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필


               이상국


나는 나의 생을,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두루마리 휴지처럼 풀어 쓰고 버린다
우주는 그걸 다시 리필해서 보내는데
그래서 해마다 봄은 새봄이고
늘 새것 같은 사랑을 하고
죽음마저 아직 첫물이니
나는 나의 생을 부지런히 풀어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잘 쓰고 가는 것이 인생이겠다.


몸도 잘 쓰고
마음도 잘 쓰고
머리도 잘 쓰고
시간도 잘 쓰고
돈도 잘 쓰고


선하게 의롭게 이롭게
잘 쓰고 가는 것이 인생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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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에서 국수를 먹다 


                                   이상국


봉평에서 국수를 먹는다
삐걱이는 평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한 그릇에 천원짜리 국수를 먹는다
올챙이처럼 꼬물거리는 면발에
우리나라 가을 햇살처럼 매운 고추
숭숭 썰어 넣은 간장 한 숟가락 넣고
오가는 이들과 눈을 맞추며 국수를 먹는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람들
또 어디선가 살아본 듯한 세상의
장바닥에 앉아 올챙이국수를 먹는다
국수 마는 아주머니의 가락지처럼 터진 손가락과
헐렁한 티셔츠 안에서 출렁이는 젖통을 보며
먹어도 배고픈 국수를 먹는다
왁자지껄 만났다 흩어지는 바람과
흙 묻은 안부를 말아 국수를 먹는다
.......................................................................

어디론가 떠나는 길,
그 길 위, 일상의 풍경이 새롭게 혹은 낯설게
다가서고 또 지나간다


하지만 무심코 지나던 길 위에선
내 그림자를 만나는 일도 흔치않다.


용기는 바닥에 붙은 발바닥을 한걸음 떼는 일이라던데,
이 자잘한 용기조차 호기롭게 부려보지 못했다.


길가에 줄지어 늘어선 플라타너스
꼭 한 뼘씩의 여유로움을 선사하며 멀어진다.


사뿐히 차 창문을 내리고
손을 뻗어 가볍게 인사를 건낸다.
잠깐 다녀오마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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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장(風葬)


                이상국

 

오랫동안 수고했다
돌쩌귀에 겨우 매달린 문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집


저 무너진 아궁이가
우리들 몇대의 밥을 지었다면
누가 믿겠니


새끼내이 잘하던 소는
늙어 무엇이 되었을까
그 많던 제사는 어떻게 되었는지


차일 높이 치고 잔치국수 말아내던 마당에 들어서며
너븐들 쇠장사하던 아무개네 집 아니냐고 아는 체하면
집은 벽을 허물며 운다

..............................................................

지난 주말 할아버지 제사를 모시기 위해 모두들 분주한데, 조용히 어머니가 날 방으로 부르신다.
내년부터 시어머니 제사와 함께 지내자고, 내가 45년을 모셨으니 그만하면 됐다고 하신다.


그러마 대답하곤 방에서 나와 가만히 생각을 했다.
일면식도 없었던 시아버지의 제사를 시집 온 후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냈고,
남편도 없이 자식들 키우며 오랜 세월을 모셨으니, 그만할 법도 하다 싶어 생각을 접었다.


그날 밤, 제사를 모시는 내내, 구석자리에 앉은 어머니는

끝도 없이 눈물을 닦아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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