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한국아동문학인협회
글쓴이 : 이승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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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10일.

아침 아홉시에 봉화산 정토원에서 노무현 대통령님의 49재를 지냈습니다.
 
 
 

 
 
 
 
 
 
 
 
 
 
 
 
 
 
 
 
저는 새벽 네시에 파주를 떠나 9시에 정토원에 다다랐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떠나보내기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모여 마지막 보내는 예식을 치렀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안녕, 나의 대통령>에 짧게 헌사를 적어두었습니다.

조금 있다 한 시부터 하는 봉안식을 마치고 작은 비석 앞에 드릴 것입니다.
 

 

 

<안녕, 나의 대통령>은 대한문과 봉하마을에 민중이 남긴 편지들을 모아

펴낸 책입니다. 아무것도 따질 겨를 없이 마지막 가시는 길에

드리고 싶어 펴냈습니다. 이 책에는 수천 통 편지 가운데 제가 추리고 추린 편지

141통이 실려 있습니다.



 
 
 
 
 
 
 
 
 
 
 
 
 
 
 
 
 
제를 마치고 상주께서 인사를 하셨습니다.
 
아침인데도 햇살이 많이 따가웠습니다.



 
 
 
 
 
 
 
 
 
 
 
 
 
 
 
 
운구차가 정토원을 떠나기에 앞서 저는 조금 일찍 내려왔습니다.


 
 
 
 
 
 
 
 
 
 
 
 
 
 
 
 
 
발걸음을 바로 돌리기가 아쉬웠습니다.




 
 
 
 
 
 
 
 
 
 
 
 
 
 
 
 
 
이 차도 곧 떠날 겁니다.









 
 
 
 
 
 
 
 
 
 
 
 
 
 
 
 
 
 
 
봉하마을에 내려올 때까지 좁은 산길에서 보았던 부엉이 바위입니다.
 
바로 밑에서 보니까 너무 가팔랐습니다.
 
위에서는 얼마나 깊었을까요..




 
 
 
 
 
 
 
 
 
 
 
 
 
 
 
그냥 바라만 보면 참 좋은 산입니다.




 
 
 
 
 
 
 
 
 
 
 
 
 
 
 
 
한 시가 되자 봉안식이 열렸습니다.
 
마지막 한줌 재가 땅속에 묻히는 시간이었습니다.
 
많은 민중들은 봉안식이 열리는 바로 옆에 마련된 화면으로 지켜보았습니다.



 
 
 
작은 카메라로 동영상을 찍었습니다.
눈에 자꾸 물기가 묻어 조금 흔들렸습니다.
 
 


 
 
 
 
 
 
 
 
 
 
 
 
 
 
 
 
봉안식을 모두 마치고 참배하는 시간입니다.
 
너럭돌 둘레에 빙 둘러서 참배를 했습니다.








 
 
 
 
 
 
 
 
 
 
 
 
 
 
 
 
대통령 노무현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만의 조직된
힘입니다.
 
<안녕, 나의 대통령>을
영전에 드렸습니다.





 


 
 
 
 
 
 
 
 
 
 
 
 
 
 
 
 
이제 이곳은 곧 푸르른 잔디가 자랄 것입니다.
 
민중의 글들이 바닥돌에 자리할 겁니다.
 
저 앞 쇠벽이 핏빛처럼 녹이 슬 겁니다.
 
그때 다시 인사드리러 오려 합니다.








 
 
 
 
 
 
 
 
 
 
 
 
 
 
 
 
안녕, 아직도 서럽게 그리운 나의 대통령

 

 

 

부디 편히 쉬십시오.
출처 : 한국어린이출판협의회
글쓴이 : 토토북(맹종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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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잇방망이 만드는 노인 다듬이질에 쓰는 방망이를 깎는 노인. 남의 집 앞에 좌판을 벌였다. 연장으로 나무를 깎고 매끄럽게 다듬는 일에 몰두하는 모습에서 장인 정신이 느껴진다.

목재소 긴 톱으로 나무를 자르는 광경. 목공 둘이 위아래에서 톱을 마주잡고 끌고 당기며 나무를 켜고 있다. 주위에는 굵기별로 다른 재목이 쌓여 있다. 당시에는 집을 나무로 지었기 때문에 목재의 수요가 많았다.

통 만드는 장인 담장 앞에 좌판을 열고 통을 만들고 있다. 담뱃대를 입에 물고 능숙한 솜씨로 연장을 써서 나무를 만진다. 앞에는 견본품이 놓여 있다.

갓 공장(工 匠) 남자가 성인이 되면 상투 튼 머리에 갓을 썼다. 신분에 따라 갓의 종류도 다르지만, 대부분은 말총이나 대나무를 실처럼 가늘게 쪼갠 죽사(竹絲)로 만들었다. 단발령으로 갓의 수요가 줄었을 텐데도 좌판에서 갓을 고치고 만드는 공장(工匠)의 표정이 진지하기만 하다.
소쿠리ㆍ빗자루 장수 아이 둘이 장사에 나섰다. 한 아이는 소쿠리를, 다른 한 아이는 빗자루와 짚신을 둘러멨다. 집집마다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을 팔러 동네를 한바퀴 도는 중일 것이다.
엿장수 엿판을 멘 엿장수가 가위로 엿을 자르고 있다. 단것이 귀하던 때여서 ‘엿장수 마음대로’ 잘라주는 엿 맛에 홀린 동네 아이들이 이제 곧 모여들 것이다.
물장수 상수도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라 집집마다 마실 물을 사먹어야 했다. 하천의 위생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장수들은 이른 새벽부터 단골집에 깨끗하고 맛난 물을 배달했다. 물지게는 등태에 가로로 길게 댄 막대기 양 끝에 양철통이나 나무통을 달아매 사용했다.
나무장수 땔감으로 쓸 솔가리를 황소 등에 싣고 시장에 나온 나무장수. 혹시라도 소가 달아날까 고삐를 꼭 잡고 있는 사내는 농한기에만 땔감을 해서 장에 내다 파는 농부인지도 모르겠다. 뒤로 성벽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성읍 인근이다.

나무장수 연료로 쓸 만한 것이라곤 나무밖에 없던 시절, 많은 이가 산에서 나무를 해 시장에 내다 팔았다. 삿갓을 쓴 나무장수가 장작바리를 사갈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배추장수 배추를 밭에서 출하하는 광경이다. 밭주인인 듯 보이는 이는 검은 안경에 궐련을 피고 있고, 담뱃대를 문 장정이 지게에 배추를 잔뜩 얹어 일어서려 하고 있다. 김치의 주재료로 사용된 배추는 일찍부터 수요가 많은 채소였다.

소달구지 달구지는 소가 끌기도 하고 말이 끌기도 했는데, 바퀴가 두 개인 것도 있고 네 개인 것도 있었다. 대체로 북한지방에서 바퀴 두 개 달린 달구지를 썼다고 한다. 사진은 손님을 기다리는 소달구지들.

밥상을 멘 장정 네모 반듯한 소반을 지게에 진 장정들이 웃고 있다. 소반이 널리 사용된 것은 독상이 주로 쓰인 데다 이동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손님을 치를 집에 밥상을 빌려주러 가는 길인지 밥상을 팔려고 장에 나온 길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북한의 소달구지 성을 배경으로 소달구지꾼이 포즈를 취했다. 사진 찍는 것을 보고 있는 순검과 아낙들의 신기해하는 표정이 재미있다. 굴건을 쓴 것으로 보아 소달구지꾼은 상중(喪中)이었던 것 같다.

옹기장수 옹기는 독과 황갈색 질그릇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 백성들의 식생활이 장과 김치 등 발효식품 중심이었기 때문에 장독은 필수품이었다. 대개는 옹기점에서 팔았지만 사진처럼 지게에 옹기를 지고 거리나 집집을 돌며 파는 장사꾼도 흔했다.
닭장수 닭 요리는 음식이라기보다는 보신용에 가까웠다. 닭장을 통째로 지고 시장에 나온 청년은 갓까지 쓰고 있다. 아마도 정작 본인은 집에서 기른 닭으로 삼계탕 한번 못 해먹었을 것이다.
잡화상 시장에 늘어선 점포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만물상이라고 불리던 잡화점에 농기구며 가정용품 등이 흩어져 있다. 재봉틀이 보이는 곳에 재봉소라는 간판이 내걸려 있다.

음식점 길거리 쪽으로 음식재료를 펼쳐놓은 음식점. 뚝배기가 포개져 있는 것으로 보아 장국집인 것 같다. 장에 나와 필요한 물건을 찾다가 배가 출출해진 사람들이 국말이로 요기를 하던 곳이다. 서서 음식을 먹던 손님이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염색 가게 장터에 판을 세워놓고 옷감에 물을 들이는 모습. 가게는 뒤에 있었을 것이다. 물동이를 인 아낙이 지나가다 멈춰서 구경하고 있고, 사진 찍는 것이 신기했던지 아이 둘이 바라보고 있다. 맞은편에 안경방이 보인다.

 

출처 : 그리움은 강물되어
글쓴이 : 오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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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도시락이 선반에 가지런이 놓여 있네요..6개로 보아 학생이 6명의 가정인가 봐요..
에구.. 가만이 보니 도시락 싸시던 어머님이 넘 고생 하셨겠네요..



계란 꾸러미 이죠..ㅎㅎㅎ 한줄에 10개를 짚으로 단단이 묶어 놓았네요..*^^*
시골에서 계란으로 도시락에 겅건이로 싸 주시면 최고 였지요..제가 국민학교시절
어머니께서 한번 싸 주셨는데.. 그게 얼마나 좋은지..자랑하며 도시락 꺼내 먹던 기억이 납니다.. 캬캬캬캬캬 ~



채변봉투 입니다.. 캬캬캬캬캬 ~
그 때는 거이 뱃속에 기생충이 득실득실 하던 시절.. 해 마다 채변 검사를 해서 기생충 약을 학교에서 주었죠..
숙제나 다름 없이요.. ㅎㅎㅎ 종이 깔고 용무를 보고 난후에 나뭇가지로 살짝 떠서 비니루 봉투에 담아 갔죠..*^^*
지금 생각 하면 웃음만 나오네요.. 검사 결과 나오면 선생님이 그자리서 약을 나눠 주면 받아 먹었습니다....크 ~~~!!



교련복 ㅎㅎㅎㅎ 나의 외출복이자 평상복 이였습니다..
검은 교복을 입고 하교 하면 교련복으로 갈아 입고 다녔죠.. ㅋㅋㅋ
지금은 교련시간이 없어졌나요.. ? 없어졌으니 요즘은 보기 힘드겠지요.. *^^*



쫀드기 였죠.난로불에 구워먹던 기억이 나요.쫀득쫀득 해서 쫀득이 ...ㅎㅎㅎ



뽀빠이 .그리고 라면땅 똘똘이도 생각나구요..최고의 스낵과자 였죠.. 10원 이였나요..? 20원 이였나요..?



이름을 뭐라 했나요..? 혀에 닿는 순간 녹죠..계피 맛이 난걸로 압니다..*^^*



ㅎㅎㅎ...전에 즐겨 찾던 군것질 거리 중앙에 있는 길다란 오렌지색 빨아 먹던 기억 나시죠..?
지금도 불량식품으로 문구점에서 팔더라구요.얼마전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애들이 사왓나 있더라구요..ㅋㅋㅋ
예전엔 일원짜리 였던걸로 기억이 나는데..지금은 얼마인지 모르겠네요.. *^^*



학생 中央 입니다.. 80 이란 숫자가 1980년 인것 같으네요..ㅎㅎㅎ 그때 제가 고등학생이였어요.. 캬캬캬캬캬 ~



왕자파스..저것은 좀 고급스런 것이네요.. 제가 다닐땐 신신 크레파스 썼었는데..ㅎㅎㅎ
저희집은 좀 어려워서 미술시간에.. 크레용을 못 가져가서 옆에친구들거 빌려 쓰곤 했어요..
그런데도 전 그림을 잘 그렸거든요..미술 감각이 뛰어 났다고나 할까..? 전국대회 상도 탔거든요.. ㅎㅎㅎ
울 님들 그리 생각 안드세요..? 파린치의 미술 감각이 뛰어 나다는것을요.. 캬캬캬캬캬 ~~



쥐불놀이 깡통 입니다..정월 대보름날 하죠..ㅎㅎㅎ
동네 친구들과 옆동네 앞동네 돌아 다니며 밤에....논 에서 돌리던 기억이 나네요..
한참을 빙빙 돌리다.. 하늘 높이.. 던지면..숯불가루가.. 꼬리를 그리며 내려 오지요.
정말 멋 있지요.. 안 돌려 본사람은 잘 모를 겁니다.. ㅋㅋㅋㅋㅋ 팔인치는 안다요..*^^*




  
출처 : 그리움은 강물되어
글쓴이 : 오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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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가 단지혈서로 쓴 엽서의 태극기



'대한민국 국기법 제정 및 태극기의 문화적 활용방안 강구를 위한 정책토론회'가 4일 오후 2시 국회 헌정기념관 대강당서 열렸다.

이날 대한민국 국기선영회는 대강당 벽면에 예전 태극기 등을 전시, 국민 정신을 불러 일으켰다.

국기에는 국민정신 혹은 민족정기가 서려있다. 국기를 받드는 마음은 곧 사랑의 마음이다. 따라서 국기는 국가와 더불어 흥망을 같이하는 운명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사진은 1909년 안중근의사가 단지혈서로 쓴 엽서의 태극기. '大韓獨立' 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대조선 국민군단원의 국민기와 대조선 국기
2006년 05월 04일

김구선생의 친필로 서명한 태극기
2006년 05월 04일

안중근의사가 단지혈서로 쓴 엽서의 태극기
2006년 05월 04일

서재필의 태극기
2006년 05월 04일

데니의 태극기
2006년 05월 04일

출처 : 그리움은 강물되어
글쓴이 : 오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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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방아



난로위의 도시락



대장간



줄배



펌프



연탄



가마솥



천일염전



얼음공장



스카이콩콩



메주



맷돌



떡메질



통 고무신



요강



다듬이질



우물



짚신



목침



금줄



초가집



지게


출처 : 그리움은 강물되어
글쓴이 : 오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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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의 옛모습 
1909년경 정면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모습. 불국사는 1592년 임진왜란 때에 목조 건물이 모두 불타고, 
1604년부터 150년간에 걸쳐 조금씩 복고와 중수가 계속되었지만 조선 말기에 이르서서는 퇴락의 길을 걸었다. 
1923년경부터 일본인들에 의하여 여러 차례 정비가 되었다. 일제 초기의 대웅전의 모습을 보는 마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당시 대웅전의 문짝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다.

1924년경 대웅전 수리 광경으로서 북서쪽에서 본 모습이다. 
지붕과 마당에 잡초가 무성하고, 보수를 위해 기대어 놓은 사다리가 보인다.

1922년경 일제가 석축 등을 복원한 당시의 전경. 당시에도 좌경루는 복원되지 않았다

1919년의 불국사 전경. 청운교, 백운교의 허물어져 있는 모습이 생생하다.

1919년의 불국사 전경. 자하문의 지붕은 허물어지고, 청운교, 백운교는 겨우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동쪽에서 바라본 1914년의 불국사 전경. 오른쪽에 다보탑이 보인다.

서쪽에서 바라본 1914년의 불국사 전경. 석축은 몹시 허물어진 상태이고, 석단 앞에는 밭을 일군 모습이 보인다.

1919년의 불국사. 맨 뒤로 보이는 것이 극락전이고 그 왼쪽이 요사채이다. 앞쪽은 칠보교, 연화교.


			
출처 : 그리움은 강물되어
글쓴이 : 오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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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성객으로 붐비는 서울역.(1967년 9월16일)

 

 

초만원을 이룬 귀성 열차. (1968년 10월5일)


 

 

콩나물 시루 같은 객 차에나마 미처 타지 못한 귀성객들은 기관차에 매달려서라도 고향으로 가야겠다고 거의 필사적이다. 기적이 울리는 가운 데 기관차에 매달린 두아낙네의 몸부림이 안타깝다.(1969년 9월24일)

 

 

정원87명의 3등객차 안에 2백30여명씩이나 들어 찬 객차 안은 이젠 더 앉지도 서지도 못해 짐 얹는 선반이 인기있는 침대(?)로 변하기도. (1969년 9월24일)

 

 

추석을 이틀 앞둔 24 일 서울역은 추석 귀성객들로 붐벼 8만1천여명이 서울역을 거쳐 나갔다.(1969년 9월24일

 

 

8만 귀성객이 몰린 서울역엔 철도 직원외에도 사고를 막기위해 4백80여명의 기동경찰관까지 동원, 귀성객들을 정리하느라 대막대기를 휘두 르는 모습이 마치 데모 진압 장면을 방불케했다.(1969년 9월24일)

 

 

 

추석 보름달 (1969년 9월26일)

 

귀성객이 버스 창문 으로 오르는등 고속버스정류장 대혼잡 (광주고속버스정류장. 1970년 9월14일)

 

 

삼륜차까지 동원되어 1인당 1백원에 성묘객을 나르고 있다. 홍제동. (1970년 9월15일)

 

 

60~70년대에 선보였 던 대표적인 추석 인기 선물 - 설탕세트.

 

잔뜩 찌푸렸던 추석 날씨가 오후부터 차차 개자 고궁에는 알록달록한 명절옷을 차려입은 아가씨들의 해맑은 웃음이 가득찼다. (경복궁. 1976년 9 월11일)

꿈속에 달려간 고향. 지하도에서 새벽을 기다리며 새우잠을 자는 귀성객들. (서울역앞에서. 1978년 9월16일 새벽2시)

 

 

추석 전날 시골 풍경 (1980년 9월)

 

 

한복정장차림으로 추 석제례를 올리고 있는 4대째의 일가족. 올해 1백살난 姜敬燮할머니가 시부모의 묘에 절을 할때 80세된 며느리 呂判敎할 머니와 손자 손부 증손자 증손부와 문중일가 20여명이 지켜보고 있다. (慶北 金陵군. 1980년 9월24일)

 

 

추석 귀성객 (1980년 )

 

추석 귀성객은 돌아 오기도 고달프다. 통금이 넘어 14일 새벽 0시20분에 도착한 연무대발 서울행 고속버스 승객들이 야간통행증을 발급받고 있다. (1981년 9월14일)

 

광주행 고속버스표를 예매한 여의도광장에는 3만여명의 인파가 몰려 삽시간에 표가 동나버렸다. (1982년 9월19일 정오)

 

 

짐인지 사람인 지...
귀성버스도 북새통. 연휴 마지막날인 3일 한꺼번에 몰린 귀성객들로 짐짝처럼 버스에 오른 사람들은 큰 불편을 겪었다. 관광버스 짐싣는 곳에 승객이 앉아 있다.(1982년 10월3일)

 

고향으로 달리는 마음
추석귀성을 위한 고속버스 승차권 예매행렬이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도 끝이없이 늘어서 있다. (여의도광장. 1983년 9월10일)

 

 

빗속의 귀성예매 대열
추석 귀성객을 위한 고속버스승차권 예매가 15일 서울여의도에서 시작되자 3분의1일인 1만5천6백여장이 팔렸다. (1985년 9월15일)

 

 

추석 고향길은 멀고도 불편한 고생길. 서울역 광장은 요즘 귀성객들이 하루 10여만명이나 몰려들어 민족대이동의 인파로 붐비고 있다. (1985년 9월29일)

 

이번 추석 귀성길에는 고속도로 국도마다 차량홍수를 이루면서 중앙선 침범, 끼어 들기등 무질서한 운행으로 극심한 교통체증과 혼란을 빚었다 . (벽제국도.1987년 10월7일)

 

 

24일 서울역에는 이른 아침부터 많은 귀성객이 몰려 큰 혼잡을 빚었다. (1988년 9월24일)

 

 

추석 귀성열차표를 사 기위해 서울 용산역광장에 몰려든 예매객들. (1989년 8월27일)

 

가다가 쉬다가...
추석인 14일오전도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에는 귀성객과 성묘객들의 차량이 몰려 평소보다 2~3배나 시간이 더 걸리는 심한 정체현상을 빚었다. (1989년 9월14일)

 

 

멀고 먼 귀성길
5일부터 추석귀성 열차표 예매가 시작되자 6일 발매되는 호남선 열차표를 사려는 시민들이 앞자리를 뺏기지 않기위 해 텐트와 돗자리까지 동원, 새우잠을 자며 날새기를 기다리고 있다. (서울역. 1992년8월6일)

 

 

한가위 가족나들이 ( 동작대교. 1992년)
 "싼 것이나 사 입혀 야죠" 추석 한산한 시장에 나온 어머니. (동대문시장. 1962년9월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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