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독립선언


                         이종문


아침 식탁에 오른 등 푸른 꽁치 중에 어느 한 마리를 내가 뜯기 시작하면

언제나 그 놈을 함께 뜯어 먹곤 하던 아내,


그 아내가 돌연히 오늘 독립선언을 했다.


내가 한 놈을 골라 이미 뜯고 있는데도 그녀가 다른 한 놈을 골라 잡은 것이다.
...................................................................

동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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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가고 
 

                 나희덕

 

가야지 어서 가야지
나의 누추함이
그대의 누추함이 되기 전에
담벼락 아래 까맣게 영그는
분꽃의 씨앗, 떨어져 구르기 전에
꽃받침이 시들기 전에
무엇을 더 보탤 것도 없이
어두워가는 그림자 끌고
어디 흙 속에나 숨어야지
참 길게 울었던 매미처럼
둥치 아래 허물 벗어두고
빈 마음으로 가야지
그때엔 흙에서 흙냄새 나겠지
나도 다시 예뻐지겠지
몇 겁의 세월이 흘러
그대 지나갈 과수원길에
털복숭아 한 개
그대 내 솜털에 눈부셔하겠지
손등이 자꾸만 따갑고 가려워져서
나를 그대는 알아보겠지
.................................................

계절이 지나간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간다.

시간이 지나간다.
일분, 이분, 한시간, 두시간, 하루, 이틀, 일년, 십년...
어제가 가고, 오늘이 또 간다.

겨울이 지나가고 나면
봄이 오겠지.
오늘이 지나면
내일 오겠지.

그렇게 무심히 지나가는 것조차
자취를 남기는 법

비록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삶이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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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한 장


               김민정


펼치면
온 우주를
다 덮고도 남지요


오므리면
손바닥보다
작은 것이 되지요


마음과
마음 사이에서
웃고 울며 살지요
................................................

종종 세상을 들썩들썩하게 만들었던 사람
언제나 '혁명'을 꿈꾸며 실행에 우선했던 사람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남기고 간 사람


전 애플사의 사장이었던 스티브 잡스
그가 오늘 세상을 떠났다.
누구나 그러하듯...
빈 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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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애플사의 사장이었던 스티브 잡스가 5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스티브 잡스의 인생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나는 언제나 더 혁명적인 변화에 마음이 끌린다.' 던 혁명가 스티브 잡스...
그의 업적은 늘 세계를 놀라게 한 '혁신' 그것이었다.

 


세계 최초의 개인용PC를 개발
세계최초의 3D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 제작자
아이팟으로 MP3 대중화를 이끈 IT천재
아이폰, 아이패드로 대변되는 혁신의 아이콘

 

 


'내가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내가 하는 일을 사랑했기 때문이라 확신한다.

여러분도 사랑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야 하듯 일 또한 마찬가지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죽는 그날까지 언제나 사랑하는 일을 해 왔던 셈이니

그는 행복하였다 라고 할 수 있겠다.

 


스티브 잡스... 나는 그의 죽음이 왜 이렇게 아쉬운지...

 


고인의 영면을 기원한다.

또 기다리는 편지


                                정호승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

기다리는 일이 행복할 수 있을까?
기다리는 마음이 설렐 수 있을까?


누군가를 한 번도 애타게 기다려보지 않은 이가
기다리는 일조차 행복했던 이에게 편지를 쓴다.


무수히 되뇌던 이름이 이제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고...
수없이 그려보던 얼굴이 이젠 떠오르지 않는다고...
그렇게 널 떠난다고...
그렇게 널 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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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꽃


                공석진

 
갈대꽃
바람을 맞아
흔적없이 사라지면


빈자리에
이별을 재촉하는
석양이 진다


구석진 곳까지
장대비 쏟아져
서러움이 턱 밑까지 차올라


어느
꽃피는 날
눈물이 뿌려지면


그리움은
갈숲을
서성인다.

.................................................

푸르름의 절정.
파란 에메랄드 빛 하늘.
구름 한 점 찍을 곳이 마땅치 않다.


그리움의 절정.
바람따라 흔들리는 갈대의 춤사위.
마음 둘 곳이 마땅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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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저녁의 시


                      김춘수


누가 죽어가나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세상 외롬 속에서
물 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 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

우리가 세상에 나오는 순서는 있어도 떠나가는 순서가 없다.
부모, 자식, 삼촌, 조카, 선배, 후배, 형님, 동생...
사실, 이런 구별은 세상에 나온 순서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시간이 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어린 아이나 노인 이빠지 듯,

자꾸만 빈 자리가 늘어 나온 순서가 무색하다.


우리 사는 동안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는 것이 너무 당연한데,
언제 가더라도 딱히 아쉬울 것도, 그리 안타까울 것도 없긴 한데...
그래도 영영 떠나고 나면
그 빈 자리의 공허함이 꽤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어찌됐든 헤어짐은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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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윤희상


화가는
바람을 그리기 위해
바람을 그리지 않고
바람에 뒤척거리는 수선화를 그렸다
바람에는 붓도 닿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어떤 사람들은
그곳에서 바람은 보지 않고
수선화만 보고 갔다
화가가 나서서
탓할 일이 아니었다

......................................................................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갖고 있다면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목소리로, 손가락으로, 몸으로, 붓으로...


노래를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춤을 못 추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잘 하기가 어려운 게다.
정말 잘 하기란 어려운 게다.


더구나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는 것,
그것을 고스란히 누군가에게 전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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