 많이들 태웠었지요
연필심 마져도 품질이 좋지않아 침을 발라 두어자 쓰고 또 침바르고...




암닭이 알을 놓기가 바쁘게 책보허리에 메고 따듯한 계란을 들고 학교로 내달렸지요.
문방구에 가서 계란으로 공책이나 연필등 학용품으로 물물 교환했답니다. 뛰어가다 엎어져
계란은 깨지고 눈물 콧물 울기도 많이 울었지요, 근방 낳은 계란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




학교 다녀와선 어김없이 지게지고 밭으로, 산으로 땔감을 구하러 가곤 했지요




가축들도 거두고, 한겨울에 고무신고 신발이 꽁꽁 얼서서 발에 붙어 떨어지지도 않았답니다.
그때는 동상 안 걸린 아이들이 이상했지요




설것이도를 하기 위해 빈그릇 솥가마등을 않고 동네 우물가로 설걷이를 하러 가는 모습입니다.
가마솥 뚜겅을 머리에 쓰고 가는 모습이 설걷이를 많이 해본 솜씨 같습니다




지게를 못지는 여자아이들은 나무를 묶어서 머리에 이고 산에서 내려오다많이도 굴르고 다치고......




먹고 살기위해 학교 다녀오면 길거리로 구두딱이,껌팔이,신문팔이 무엇이든 했답니다




구두를 닦는 아이의 표정이 무척이나 고달퍼 보입니다




어머니의 바쁜 일손을 돕고있읍니다.
요즘 머리에 물건 이고 다닐 수 있는 어린이들은 아마 없겠지요




부모님들은 공사장이나 들에 나가고 어린들은 학교 다와서 동네의 잔 일거리들은 다 하였지요.



곡괭이나 삽질도 잘했지요




당시 정부에서 덩그러니 학교 교실 하나 지어주면 나머지 모든 공사는 학생들 차지 였습니다.
돌을이고 지고 학교 축대 쌓는 작업을 하고있네요 머리에 돌을이고 있는 어린이 모습..
돌을 어깨에 맨 아이...




배타고 나가 부모님 일손도 돕고.....




소먹이로 가고...비록 힘들게 살았어도 국경일이면,
산골마을 독가에서도 꼭꼭 태극기 게양 했지요..



초가집앞 텃밭에서 농사일을 돕고있네요.




한겨울 강아지를 않고 따라로운 햇볕을 쬐고있습니다..강아지 안으면 온몸이 따듯했지요..
돌아가면서 않고,순서를 기다리는 두어린이 표정이...*^^*




엄마가 세수시켜 줄때면 제인먼저 코풀어! 하시고 ..
따듯하게 물데워서 어린 동생들을 돌아가며 세수를 시키셨지요




아파도 병원이 없어서, 너무 멀어서, 늘 집에는 아까징끼(머큐롬)을 비취해두고 발라주시 곤했지요.
자식의 아픈 고통을 대신하듯 어머니의 표정이 너무도 안타갑게 보입니다




이발관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동네 한두곳 이발기계 있는 집에가서 머리를 깍고 했지요,
부실한 기게로 머리털 뽑혀서 눈물은 줄줄.....




간혹 사회 복지가들이 학교 찾아오시어 사탕이나 먹을것을 전해주시고...




아이를 등에 업고 갯벌에서 하루 종일 일하시곤 밤이면 아고고 허리야!
고통으로 잠못 이루시던 우리 어머님들 이셨습니다.




수안보 어는 산골마을 학교입니다.




부모님들 일손이 모자라 등교길 이린이들은 스스로 조그만 나룻배를 타고 도강하는 모습입니다.
안전 사고도 많았었지요.



학교 교실에서 공부하는 모습입니다




책상 걸상 무척 정겹습니다 특별 활동시간 주산부 (수판) 어린이들 입니다




추억어린 풍금입니다, 음악 시간이지요 선생님이면 누구나 풍금을 다룰 수 있어야 했지요




양말도 신지 않은 어린이, 무척 진지해 보입니다..




비가 조금만와도 중간에 수업포기 잽싸게 개울을 건너 집으로 내 달렸지요.
물이 불으면 건너지 못했고,빨리 집에가서 집안 비 설것이 해야지요.
모든게 공부보다 집안 일이 우선이었지요..




여자는 코고무신 남자는 검정 고무신, 한겨울 양말이 없어
발이 시린 아이들은 신발에 짚을 넣고 신었었답니다.




학교 안가는 날이면 어린이 애향단(동호회)이 골목도 쓸고 마을 어귀에 꽃길도 만들고
자기 마을 가꾸기를 했답니다




빗자루는 요즘 보기 힘든 싸리나무로만든 빗자루입니다




학교주변 수목원도 만들고...참으로 꿈과 희망이 많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주기적으로 고적지를 찾아 대청소 및 관리도 하곤 했지요




널뛰기하는 여자 아이들 모습입니다.가운데 한 아이가 올라가 앉아 중심을 잡고
누가 누가 높이뒤어 상대를 떨어트리나 껑충 껑충~ 요즘 보기 힘든답니다.




운동회가 열리는 날이면 온동네 어른 아이 할것 없이 모두의 대 잔치였습니다..
부모님들과 함께 뭉처서 힘 겨루기를 했지요




뛰어가면서 사다리 통과 하기 무릅이 벗겨저서 피가 줄줄 흐르고...




기마전으로 힘 겨루기도 하고....




누가 누가 멀리뛰나 훨훨.....




청군이겨라! 백군 이겨라! 목청것 소리치고 나면 다음날은 모두가목이쉬어,ㅎㅎㅎ
지금의 운동회는 점심 시간지나면 끝이지만 당시는 하종일 온마을 잔치로 해가 질때까지 했지요




학교마다 보통 공 두개정도(배구공,축구공) 최고의 놀이감 이었습니다.
눈을 감고 블로킹하는 어린이 모습이^^*




이렇게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차범근,이회택과같은 세계적인 스타들이 탄생 하셨습니다




한창 태권도 붐이 일어 학교마다 가르키는 모습입니다..기마자세 태극1장이던가요
..?




무용연습 중인 여자 아이들입니다..특별 활동 시간이면 언제나 책 걸상 뒤로 밀어 붙여놓고...




길거리 포장마차 비슷한곳에 아이들 간식 많이 팔았지요.불량 식품이 너무많아 늘 배앓이하고.....




당시 1원부터 제일 큰돈 500원까지 입니다..
출처 : 오경의 인연 만들기
글쓴이 : 오경 원글보기
메모 :


 

여치집 파는 행상 / 1963. 06. 01

 

 

 

 

 

오락실갈때 필요한 것들..

 

 

▼학용품▼


누구나 하나씩은 가지고 다니던 흔들 샤프. 잡고 흔들면 샤프심이 조금씩 나오는 좋은 샤프 였는데.

아마 자동샤프, 혹은 흔들샤프라고 불렀죠?


추억의 자석 필통, 앞면과 뒷면을 모두 사용할 수 있었고 필통속이 비닐로 되어 있어

지우개가 안에 들러붙어서 고생도 좀 했죠..


연필깍기의 대명사 샤파. 그 당시에는 색연필도 넣어서 깍아보고 나무젓가락도 넣어보고

하여간 들어 가지만 하면 나무로 된  것은 아무거나 깍아보았는데 지금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점보 지우개를 가장 많이 사용했던 것 같은데 그때는 지우개 용도가 잘못된 글씨를 지우는것 보다는

책상에 비벼서 지우개 지꺼기를 누가 더 길게 만드는지 핫도그 내기 했던 기억이 납니다.

얼마전 TV에서 지우개 지꺼기로 만든 모형이 나온적이 있는데 보신분들 계신지요?


사용하다보면 꼭 한두개는 부러지는 크레파스(크래용)


앞면은 만화 그림이 뒤면은 구구단이나 알파벳이 있는 책받침이 예전에는 유행을 했죠.

추억에 만화


물자가 귀하던 6~70년도에는 정말 몽당연필도 아껴아껴쓰던 시절였다.

부잣집 애들이 버린 몽당연필을 모아서 쓰던 기억이 난다.

몽당연필에 대한 추억


교무실 청소를 하면 꽤나 큰 몽당연필도 줏을 수 있었다.

지금 애들이야 물건 귀한 줄 모르고 잃어버려도 찾지 않는다고 하는데

불과 2~30여년전만 해도 몽당연필을 쓰던 우리나라였었다.

볼펜껍데기에 몽당연필을 끼워 연필따먹기하던 것도 기억나고...^^

 

출처 : 오경의 인연 만들기
글쓴이 : 오경 원글보기
메모 :

우스개와 재담과 노래를 불러준 분들입니다

              

[김희갑]: 60년대에 가장 웃기던 배우.    

 [이상해]: 웃기는 배우로써 그때, 

                                                    유명한 민요가수 [김영임]남편이 되었고 

                       

[박노식]:60~70년대에 가장 박력-배우로써            [길옥윤]: 색스폰-트럼펫,

        지금, [박쥰규]씨에 아버지죠!

 

                                                          그리고....

                        
                     

                    

                  

                   




그리고 또....


 




           [백윤식]                            [원미경]



            어린시절 노랑머리-주인공이던 [이재은]


             [이경진]                          [이효춘] 


                 [정소녀]                          [김영애]


                             신성일 + 장미희

                                이영하 + 선우 은숙 


      

출처 : 오경의 인연 만들기
글쓴이 : 오경 원글보기
메모 :



어린음악대~ 멜로디가 생각날려구한다.아련하다... 

 

출처 : 오경의 인연 만들기
글쓴이 : 오경 원글보기
메모 :

1-1[2].jpg

 

1-2[2].jpg

 

2[4].jpg

 

3-1.jpg

 

3-3.jpg

 

3-4.jpg

 

유성기음악:다방아가씨 50년말 노래 허민

.

출처 : 오경의 인연 만들기
글쓴이 : 오경 원글보기
메모 :
 
한국전쟁 100장면 중 눈빛 출판사가 제공한 사진 14 장면


탱크를 배경으로 동생을 업고 서 있는 소녀,
머리는 헝클어 지고 옷차림은 남루하지만
굳게 다문 입과 결의에 찬듯한 눈매에
절망의 그림자는 찾을수 없읍니다.


어머니는 일터로 나가고 없고,
혼자 남겨 둘 수 없는 동생을 안고 학교로 왔습니다.
교실은 불타고 없습니다. 선생님의 질문에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답하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릴 듯 합니다. (1950년 10월)


얼음이 둥둥 떠내려 가는 차가운 강물을 건너는 부자의 모습.(1951년 1월)
석장의 사진은 50여년전 한국 전쟁의 와중에서 살아가고 있던
우리네 어머니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58주년.
오늘 하루 쯤은 당시를 생각해 보게하는 사진을 싣는 것도
전혀 무의미 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월미도에서 체포된 뒤 옷이 벗겨진 채 검색을 당하고 있는 북한군
(1950년 9월)




장갑차를 탄 미군들이 서울로 진입하는 모습.(1950년 9월)




인적사항이 적힌 목걸이를 걸고 새 옷이 지급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북한군 포로들.(1950년 10월)

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7


집단학살 현장에서 수습된 시신 중에서
가족을 확인한 유족들의 울부짓는 모습.
(1950년.10월 함흥)




미 공군 전투기가 원산 시가지를 폭격하는 모습(1951년)




서부전선에서 체포된 중공군.
사살할 것으로 오인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1951년)




미군의 네이팜탄 공격으로 부상당한 여인들이
응급구호소에 모여 있는 모습.(1951년.2월 수원)




전란중의 남대문.(1951년 3월)




자기가 그린 태극기를 들고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평양의 한 학생과 엎드려 있는 북한군 병사.(1951년 10월)




이미 숨진 엄마의 시신을 붙잡고 하염없이 울고 있는 어린 남매의 모습.
이곳을 지나던 영국군과 호주군에 의해
안전한 곳으로 데려갔다.(촬영일시 미상)




북으로 돌아가는 북한 여군 포로들.
열차 밖으로 인공기 등을 내걸고 구호를 외치는 모습.(1953년.8월)
 
[출처:노을05] 

오늘도 幸福하셔요.
출처 : 용촉고을
글쓴이 : 가을하늘 원글보기
메모 :


▲ 1951. 4. 3. 강대국이 그어놓은 원한의 38선. 이 38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왔던가.
ⓒ NARA
▲ 1951. 1. 26. 미 폭격기들이 북한군 진지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있다.
ⓒ NARA
▲ 1951. 7. 15. 미 전투기들이 원산 상공을 날고 있다.
ⓒ NARA
▲ 1951. 10. 18. 미 폭격기가 북한지역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있다.
ⓒ NARA
▲ 1951, 2. 23. 미 수송기에서 낙하산을 이용하여 보급품을 떨어뜨리고 있다.
ⓒ NARA
▲ 1951. 3. 5. 한강 북쪽 북한군 진지에 폭격을 가하고 있다.
ⓒ NARA
▲ 1951. 4. 2. 미 정찰기가 적진을 살피고 있다.
ⓒ NARA
▲ 1950. 7. 10. 조치원 부근. 미군 트럭이 북한군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불타고 있다.
ⓒ NARA
▲ 1950. 7. 16. 금강교 폭파 장면.
ⓒ NARA
▲ 1950. 7. 21. 불타고 있는 대전 시가지.


▲ 주객전도, 이 땅의 주인인 갓을 쓴 노인들은 전차를 피해 갓길로 가고 있다.
ⓒ NARA
▲ 1950. 7. 27. 맨발의 한 소년이 지게에다 피난봇짐을 잔뜩 지고 있지만 표정이 매우 맑다.
ⓒ NARA
▲ 1950. 7. 29. 안동군민들의 피난 행렬.
ⓒ NARA
▲ 1951. 1. 9. 강릉, 1. 4 후퇴로 눈길에 다시 피난을 떠나고 있다.
ⓒ NARA
▲ 1951. 4. 23. 중공군 춘계대공세로 다시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
ⓒ NARA
▲ 1951. 6. 27. 다리 부상으로 소를 타고 피난길에 나서다.
ⓒ NARA
▲ 1951. 7. 4. 철원, 군 트럭에 실려 피난을 떠나고 있다.
ⓒ NARA
▲ 1951. 7. 19. 강원도 화천, 감자를 캐는 화전민 사람들을 수용소로 데려가고 있다.
ⓒ NARA
▲ 1951. 9. 11. 경기도 동두천, 군인들의 통제 아래 피난민들이 이동하고 있다.
ⓒ NARA
▲ 1951. 8. 20. 마곡리, 한 소년이 소를 몰고 피난길을 가고 있다.


▲ 1951. 4. 20. 대구 근교 훈련소에 신병 입대자들이 입소하고 있다.
ⓒ NARA

▲ 1951. 5. 15. 대구 근교 훈련소에서 신병들의 수료식이 열리고 있다.
ⓒ NARA

▲ 1951. 5. 15. 대구 근교 훈련소, 수료식을 마친 신병들이 부대배치를 받고 있다.
ⓒ NARA

▲ 1951. 5. 18. 대구. 훈련소에서 교육을 마친 신병들이 열차를 타고 전선으로 가고 있다.
ⓒ NARA

▲ 1951. 5. 20. 지게부대.
ⓒ NARA

▲ 1950. 7. 7. 기마대 행렬.
ⓒ NARA

▲ 1950. 7. 29. 주야간 전투에 지친 국군 병사들이 아무데서나 쓰러져 자고 있다.
ⓒ NARA

▲ 1951. 5. 29. 평화로운 한국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
ⓒ NARA

▲ 1951. 5. 26. 마을의 평화를 깨트리는 전차가 고개를 넘어 마을로 들어오고 있다.
ⓒ NARA

 

 

▲ 1951. 9. 11. 피난길에 만난 형과 아우.

▲ 1951. 10. 21. 평양. 살기 위해 태극기를 들고 살려달라고 애걸하고 있다.
ⓒ NARA

▲ 1951. 4. 4. 홍성, 수로에 널브러진 유엔군 시신들.
ⓒ NARA

▲ 1951.1. 4. 공산군의 시신들.
ⓒ NARA

▲ 1951. 5. 25. 길바닥에 나뒹구는 중공군 시신.
ⓒ NARA

▲ 1951. 1. 23. 유엔군들이 상여가 나가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다.
ⓒ NARA

▲ 1950. 7. 5. 한 국군 용사의 무덤.
ⓒ NARA

▲ 1958. 5. 28. 무명 용사의 시신을 본국으로 보내는 미군.
ⓒ NARA

▲ 1950. 7. 5. 국군 헌병이 북한군을 생포하다.
ⓒ NARA

▲ 1951. 6. 12. 원주, 미군들이 야전에서 미사를 보고 있다.
ⓒ NARA

▲ 1951. 7. 3. 미군들이 한국 어린이에게 구제품을 나눠주고 있다.


▲ 1951. 7. 10. 적진을 향해 불을 뿜는 155mm 곡사포.
ⓒ NARA



▲ 1950. 7. 6. 전란으로 잿더미가 된 평택역.
ⓒ NARA



▲ 1950. 7. 7. 전란 중의 천안 시가지
ⓒ NARA



▲ 1950. 7. 7. 미군이 포항으로 상륙하고 있다.
ⓒ 박도



▲ 1951. 6. 3. 155mm 곡사포가 불을 뿜고 있다.
ⓒ NARA



▲ 1950. 11. 유엔군이 원산에 상륙하고자 상륙용 소형 함정에 옮겨 타고 있다.
ⓒ NARA



▲ 1951. 6. 22. 임진강 부교로 전차가 지나려 하고 있다.
ⓒ NARA



▲ 1951. 7. 3. 유리한 고지를 뺏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
ⓒ NARA



▲ 1951. 9. 6. 금수강산을 초토화시킨 포탄 껍질들.
ⓒ NARA



▲ 1950. 7. 24. 경북 예천, 평화롭던 마을에 전차가 들어오면 온 마을이 불바다가 된다.

 

 

 

▲ 1951. 7. 6. 서울, 폐허의 잿더미 속에 시장은 열리다.
ⓒ NARA
▲ 1951. 7. 18. 개성, 개성의 저잣거리.
ⓒ NARA
▲ 1951. 1. 26. 북한군 어린 병사들이 쉬고 있다.
ⓒ NARA
▲ 1951. 3. 5. 품삯을 받는 노무자들.
ⓒ NARA
▲ 1951. 3. 4. 한강 부근 마을에서 아이들이 박격포 소리에 귀를 막고 있다.
ⓒ NARA
▲ 1951. 4. 4. 폐허가 된 춘천.
ⓒ NARA
▲ 1951. 4. 4. 춘천, 북한강 유역에 전차를 몰고 온 이방인들.
ⓒ NARA
▲ 1951. 10. 20. 포로들의 긴 행렬
ⓒ NARA
▲ 1951. 3. 26. 북한군과 중공군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전단.
ⓒ NARA
▲ 1951. 7. 10. 천안, 교통사고로 트럭이 전복됐다.

 

 

출처 : 용촉고을
글쓴이 : 가을하늘 원글보기
메모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