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어놓은 스타킹

 

                              나희덕


지치도록 달려온 갈색 암말이
여기 쓰러져 있다
더 이상 흘러가지 않을 것처럼
 

생의 얼굴은 촘촘히 그물 같아서
조그만 까그라기에도 올이 주르르 풀려 나가고
무릎과 엉덩이 부분은 이미 늘어져 있다
몸이 끌고 다니다 벗어 놓은 욕망의
껍데기는 아직 몸의 굴곡을 기억하고 있다
의상을 벗은 광대처럼 맨발이 낯설다
얼른 집어 들고 일어나 물속에 던져 넣으면
달려온 하루가 현상되어 나오고
물을 머금은 암말은
갈색 빛이 짙어지면서 다시 일어난다
또 다른 의상이 되기 위하여
 

밤새 갈기는 잠자리 날개처럼 잘 마를 것이다
...............................................................

입김도 서릿발처럼 엉겨붙을 것 같은 날
하늘은 그리움 한 조각 찾을 것도 없이
시리도록 푸르다.


텅 빈 하늘 그 공간에
어떤 것도 덧칠되어 있지 않아서 시리다.


아까부터 시려오던 볼은
까마득히 지나쳐
이미 얼어붙은 어느 시간
마룻턱에서 술취한 아비에게
고막이 터지도록 맞은 따귀 때문이었고,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파오는 귓바퀴는
지금 저 하늘처럼 푸르던 어느 날
살벌한 한기가 뼛속까지 저미던 겨울 밤
박박머리의 청년이
발가벗겨진 채로 연병장을 굴렀던 때문이었다.


어느 새
낙엽이 한 두께 쌓인 바닥을 걷어 보면
한 생애 푸르렀던 것들 모두
버석거리는 소리가 날 것이다.


오늘은 버석거리는 낙엽들을 한 자루 긁어 모아
마음껏 태워 볼 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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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에서 국수를 먹다 


                                   이상국


봉평에서 국수를 먹는다
삐걱이는 평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한 그릇에 천원짜리 국수를 먹는다
올챙이처럼 꼬물거리는 면발에
우리나라 가을 햇살처럼 매운 고추
숭숭 썰어 넣은 간장 한 숟가락 넣고
오가는 이들과 눈을 맞추며 국수를 먹는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람들
또 어디선가 살아본 듯한 세상의
장바닥에 앉아 올챙이국수를 먹는다
국수 마는 아주머니의 가락지처럼 터진 손가락과
헐렁한 티셔츠 안에서 출렁이는 젖통을 보며
먹어도 배고픈 국수를 먹는다
왁자지껄 만났다 흩어지는 바람과
흙 묻은 안부를 말아 국수를 먹는다
.......................................................................

어디론가 떠나는 길,
그 길 위, 일상의 풍경이 새롭게 혹은 낯설게
다가서고 또 지나간다


하지만 무심코 지나던 길 위에선
내 그림자를 만나는 일도 흔치않다.


용기는 바닥에 붙은 발바닥을 한걸음 떼는 일이라던데,
이 자잘한 용기조차 호기롭게 부려보지 못했다.


길가에 줄지어 늘어선 플라타너스
꼭 한 뼘씩의 여유로움을 선사하며 멀어진다.


사뿐히 차 창문을 내리고
손을 뻗어 가볍게 인사를 건낸다.
잠깐 다녀오마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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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아직 따뜻하다

 

                              이상국


흐르는 물이 무얼 알랴
어성천이 큰 산 그림자 싣고
제 목소리 따라 양양 가는 길
부소치 다리 건너 함석집 기둥에
흰 문패 하나 눈물처럼 매달렸다


나무 이파리 같은 그리움을 덮고
입동 하늘의 별이 묵어갔을까
방구들마다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어둠을 입은 사람들 어른거리고
이 집 어른 세상 출입하던 갓이
비료포대 속에 들어 바람벽 높이 걸렸다


저 만리 물길 따라
해마다 연어들 돌아오는데
흐르는 물에 혼은 실어보내고 몸만 남아
사진액자 속 일가붙이들 데리고
아직 따뜻한 집


어느 시절엔들 슬픔이 없으랴만
늙은 가을볕 아래
오래 된 삶도 짚가리처럼 무너졌다
그래도 집은 문을 닫지 못하고
다리 건너오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다
..............................................................

오해와 갈등은 내가 스스로 만드는데,
결국 나를 세우고 발길을 바른 곳으로 인도하시는 건 하나님.
그 가르침.


내 행복에 집중한다는 건
하나님이 원하심을 행하려 애쓰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찾는 것이 구도(救道).
그 물음에 답을 찾는 것이 삶.

비가 와도 젖은 자는


                              오규원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

무엇을 얻기 위해 떠난 여행이 있었던가?
나그네 가는 길.


무엇을 얻으려 되돌아간다 한들 그것이 얻어지는가?
이미 지나 온 길.


자연은 신을 비추는 거울,
스스로 그러한 것에 무엇을 더 더하려 하는가?


삶의 시선 그리고 영혼의 향기...
언젠간 자연스럽게 되길 바라본다.
나도 당신도...

가을 편지

 

                     이해인

1
그 푸른 하늘에
당신을 향해 쓰고 싶은 말들이
오늘은 단풍잎으로 타버립니다

밤새 산을 넘은 바람이
손짓을 하면
나도 잘 익은 과일로
떨어지고 싶읍니다
당신 손 안에

 

2
호수에 하늘이 뜨면
흐르는 더운 피로
유서처럼 간절한 시를 씁니다

당신의 크신 손이
우주에 불을 놓아
타는 단풍잎

흰 무명옷의 슬픔들을
다림질하는 가을

은총의 베틀 앞에
긴 밤을 밝히며
결 고운 사랑을 짜겠읍니다

 

3
세월이 흐를수록
드릴 말씀은 없읍니다

옛적부터 타던 사랑
오늘은 빨갛게 익어
터질 듯한 감홍시
참 고마운 아픔이여

 

4
이름 없이 떠난 이들의
이름 없는 꿈들이
들국화로 피어난 가을 무덤가

흙의 향기에 취해
가만히 눈을 감는 가을
이름 없이 행복한 당신의 내가
가난하게 떨어져 누울 날은
언제입니까

 

5
감사합니다, 당신이여
호수에 가득 하늘이 차듯
가을엔 새파란 바람이고 싶음을
휘파람 부는 바람이고 싶음을
감사합니다

 

6
당신 한 분 뵈옵기 위해
수없는 이별을 고하며 걸어온 길
가을은 언제나
이별을 가르치는 친구입니다

이별의 창을 또 하나 열면
가까운 당신

 

7
가을에 혼자서 바치는
낙엽빛 기도

삶의 전부를 은총이게 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의 매일을
기쁨의 은방울로 쩔렁이는 당신
당신을 꼭 만나고 싶습니다

 

8
가을엔 들꽃이고 싶습니다.
말로는 다 못할 사랑에
몸을 떠는 꽃

빈 마음 가득히 하늘을 채워
이웃과 나누면 기도가 되는
숨어서도 웃음 잃지 않는
파란 들꽃이고 싶습니다

 

9
유리처럼 잘 닦인 마음 밖엔
가진 게 없습니다
이 가을엔 내가
당신을 위해 부서진
진주빛 눈물

당신의 이름 하나 가슴에 꽂고
전부를 드리겠다 약속했습니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손잡기 어려운 이여
나는 이제 당신 앞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10
이끼 낀 바위처럼
정답고 든든한 나의 사랑이여

당신 이름이 묻어 오는 가을 기슭엔
수 만 개의 흰 국화가 떨고 있습니다
화려한 슬픔의 꽃술을 달고
하나의 꽃으로 내가 흔들립니다

당신을 위하여
소리없이 소리없이
피었다 지고 싶은

 

11
누구나 한번은
수의를 준비하는 가을입니다
살아온 날을 고마와하며
떠날 채비에
눈을 씻는 계절

모두에게 용서를 빌고
약속의 땅으로 뛰어가고 싶습니다

 

12
낙엽 타는 밤마다
죽음이 향기로운 가을

당신을 위하여
연기로 피는 남은 생애
살펴 주십시오

죽은 이들이 나에게
정다운 말을 건네는
가을엔 당신께 편지를 쓰겠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아직은 마지막이 아닌
편지를 쓰겠습니다

 

26
깊은 밤, 홀로 깨어 느끼는 배고픔과 목마름.
방 안에 가득한 탱자 향기의 고독.
가을은 나에게 청빈을 가르칩니다.
대나무 처럼 비우고 비워 더 맑게 울리는 내 영혼의 기도 한 자락.
가을은 나에게 순명을 가르칩니다.

 

27
가을이 파놓은 고독이란 우물가에서 물울 긷습니다.
두레박 없이도 그 맑은 물을 퍼 마시면 비로소 내가 보입니다.
지난 여름 내 욕심의 숲에 가려 아니 보였던 당신 모습도 하나 가득 출렁여 오는 우물.
날마다 새로이 나를 키우는 하늘 빛 고독의 깊이를 나는 사랑합니다.

................................................................................................................................

감사합니다.

 

잔치같은 하루를 허락하심을 감사합니다.

한방울 이슬을 마주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내 아이의 순결한 숨소리를 듣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따사로운 햇살같은 가르침을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사랑의 향기 가득한 하루를 베풀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시 쓰는 애인


이생진


시 쓰는 이는 사랑하기 좋겠다
사랑을 알고 시를 쓰니까
그래서 따라온 여인
따라오면서 실망했다
사랑은 하지 않고 시만 쓰는 시인을
바닷가에 버리고 왔다
알고 보니
시 쓰는 이의 사랑은
수평선 너머에 있었다
........................................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지가 삶의 질을 결정한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자기의 몫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면 된다.


하지만 그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 지의 문제는
안타깝게도 전적으로 상대방의 몫으로 귀착된다.


먼 길을 동반하려면 이해하고 사랑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안타깝지만 빨리 이별하는 편이 서로를 위해 낫다.
그의 무엇 때문에 그가 좋다고 생각된다면 얼른 복기해봐야 한다.


내가 그의 모든 것을 믿고 이해햐려 하는지...
내가 정말 그를 사랑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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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또 그리움


                            박정만


누이야, 봄날엔 네게 슬픔을 주마.
씻어도 씻어도 씻어지지 않고
버리고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옥(玉)처럼 깨끗한 하나의 슬픔을.


누이야, 너는 가슴에 슬픔을 품고
머언 하늘 한끝을 바라보아도 좋다.
꽃잎같이 꽃잎같이 입을 봉(封)하고
머언 봄을 생각해도 좋다 아주 머언 봄을.


누이야, 이 봄엔 네게 피리를 주마.
옥(玉)처럼 깨끗하고 슬픈 하나의 피리를.
불어도 울지 않고 울어도 닿지 않는
저 하늘의 아지랑이 같은 아지랑이 같은......

.............................................................

'그리움' 이란 말을 표현하면 그리움이 된다고...
항상 곁에 있고, 늘 함께 있는데,
그리움이란 말이 가당치 않겠지.


하지만
옥보다 파란 하늘 위에
하얀 그리움이 군데군데 덕지덕지 붙었는데
저걸 뭐라고 할까?


옆에 있어도 늘 그리운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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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뿔

 

                         강신애
             

오늘밤 너와 함께 있고 싶어
비 때문이 아니야
풀냄새 때문도 아니야
나는 네 손끝 아니면
닫혀버리는 미모사.


귓속에 안개를 불어넣어줘
입속을 사막의 달빛으로 그득 채워줘
 

천년쯤 묻어둔 소금이야
너 없인 사악한 가루일 뿐이야
머리칼 속에
네 눈물을 떨어뜨려줘
 

소금에 눈물을 섞으면
깨지지 않는
푸른 물방울 보석이 되는 연금술
 

한순간, 아름다운 뿔에 찔려
영원한 흉터를 지니고 살아간들 어떻겠어?
...........................................................

절정의 끝에서 뿜어지는
푸른 독이
붉은 핏속에 퍼진다.


온 정신이 아득하다.
삶의 의미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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