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

                         김기택


가지가 되다 말았을까 잎이 되다 말았을까
날카로운 한 점 끝에 온 힘을 모은 채
가시는 더 자라지 않는구나


걸어다닐 줄도 말할 줄도 모르고
남을 해치는 일이라곤 도저히 모르는
그저 가만히 서서 산소밖에 만들 줄 모르는
저 푸르고 순한 꽃나무 속에
어떻게 저런 공격성이 숨어 있었을까
수액 속에도 불안이 있었던 것일까
꽃과 열매를 노리는 힘에 대한 공포가 있었던 것일까
꽃을 꺾으러 오는 놈은 누구라도
이 사나운 살을 꽂아 피를 내리라
그런 일념의 분노가 있었던 것일까


한뿌리에서 올라온 똑같은 수액이건만
어느 것은 꽃이 되고
어느 것은 가시가 되었구나
......................................................................

말 수를 줄여야 겠다.
간혹 의도하지 않은 말로 인해 문제가 생기고,
말이 길어지다 보면 생각지도 않았던 일로 번진다.


내 혀에서 비롯된 업이
나를 상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할 수도 있음을
무수히 겪고도
또 실수를 범한다.


꼭 한순간만 참을 것을...
한마디만 참을 것을...

낡은 의자

                       김기택


묵묵히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늦은 저녁, 의자는 내게 늙은 잔등을 내민다.
나는 곤한 다리와 무거운 엉덩이를
털썩, 그 위에 주저앉힌다.
의자의 관절마다 나직한 비명이
삐걱거리며 새어나온다.
가는 다리에 근육과 심줄이 돋고
의자는 간신히 평온해진다.
여러 번 넘어졌지만
한 번도 누워본 적이 없는 의자여,
어쩌다 넘어지면,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허공에 다리를 쳐들고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있는 의자여,
걸을 줄도 모르면서 너는
고집스럽게 네 발로 서고 싶어하는구나.
달릴 줄도 모르면서 너는
주인을 태우고 싶어하는구나.
그러나 오늘은 네 위에 앉는 것이 불안하다.
내 엉덩이 밑에서 떨고 있는 너의 등뼈가
몹시 힘겹게 느껴진다.
........................................................................

시간이 흐르면 변해가는 것.
스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언제까지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을까?


우리 더 자라지 못한 지 이미 오래,
혹시 더 깊어지지도 못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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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이 기억나지 않는다


                                                 김기택


창문이 모두 아파트로 되어 있는 전철을 타고
오늘도 상계동을 지나간다.
이것은 32평, 저것은 24평, 저것은 48평,
일하지 않는 시간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나는 또 창문에 있는 아파트 크기나 재본다


전철을 타고 가는 사이
내 어릴 적 모습이 기억나지 않는다.
어렸을 때 나는 어떤 아이였을까?
어떤 모습이었을까? 무엇을 하며 놀았을까?
나를 어른으로 만든 건 시간이 아니라 망각이다.
아직 이 세상에 한 번도 오지 않은 미래처럼
나는 내 어린 시절을 상상해야 한다.
지금의 내 얼굴과 행동과 습관을 보고
내 어린 모습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러나 저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노인들의
어릴 적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하듯이
기억은 끝내 내 어린 시절을 보여주지 못한다.
지독한 망각은 내게 이렇게 귀띔해준다.
너는 태어났을 때부터 이 얼굴이었을 거라고.


전철이 지하로 들어가자
아파트로 된 창문들이 일제히 깜깜해지더니
또 다른 아파트 창문 같은 얼굴들이 대신 나타난다.
내 얼굴도 어김없이 그 사이에 끼여 있다.
어릴 적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

오랜만에 친구들과 마주 앉았다.
이런저런 얘기들로 어느새 시간이 휙 지나갔고
헤어질 준비를 슬슬 할 때가 됐다.


내 어릴적 모습도 생각나지 않는다.
무척 귀엽게 생겼었다고 하는데...


그리고 보니
다른 녀석들의 어릴적 모습이 전혀 생각나질 않는다.
분명 많이 변하지 않은 친구들도 있는데...


생각만 그랬던게지,
누가 봐도 40대 아저씨 아줌마들인걸...


어쩌다 한 번쯤은
지금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스스로 그려보고
잘 새겨놔야겠다.

 봄 날

 

                                         김기택

 

할머니들이 아파트 앞에 모여 햇볕을 쪼이고 있다
굵은 주름 가는 주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햇볕을 채워 넣고 있다
겨우내 얼었던 뼈와 관절들 다 녹도록
온몸을 노곤노곤하게 지지고 있다
마른버짐 사이로 아지랑이 피어오를 것 같고
잘만 하면 한순간 뽀오얀 젖살도 오를 것 같다
할머니들은 마음을 저수지마냥 넓게 벌려
한 철 폭우처럼 쏟아지는 빛을 양껏 받는다
미처 몸에 스며들지 못한 빛이 흘러 넘쳐
할머니들 모두 눈부시다
아침부터 끈질기게 추근대던 봄볕에 못 이겨
나무마다 푸른 망울들이 터지고
할머니들은 사방으로 바삐 눈을 흘긴다
할머니 주름살들이 일제히 웃는다
오오 얼마 만에 환해져 보는가
일생에 이렇게 환한 날이 며칠이나 되겠는가
눈앞에는 햇빛이 종일 반짝거리며 떠다니고
환한 빛에 한나절 한눈을 팔다가
깜빡 졸았던가 한평생이 그새 또 지나갔던가
할머니들은 가끔 눈을 비빈다

..............................................................................................

정말 눈 깜빡하면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가는 구나...

5월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 눈부신 아침,

모두 힘 내고 즐겁고 행복한 하루를 보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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