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정(絶頂)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쭉에 갈겨
마츰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리빨 칼날진 그 우에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보다

나의 벗이여, 그리운 이름이여


                                              유인숙


잿빛 구름 달빛을 가린 밤하늘 등에 지고
어두움 밝히며 살아 온 세월이
오늘은 기억 속에 가물거린다
그리운 벗이여, 지금은 머-언 곳에서 뿌리내리고
세월의 깊이만큼 성숙해진 나이로 서 가는
우리 어두운 사춘기 골짜기를 지나
때로는 찢기어져 골이 깊은 상처들
넉넉한 마음으로 감싸 안는 너
나는 부끄러운 목숨 하나 깃발처럼 꽂고
그리운 이름을 불러본다
나의 벗이여, 그리운 이름이여
별들이 총총하던 밤하늘 등에 지고
어두움 밝히며 살아 온 세월이
오늘은 기억 속에 가물거린다

...................................................................................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우리들의 이야기.
또 이렇게 서로에게 한 발씩 다가갈 것이다.


더 오랜 시간이 흐르고,
생각을 나누고,
가슴을 열면
서로에게 '친구'라는 이름에 합당한 자리를
가슴 한 켠에 마련하게 될 것이다.


영영 이별하는 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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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驛)

                     한성기

 

푸른 불 시그낼이 꿈처럼 어리는
거기 조그마한 역이 있다


빈 대합실에는
의지할 의자 하나 없고
이따금
급행열차가 어지럽게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아득한 선로위에
없는 듯 있는 듯
거기 조그마한 역처럼
내가 있다
...............................................................

자욱한 안개 사방에 내려앉은
서릿발도 바짝 날을 세운 어스름 새벽

 

도무지 따스한 기운을 찾을 길 없는
아득하게 멀게만 보이는 불빛 하나,

 

제 덩치보다 제법 부풀려진 검은 그림자
얼어붙은 찬 공기를 서늘하게 가르며
쌔~앵 지나쳐 간다.

 

귀청을 찢을 듯한 소음과
머리 속까지 울리는 진동,


소란도 잠시,
그저 스쳐 지나는 것.
눈이
아려 온다.

겨울밤에 시쓰기

 
                          안도현


연탄불 갈아 보았는가
겨울 밤 세 시나 네 시 무렵에
일어나기는 죽어도 싫고, 그렇다고 안 일어날 수도 없을 때
때를 놓쳤다가는
라면 하나도 끓여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벌떡 일어나 육십촉 백열전구를 켜고
눈 부비며 드르륵, 부엌으로 난 미닫이문을 열어 보았는가
처마 밑으로 흰 눈이 계층상승욕구처럼 쌓이던 밤


나는 그 밤에 대해 지금부터 쓰려고 한다
연탄을 갈아본 사람이 존재의 밑바닥을 안다,
이렇게 썼다가는 지우고
연탄집게 한번 잡아 보지 않고 삶을 안다고 하지 마라,
이렇게 썼다가는 다시 지우고 볼펜을 놓고
세상을 내다본다, 세상은 폭설 속에서
숨을 헐떡이다가 금방 멈춰 선 증기기관차 같다
희망을 노래하는 일이 왜 이렇게 힘이 드는가를 생각하는 동안
내가 사는 아파트 아래 공단 마을
다닥다닥 붙은 어느 자취방 들창문에 문득 불이 켜진다
그러면 나는 누군가 자기 자신을 힘겹게도 끙, 일으켜 세워
연탄을 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리수출자유지역 귀금속공장에 나가는 그는
근로기준법 한줄 읽지 않은 어린 노동자
밤새 철야작업 하고 왔거나
술 한 잔 하고는 좆도 씨발, 비틀거리며 와서
빨간 눈으로 연탄 불구멍을 맞추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다 타버린 연탄재 같은 몇 장의 삭은 꿈을
버리지 못하고, 부엌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연탄냄새에게 자기 자신이 들키지 않으려고
그는 될수록 오래 숨을 참을 것이다
아아 그러나, 그것은 연탄을 갈아본 사람만이 아는
참을 수 없는 치욕과도 같은 것
불현듯 나는 서러워진다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눈발 때문이 아니라
시 몇 줄에 아둥바둥 매달려 지내온 날들이 무엇이었나 싶어서
나는 그 동안 세상 바깥에서 세상 속을 몰래 훔쳐보기만 했던 것이다


다시, 볼펜을 잡아야겠다
낮은 곳으로 자꾸 제 몸을 들이미는 눈발이
오늘밤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불이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나는 써야겠다,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지금 내가 쓰는 시가 밥이 되고 국물이 되도록
끝없이 쓰다 보면 겨울 밤 세 시나 네 시쯤
내 방의 꺼지지 않은 불빛을 보고 누군가 중얼거릴 것이다
살아야겠다고, 흰 종이 위에다 꼭꼭 눌러
이 세상을 사랑해야겠다고 쓰고 또 쓸 것이다
.............................................................................

삶이 아름답다고,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고 말하기가
왜 이리 힘든지...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신은 공평하다고 믿는 것이
왜 이리 공허한지...


'내일은 해가 뜬다'고 아무리 소리 질러보고 뛰어 봐도
왜 이리 가슴 한 켠은 서늘하기만 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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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하여


                                곽재구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팔을 놓지 않으리
너를 향하는 뜨거운 마음이
두터운 네 등 위에 내려앉는
겨울날의 송이눈처럼 너를 포근하게
감싸 껴안을 수 있다면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져
네 곁에 누울 수 없는 내 마음조차 더욱
편안하여 어머니의 무릎잠처럼
고요하게 나를 누일 수 있다면
그러나 결코 잠들지 않으리
두 눈을 뜨고 어둠 속을 질러오는
한세상의 슬픔을 보리
네게로 가는 마음의 길이 굽어져
오늘은 그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네게로 가는 불빛 잃은 발걸음들이
어두워진 들판을 이리의 목소리로 울부짖더라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손을 풀지 않으리.

....................................................................................

한 해를 보내면서
늘 마음 한구석에 남는 아쉬움과 후회,


이제 하루 남은 2010년...
희망을 위하여 노래 한자락 불러봄이 어떤가?

겨울 강가에서


                   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

창밖에 무엇인가 반짝거리면서 흩뿌린다.
가만히 보니 눈이 온다.
눈이 온다고 하기보다는
은빛 가루가 뿌려진다는 표현이 더 가깝다.


한 해가 겨우 닷새 남고 보니,
지난 일이며, 얼굴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오랜만에라도 누군가에게 연락이 오면
저 눈가루마냥 반가울 듯한데...
목소리도, 어찌 사는 지도 궁금하긴 한데,
새삼스럽게 연락을 하자니 다소 부담스럽다.


조용히 한 해를 접어두자니,
자꾸만 자꾸만 궁금 주머니가 뒤집어 진다.

기다림의 시

 

                           양성우       

 

그대 기우는 그믐달 새벽별 사이로
바람처럼 오는가 물결처럼 오는가
무수한 불변의 밤, 떨어져 쌓인
흰 꽃 밟으며 오는
그대 정든 임. 그윽한 목소리로
잠든 새 깨우고 눈물의 골짜기 가시나무 태우는
불길로 오는가, 그대 지금      
어디쯤 가까이 와서
소리없이 모닥불로 타고 있는가

..........................................................................

순식간에 눈 앞을 스쳐 지나가버린 별똥별

분명 타올랐을 것인데

지나간 흔적조차 없고

오늘따라 더 고요해진 하늘엔

흘러가는 구름 한 점도 없다.

 

만남이, 그리고 기다림이

지나고 나면 모든 것 한 순간이듯

우리도 어쩌면 이 순간만큼인지도 모른다.

 

문득 네가

지나간 가을 만큼이나 그리워진다.

 

기다렸으므로 막차를 타지 못한다


                                                        박남준


남은 불빛이 꺼지고 가슴을 찍어 내리듯
구멍가게 셔터문이 내려지고
얼마나 흘렀을까
서성이며 발 구르던 사람들도 이젠 보이지 않고
막차는 오지 않는데
언제까지 나는 막차를 기다리는 것일까


춥다 술 취한 사내들의 유행가가 비틀거리다
빈 바람을 남기며 골목을 돌아 사라지고
막차는 오지 않을 것인데 아예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할 것처럼
발길 돌리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어쩌면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는 일 같은지
막차는 오지 않았던가 아니다
막차를 보낸 후에야 막차를 기다렸던 일만이
살아온 목숨 같아서 밤은 더욱 깊고
다시 막차가 오는 날에도 눈가에 습기 드리운 채
영영 두발 실을 수 없겠다.
...............................................................................

산다는 것은 어쩌면 막차를 기다리는 일...


기다렸던 것만이 가슴에 남아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돌아서지도 못하는...


알면서도 살고,
모르면서도 사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렇게 돌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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