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원(八院) -서행 시초(西行詩抄) 3


                                                           백석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 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리 묘향산 백오십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쌔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 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 아이는 몇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른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쓸쓸한 흰 바람벽에
희미한 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무더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

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

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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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글다 오래도록 땀과 때에 절다
  개포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
  울력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하거나 이루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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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석


어느 사이 아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굿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라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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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르락 싸르락 지창(紙窓)을 쓸어가는 싸리눈 소리,

휘어이 휘어이 창문 틈새로 들이닥치는 바람소리,

눅눅하고 써늘한 구들장 베고 길게 누운 한 남정네의 깊은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만만치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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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신의주 남쪽 버드나무골에 사는 박시봉이라는 사람 집에서'라는 의미
시적화자가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 주면서 동시에 이 작품이 편지의 형식임을 알 수 있다.
*삿 : 삿자리의 준말.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
*딜옹배기 : 둥글넙적하고 아가리가 넓게 벌어진 질그릇. 질옹자배기
*북덕불 : 짚이나 풀 따위를 태워 담은 화톳불. 북더기불
*쌔김질 : 새김질
*갈매나무 : 갈매나뭇과에 속한 좀나무. 키는 2 m쯤 되고 가지에 가시가 나며, 잎은 넓은 바소꼴이며 톱니가 있다.
열매는 '갈매' 또는 '서리자'라 하여 약재나 물감으로 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백석


포근한 봄철날 따디기의 누굿하니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두 많이 나서 흥성흥성할 것이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친하니 싸다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러 다닐 것과
내 손에는 新刊書 하나도 없는 것과
그리고 그 <아서라 世上事>라도 들을
유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내 눈가를 내 가슴가를
뜨겁게 하는 것도 생각한다

.......................................................

따디기 : 한낮의 뜨거운 햇빛 아래 흙이 풀려 푸석푸석한 저녁무렵.
누굿한 : 여유있는.
살뜰하던 : 너무나 다정스러우며 허물없이 위해주고 보살펴 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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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백석 님의 시입니다.
1988년 해금되기 이전에는 절대 볼 수 없었던,
일반인들은 봐서는 안되는 시였지요.
이유야 국가보안법(?) - 그때도 이런 이름이었나? -
암튼 그런 것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그의 시는 대부분 국가보안과는 거리가 먼
푹석하고 누굿하면서도 살뜰하면서도 뜨거운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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