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어놓은 스타킹
나희덕
지치도록 달려온 갈색 암말이
여기 쓰러져 있다
더 이상 흘러가지 않을 것처럼
생의 얼굴은 촘촘히 그물 같아서
조그만 까그라기에도 올이 주르르 풀려 나가고
무릎과 엉덩이 부분은 이미 늘어져 있다
몸이 끌고 다니다 벗어 놓은 욕망의
껍데기는 아직 몸의 굴곡을 기억하고 있다
의상을 벗은 광대처럼 맨발이 낯설다
얼른 집어 들고 일어나 물속에 던져 넣으면
달려온 하루가 현상되어 나오고
물을 머금은 암말은
갈색 빛이 짙어지면서 다시 일어난다
또 다른 의상이 되기 위하여
밤새 갈기는 잠자리 날개처럼 잘 마를 것이다
...............................................................
입김도 서릿발처럼 엉겨붙을 것 같은 날
하늘은 그리움 한 조각 찾을 것도 없이
시리도록 푸르다.
텅 빈 하늘 그 공간에
어떤 것도 덧칠되어 있지 않아서 시리다.
아까부터 시려오던 볼은
까마득히 지나쳐
이미 얼어붙은 어느 시간
마룻턱에서 술취한 아비에게
고막이 터지도록 맞은 따귀 때문이었고,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파오는 귓바퀴는
지금 저 하늘처럼 푸르던 어느 날
살벌한 한기가 뼛속까지 저미던 겨울 밤
박박머리의 청년이
발가벗겨진 채로 연병장을 굴렀던 때문이었다.
어느 새
낙엽이 한 두께 쌓인 바닥을 걷어 보면
한 생애 푸르렀던 것들 모두
버석거리는 소리가 날 것이다.
오늘은 버석거리는 낙엽들을 한 자루 긁어 모아
마음껏 태워 볼 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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