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내게로 왔다


                               오인태


한 번도 시를 쓴 일이 없다
시가 내게 왔다 늘
세상의 말은 실없다
하여 다 놓아 버리고 토씨 하나
마저 죽여, 마침내
말의 무덤 같이 허망한 적요
위에 파르르 떤 달
빛 같이 내려서
시인의 몸 안에 들어와서
젖어 오는 것이다.
거부할 수없이
시가 내게로 왔다
.........................................

언젠가부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누구도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말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주 가끔은 외로웠다.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을 떠올리기도 했고,
통하는 이들과 함께 모여 이야기 나누고 싶었다.
밖엔 겨울 칼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소리,
그 어떤 말도 전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날
모두가 깨어나지 않은 이른 아침,
희미한 한 줄 빛줄기가
무겁게 내린 커튼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침묵의 장막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아주 고요한 텅 빈 공간을
눈송이가 펄펄 날고 있다.
하얀 눈송이를 향해

내가

나의 말이

가만히 손을 뻗는다.


눈송이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눈꽃이 되고
음표가 된다
내 손바닥에 내려 앉아
나의 말이 되고
나의 노래가 된다.


펄펄 날아올라
온 세상을 하얗게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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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噴水)


                     김춘수


1
발돋움하는 발돋움하는 너의 자세(姿勢)는
왜 이렇게
두 쪽으로 갈라져서 떨어져야 하는가,


그리움으로 하여
왜 너는 이렇게
산산히 부서져서 흩어져야 하는가.


2
모든 것을 바치고도
왜 나중에는
이 찢어지는 아픔만을
가져야 하는가,


네가 네 스스로에 보내는
이별(離別)의
이 안타까운 눈짓만을 가져야 하는가.


3
왜 너는
다른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떨어져서 부서진 무수한 네가
왜 이런
선연한 무지개로
다시 솟아야만 하는가,
...............................................................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혔다.' 라는 말을 종종 한다.
이 '현실적인 문제' 라는 것이 아마도 먹고 사는 문제,

돈 문제, 학업, 연애, 가정문제, 인간관계, 직업 등등 다양한 삶의 문제일 것이다.
자신 혹은 그 주변에 관련되어 직접 와 닿은 문제라서 늘 어렵고 복잡하고 힘겹기만 하다.


바로 그 '현실적인 문제' 라고 하는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아주 명쾌한 방법이 있다.

의외로 아주 간단하다.


첫번째는 '생각하는 것'이다.
이 생각하는 것이라는 게 '보는 것'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문제의 핵심이나 원인을 끌어내어 직접 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말로 해도 좋고, 쓰거나 그려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어쨌든 그걸 보면서 생각해야 한다.


두번째 방법은 '움직이는 것'이다.
머리도 움직이고, 입도, 눈도, 손 발도 모두 움직이기 시작해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고,

문제를 해결해 낼 단서들을 찾을 수 있다.


이 두 방법은 물론 거의 동시에 지속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그리고 계속 수정 보완하면서 실천해야 한다.


지금 당장 문제를 생각해서 쓰고 그려보라.
그리고 움직이기 시작하라.
그런 당신 앞에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란 절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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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은상


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말진 부디마오
타고 다시 타서
재될법은 하거니와
타다가 남은 동강은
쓸 곳이 없소이다.
반타고 꺼질진댄
아예 타지 말으시오
차라리 아니타고
생나무로 있으시오
탈진댄 재 그것 초차
마저 탐이 옳소이다
........................................................

사랑만으로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면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언젠가는 너도 나도 각자의 길을 가겠지만
그때까지만이라도
아니 단 한 순간만이라도
함께 있었음을 후회하지 않기를...


어느 순간,
사랑이 온전히 사람의 몫이 아님을 알았을 때,
우리 삶에 영원한 것이 없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내 가슴에 이 사랑 하나는 남겨지길 바랐다.


사랑만으로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면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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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湖水) 1


                     정지용


얼굴하나야
손바닥둘로
폭가리지만,


보고픈마음
호수만하니
눈감을밖에.
................................................

사랑하는 눈빛은 감추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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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曠野)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募)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서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天古)의 뒤에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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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승(女僧)


                    백석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平安道)의 어늬 산(山)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山)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山)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북간도로 징용 끌려간 어머니의 작은 삼촌은

푸른 봄배추같은 젊은 부인과 두 아이를 너무도 그리워하다가

고압선에 붙어 재가 되어 그 곳에 뿌려졌다.

대가 댁의 종손인 할머니의 하나뿐인 오빠는 보도연맹이라는 이름으로 어느 산골짝에서 총살당해

켜켜이 쌓인 시체더미에 발목을 묻어두고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다.

16살 학도병으로 간 어머니의 꽃다운 오빠는 

누렇게 벼가 자란 개성 어느 논바닥에서 총을 맞고 쓰러져 

이름 석자만 씌어진 사망통지서 한 장으로 돌아왔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 후로 그 자손들의 대부분은 빨간 딱지를 이마에 붙이고 가난과 함께 별 볼일 없이 살아야 했다.

그 시절을 살아 낸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께 고마울 따름이다.
............................................................................................................

*가지취: 참취나물. 식용 산나물의 한 가지.
*금덤판: 금점판(金店)판. 금광의 일터.
*섶  벌: 울타리 옆에 놓아치는 벌통에서 꿀을 따 모으려고 분주히 드나드는 재래종 꿀벌.
*머리오리: 머리카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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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묻다


                        김사인


사람들 가슴에
텅텅 빈 바다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길게 사무치는 노래 하나씩 있다
늙은 돌배나무 뒤틀어진 그림자 있다


사람들 가슴에
겁에 질린 얼굴 있다
충혈된 눈들 있다


사람들 가슴에
막다른 골목 날선 조선낫 하나씩 숨어 있다
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 하나씩 있다
.........................................................

그 시절의 상처로 행여
내 맘 속에 아직 서러움이 남았나?


차마 주저앉아 울수밖에 없었던
그 길에서의 설움은
지나온 세월의 뒤안길로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아니 그러기를 바랐다.


어쩌면
눈물 한 방울만큼은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미소 한 모금만큼은 머금었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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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

 

                        김영랑


걷던 걸음 멈추고 서서도 얼컥 생각키는 것 죽음이로다
그 죽음이사 서른살 적에 벌써 다 잊어버리고 살아왔는디
왠 노릇인지 요즘 자꾸 그 죽음 바로 닥쳐온 듯만 싶어져
항용 주춤 서서 행길을 호기로이 行喪을 보랐고 있으니


내 가버린 뒤도 세월이야 그대로 흐르고 흘러가면 그뿐이오라
나를 안아 기르던 산천도 만년 하냥 그 모습 아름다워라
영영 가버린 날과 이 세상 아무 가겔 것 없으매
다시 찾고 부를 인들 있으랴 억만영겁이 아득할 뿐


산천이 아름다워도 노래가 고왔더라도 사랑과 예술이 쓰고 달금하여도
그저 허무한 노릇이어라 모든 산다는 것 다 허무하오라
짧은 그동안이 행복했던들 참다웠던들 무어 얼마나 다를라더냐
다 마찬가지 아니 남만 나을러냐? 다 허무하오라


그날 빛나던 두 눈 딱 감기어 명상한대도 눈물은 흐르고 허덕이다 숨 다 지면 가는 거지야
더구나 총칼 사이 헤매다 죽는 태어난 悲運의 겨레이어든
죽음이 무서웁다 새삼스레 뉘 비겁할소냐마는 비겁할소냐마는
죽는다 ---- 고만이라 ---- 이 허망한 생각 내 마음을 왜 꼭 붙잡고 놓질 않느냐


망각하자 ---- 해본다 지난날을 아니라 닥쳐오는 내 죽움을
아 ! 죽음도 망각할 수 있는 것이라면
허나 어디 죽음이사 망각해질 수 있는 것이냐
길고 먼 世紀는 그 죽음 다 망각하였지만
.......................................................................................

시간이 흐를수록
세월이 흘러 갈수록
새로운 만남보다는 이별이 잦고
시작보다는 마무리에 보다 집중하게 된다.


쳇바퀴 돌듯 제자리를 맴도는 게 일상인 것 같지만
실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변화한다.


지나버린 시간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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