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딸에게


                 박인환

 

기총과 포성의 요란함을 받아가면서
너는 세상에 태어났다 주검의 세계로
그리하여 너는 잘 울지도 못하고
힘없이 자란다.


엄마는 너를 껴안고 삼 개월 간에
일곱 번이나 이사를 했다.


서울에 피의 비와
눈 바람이 섞여 추위가 닥쳐오던 날
너는 입은 옷도 없이 벌거숭이로
貨車 위 별을 헤아리면서 남으로 왔다.


나의 어린 딸이여 고통스러워도 애소도 없이
그대로 젖만 먹고 웃으며 자라는 너는
무엇을 그리 우느냐.


너의 호수처럼 푸른 눈
지금 멀리 적을 격멸하러 바늘처럼 가느다란
기계는 간다. 그러나 그림자는 없다.


엄마는 전쟁이 끝나면 너를 호강시킨다 하나
언제 전쟁이 끝날 것이며
나의 어린 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인가.


전쟁이 끝나면 너는 더욱 자라고
우리들이 서울에 남은 집에 돌아갈 적에
너는 네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그런 계집애.


나의 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디 있느냐
그때까지 너에게 알려줄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인가.
.......................................................

아직 고추도 채 여물지 않은 코흘리개 녀석들이
운동장에 그물망처럼 정확히 좌우 간격 맞춰 줄지어 정열하여

발 밑 꽁꽁 언 땅이 질척하게 녹을 때까지 오돌오돌 떨고 서서
교장선생님의 피끓는 정신무장을 강조하는 애국조회 훈시를 듣고 나서
쬐그만 감자만한 주먹을 꼭 쥐고 군 출신의 체육선생님의 뜨거운 선창에 따라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무찌르자 북괴군!' '이룩하자 남북통일'을
목이 찢어져라 외치고 군대 열병식 하듯 줄지어 사열을 끝내고 서야
흐트러짐 없이 줄지어 교실로 입실했다.


참혹한 동족상잔의 전쟁이 60여년 전, 이 땅에서 벌어졌다.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피눈물로 겪어내야 했던 난리,
그 비극의 참상을 겪은 이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이제 그 쓰라린 기억들을 전할 사람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오늘도 북의 무력도발 가능성을 타전하는 뉴스가 곳곳에 눈에 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전쟁의 기운들이 이 땅 가득 추악한 냄새를 풍겼던가?
안타깝게도 전쟁의 망령이 다시 동(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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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가면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날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언제나...
내가 서있는 자리를 알려주는 건
낙엽 그리고 서늘한 가을 바람...


아주 오래 전 우리들의 얘기는
정겨운 기타 선율에 아련히 실려
어렴풋이 귓가에 들릴 듯 말 듯...


한 켠이 묵직해진 가슴,
심장 소리도 들릴 듯 말 듯...
오늘은 눈이 오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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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와 숙녀

 

                                박인환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서른 한 살...

화려한 꽃을 피우기도 전에 목마를 타고 저 하늘로 떠나버린 시인이 그립습니다...

그의 짧기만한 삶 역시 그리움으로 점철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움이... 개인의 사사로운 것이 되었든,

아니면 민족의 그 무엇이 되었든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요...

 

바람처럼, 신기루처럼 스쳐지나가 잊혀져버리는 얼굴이 아니라면

남이 되기 싫어서라도

그리워하고 기억해야 하는 것인가 봅니다...

 

어느 가을 한녘,
천재 시인의 짧은 생애가 더욱 아쉽고...
그의 노래 소리가 그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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