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의 강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서로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이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치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

만나면 항상 기분 좋은 사람,

언제든 어디서든

흉금 터놓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지.

 

그 이유가

네 탓일지, 내 탓일지 따지기 전에

, 쉽지 않은 일.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오늘 밤

흠뻑 취해도 좋으련만.

 

산행 2

 

                  마종기


이른 아침에는 나무도 우는구나.
가는 어깨에 손을 얹기도 전에
밤새 모인 이슬로 울어버리는구나.
누가 모든 외로움 말끔히 씻어주랴.
아직도 잔잔히 떨고 있는 지난날,
잠시 쉬는 자세로 주위를 둘러본다.
앞길을 묻지 않고 떠나온 이번 산행,
정상이 보이지 않는 것 누구 탓을 하랴.
등짐을 다시 추슬러 떠날 준비를 한다.


시야가 온통 젖어 있는 길.

......................................................................

배낭 메고 산 길을 걷다 보면
그 모양새가 우리 삶과 참 많이 닮아있다.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고,
발걸음도 가볍고 즐거울 때가 있는가 하면
힘들고 지칠 때도 있다.


바삐 걸음 재촉해 걷고 또 걷다가
쉬기 위해 앉아 주위를 둘러보면
그제서야 주변 풍광이 눈에 들어오고
그제서야 어디 쯤 왔는지 대충 짐작하게 되는...


그래서 잠시라도 쉬어야 하는...
그래야 발걸음이 좀 가벼워지는...

그리움에 지치거든


                                   오세영


그리움에 지치거든
나의 사람아
등꽃 푸른 그늘 아래 앉아
한 잔의 차를 들자
들끓는 격정은 자고
지금은
평형을 지키는 불의 물
청자 다기에 고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구나
누가 사랑을 열병이라고 했던가


들뜬 꽃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마른 입술을 적시는 한 모금의 물
기다림에 지치거든
나의 사람아
등꽃 푸른 그늘 아래 앉아
한 잔의 차를 들자

...................................................................

오늘도 비

이어지는 비에

마음도 덩달아 가라앉고

 

오랜만에 차를 한 잔 해야겠다

이것저것 주섬주섬

꺼내고 챙겨야 하는 번거로움

 

차 한 잔의 여유로움을 누린 것이 언제였지

한동안

차 한 잔 마실 여유도 없었지

 

여유로움은 어쩌면

무수한 번거로움이 주는

작은 혜택

 

오늘은 기어코 차 한 잔 마셔야겠다

 

이것 저것 꺼내고, 챙겨 놓고, 물을 끓이고, 차를 꺼내고, 찻잔을 닦고

채비를 서두른다.

 

'명시 감상 4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종기... 우화의 강  (0) 2011.07.28
마종기... 산행 2  (0) 2011.07.14
이해인... 커피 한 잔에 사랑을 담아  (0) 2011.07.07
김상옥... 어느 날  (0) 2011.06.29
이형기... 낙화(落花)  (0) 2011.06.28

커피 한 잔에 사랑을 담아


                                       이해인


그대 그리움 한 잔에 커피 잔에 물을 따르는 순간부터
그대 향이 마음에 먼저 들어왔습니다


커피를 유난히도 좋아한 그대의 그윽한 영상이
커피향 만큼이나 나의
온 몸을 감싸고 피어오릅니다


오늘의 커피에는 그대의 이름을 담았습니다
나의 목을 타고 흘러 가슴까지
퍼져오는 따스함은 그대를 향한 내 그리움입니다


그대에게 차마  전하지 못한 혼자만의 고백을
은은한 향으로 피워 올리며
그리움이 가라앉은 커피를 동그랗게
흔들어 마십니다


커피 한 잔에 그대 그리움 한 잔에
언젠가 만날 그 날을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나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

티스푼이 놓인 커피 받침...

그리고 커피 한 잔

'명시 감상 4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종기... 산행 2  (0) 2011.07.14
오세영... 그리움에 지치거든   (0) 2011.07.13
김상옥... 어느 날  (0) 2011.06.29
이형기... 낙화(落花)  (0) 2011.06.28
오세영... 봄비  (0) 2011.06.23

어느 날

 

              김상옥

 

구두를 새로 지어
딸에게 신겨 주고
저만치 가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 생애 사무치던 일도
저리 쉽게 가겠네
....................................................

어느 날

내 가슴을 쾅 때린 시 한 편...

 

살다보면
때론 사람에게 상처받고,
삶에 지치고 힘들 때...

 

다시 보면 참, 좋은 시 한 편....

'명시 감상 4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종기... 산행 2  (0) 2011.07.14
오세영... 그리움에 지치거든   (0) 2011.07.13
이해인... 커피 한 잔에 사랑을 담아  (0) 2011.07.07
이형기... 낙화(落花)  (0) 2011.06.28
오세영... 봄비  (0) 2011.06.23

낙화(落花)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최고의 시(詩)

'명시 감상 4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종기... 산행 2  (0) 2011.07.14
오세영... 그리움에 지치거든   (0) 2011.07.13
이해인... 커피 한 잔에 사랑을 담아  (0) 2011.07.07
김상옥... 어느 날  (0) 2011.06.29
오세영... 봄비  (0) 2011.06.23

봄비


                   오세영


꽃 피는 철에
실없이 내리는 봄비라고 탓하지 마라.
한 송이 뜨거운 불꽃을 터뜨린 용광로는
다음을 위하여 이제
차갑게 식혀야 할 시간,
불에 달궈진 연철도
물 속에 담금질해야 비로소
강해지지 않던가.
온종일
차가운 봄비에 함빡 젖는
뜨락의
장미 한 그루.
......................................................................................................

 

 

아파트 담벼락을 따라 장미가 함박 피어있었다.
한동안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은 나를 채근하느라 힘을 다 뺐다.
무기력해진 내가 더 맥없어 보일 때 쯤,
화려한 장미의 향연이 펼쳐져 있음을 그제서야 보았다.


하지만 그 화려한 향연도 끝날 때가 가까웠음을 가까이 다가가서야 알았다.
탐스럽게 피었다 싶은 장미에 손을 대자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핏빛 꽃잎...


내 맘 속에 열정은 영영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제 가라앉혀야 할 때를 알게 된 것일게다.


다음을 위하여...

'명시 감상 4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종기... 산행 2  (0) 2011.07.14
오세영... 그리움에 지치거든   (0) 2011.07.13
이해인... 커피 한 잔에 사랑을 담아  (0) 2011.07.07
김상옥... 어느 날  (0) 2011.06.29
이형기... 낙화(落花)  (0) 2011.06.28

자전(自轉) 1

 

                          강은교


날이 저문다.
먼 곳에서 빈 뜰이 넘어진다.
무한천공 바람 겹겹이
사람은 혼자 펄럭이고
조금씩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끝까지 남아 있는 햇빛 하나가
어딜까 어딜까 도시를 끌고 간다.


날이 저문다.
날마다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여자들은 떨어져 쌓인다.
잠속에서도 빨리빨리 걸으며
침상 밖으로 흩어지는
모래는 끝없고
한 겹씩 벗겨지는 생사의
저 캄캄한 수세기를 향하여
아무도
자기의 살을 감출 수는 없다.


집이 흐느낀다.
날이 저문다.
바람에 갇혀
일평생이 낙과(落果)처럼 흔들린다.
높은 지붕마다 남몰래
하늘의 넓은 시계 소리를 걸어놓으며
광야에 쌓이는
아, 아름다운 모래의 여자들


부서지면서 우리는
가장 긴 그림자를 뒤에 남겼다.

 

자전(自轉) 2


밤마다 새로운 바다로 나간다.
바람과 햇빛의
싸움을 겨우 끝내고
항구 밖에 매어놓은 배 위에는
생각에 잠겨
비스듬히 웃고 있는 지구
누가 낯익은 곡조의
기타를 튕긴다.


그렇다. 바다는
모든 여자의 자궁 속에서 회전한다.
밤새도록 맨발로 달려가는
그 소리의 무서움을 들었느냐.
눈치채지 않게 뒷길로 사라지며
나는 늘
떠나간 뜰의 낙화(落花)가 되고
울타리 밖에는 낮게 낮게
바람과 이야기하는 사내들


어디서 닫혔던 문이 열리고
못보던 아이 하나가
길가에 흐린 얼굴로 서 있다.

 

자전(自轉) 3 
 

문을 열면 모든 길이 일어선다
새벽에 높이 쌓인 집들은 흔들리고
문득 달려나와 빈 가지에 걸리는
수세기 낡은 햇빛들
사람들은 굴뚝마다 연기를 갈아 꽂는다.


길이 많아서 길을 잃어버리고
늦게 깬 바람이 서둘고 있구나
작은 새들은
신경의 담너머 기웃거리거나
마을의 반대쪽으로 사라지고
핏줄 속에는 어제 마신 비
출렁이는 살의
흐린 신발소리
풀잎이 제가 입은 옷을 전부 벗어
맑은 하늘을 향해 던진다.


문을 열면 모든 길을 달려가는
한 사람의 시야
허공에 투신하는 외로운 연기들
길은 일어서서 진종일 나부끼고
꽃밭을 나온 사과 몇 알이
폐허로 가는 길을 묻고 있다

 

자전(自轉) 4


골목 끝에서 헤어지는 하늘을
하늘의 뒷모습을
나부끼는 구름 저쪽
사라지는 당신의 과거
부끄러운 모래의 죽음을
불의(不意)의 비가 내리고
마을에 헛되이 헛되이 내리고


등뒤에는 때 아니게
강물로 거슬러오는 바다
동양식의 흰 바다
싸우고 난 이의
고단한 옷자락과 함께 펄럭이고
너의 발 아래서 아, 다만 펄럭이고


돌아가는 사람은
돌아가게 내버려두라
헤매는 마을의 저 불빛도
깊은 밤 부끄러운 내 기침 소리도
용서하라 다시 용서하라


바람은 가벼이 살 속을 달려가고
일생의 가벼움으로 달려가고
뜰에는 아직
멈추지 않는 하늘의
하루뿐인 짧은 내 뒷모습
반짝이는 반짝이는 잠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