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고향


                   이시영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참새떼 왁자히 내려앉는 대숲마을의
노오란 초가을의 초가지붕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토란 잎에 후두둑 빗방울 스치고 가는
여름날의 고요 적막한 뒤란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추수 끝난 빈 들판을 쿵쿵 울리며 가는
서늘한 뜨거운 기적 소리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빈 들길을 걸어 걸어 흰 옷자락 날리며
서울로 가는 순이 누나의 파르라한 옷고름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아늑한 상큼한 짚벼늘에 파묻혀
나를 부르는 소리도 잊어버린 채
까닭 모를 굵은 눈물 흘리던 그 어린 저녁 무렵에도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마음의 고향은
싸락눈 홀로 이마에 받으며
내가 그 어둑한 신작로 길로 나섰을 때 끝났다
눈 위로 막 얼어붙기 시작한
작디작은 수레바퀴 자국을 뒤에 남기며
.............................................................

어느해 겨울,
차디 찬 술 한잔 목구멍에 털어넣고
눈물 반쯤 섞어
목이 잠기도록 밤이 새도록
이 시를 중얼거렸다.


하얗게 쌓인 눈 위를 휘청대며 걸었던
내 젊은 날 방황의 어지러운 발자취를,
그 쓰디 쓴 기억을 좇아본다.


아득히 멀어져 이제는 너무 희미해져버린
그 시간 속 어디에도 내 마음의 고향은 없었다.


그래, 사랑이란 무엇이겠나?

낙화, 첫사랑


                      김선우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등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

믿음의 바탕에는 개체 상호의 온전함이 있습니다.
그 온전함이 신뢰의 바탕이지요.
그리고 나서야 사랑이 온전하게 싹트는 것이지요.


이젠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에 믿음과 기대를 심어야 합니다.
온전한 사랑을 위해서는 말입니다.

 

비록 첫 사랑은 한 철 꽃이 피고 사라지듯

그렇게 훌쩍 왔다 갔을지라도......

'명시 감상 4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광섭... 저녁에  (0) 2013.01.21
이시영... 마음의 고향  (0) 2013.01.17
박재삼... 어떤 귀로(歸路)  (0) 2013.01.16
김종목... 그런 사랑으로 살다 가고 싶다  (0) 2013.01.16
정호승... 술 한잔  (0) 2013.01.11

어떤 귀로(歸路)


                                 박재삼


새벽 서릿길을 밟으며
어머니는 장사를 나가셨다가
촉촉한 밤이슬에 젖으며
우리들 머리맡으로 돌아오셨다.


선반엔 꿀단지가 채워져 있기는커녕
먼지만 부옇게 쌓여 있는데,
빚으로도 못 갚는 땟국물 같은 어린것들이
방안에 제멋대로 뒹굴어져 자는데,


보는 이 없는 것,
알아주는 이 없는 것,
이마 위에 이고 온
별빛을 풀어 놓는다.
소매에 묻히고 온
달빛을 털어 놓는다.
..............................................................

어디 고단하지 않은 생이 있던가?
그래, 어떤 말로 그 생을 다 얘기 할 수 있겠는가?


네 말소리 기울일 귀가 있어 얼마나 다행이냐?
네 목소리 전할 입이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누군가 네 얘기 들어줄 사람있으면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그래, 이제 다 말해보거라.

'명시 감상 4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시영... 마음의 고향  (0) 2013.01.17
김선우... 낙화, 첫사랑  (0) 2013.01.17
김종목... 그런 사랑으로 살다 가고 싶다  (0) 2013.01.16
정호승... 술 한잔  (0) 2013.01.11
문태준... 모닥불  (0) 2013.01.11

그런 사랑으로 살다 가고 싶다


                                                김종목


깊은 강물이 아니라
얕은 강가를 흐르는 맑은 물처럼
그렇게 가난하게 살면서도


눈도 맑게 마음도 깨끗하게
얕은 강물처럼 흐르고 싶다


흐르는 강물을 거스르지 않듯
흐르는 세월에 몸을 맡겨 둔 채


하루의 노동만큼 먹고 마시고
주어진 시간만큼 평안을 누리고
그러다 오라하면 가면 그만인 인생


굳이 깊은
강물처럼 많은 것을 거느리고
많은 것을 품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저 졸졸졸
흐르는 얕은 강가에서
누구든 손발을 씻을 수 있고


새와 짐승들도
마음 놓고 목을 축일 수 있는
그런 사랑으로 살다 가고 싶다
.............................................................................

요즘 '비우기', '내려 놓기' 등의 단어를 이곳 저곳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힐링(healing)'이 큰 화두다.
그만큼 요즘 세상 사는 모양새가 복잡하고 힘이 든다는 얘기다.


오늘 우연히 길을 지나가다가 지인에게 책을 한 권 받았다.

가만히 책을 훑어보는데

내가 요즘 매일같이 생각하고 기도하는 내용이 고스란히 적혀있다.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이나 마음이,

내 행동과 삶의 방향이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다시금 확인한다.

'명시 감상 4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선우... 낙화, 첫사랑  (0) 2013.01.17
박재삼... 어떤 귀로(歸路)  (0) 2013.01.16
정호승... 술 한잔  (0) 2013.01.11
문태준... 모닥불  (0) 2013.01.11
김선우... 꽃, 이라는 유심론  (0) 2013.01.10

술 한잔

 

                  정호승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

이번 겨울은 왜 이리 추운거냐?


말도 안되는 섭씨 영하 15도, 영하 18도가 며칠 째 계속 된다.
한강 물도 다 얼었고,
10여일째 쌓인 눈은 그대로 얼어붙어 빙판이 되었다.
하기사 어디 얼어붙은 것이 날씨뿐인가?


경제도 얼어붙었고, 정치도 얼어붙었다.
사회도 얼어붙었고, 문화도 얼어붙었다.
시장도 얼어붙었고, 공장도 얼어붙었다.
굳이 따지고 보면, 겨울나기 준비를 제대로 못한 탓이다.


겨울 오기 전에
이불 빨래도 미리 해 두고,
옷장 정리도 미리 해 뒀어야 했다.
쌀도 넉넉히 사 두고,
장작도 열심히 패서 쌓아 뒀어야 했다.
문틈도 막아 두고,
문짝도 단단히 달아뒀어야 했다.


이번 겨울은 왜 이리 추우냐고 할 일이 아니었다.

모닥불


                 문태준


비질하다 되돌아 본
마당 저켠 하늘


벌레가 뭉텅, 뭉텅
이사 간다


어릴 때
기름집에서 보았던
깻묵 한 덩어리, 혹은


누구의 큰 손에 들려 옮겨지는
둥근 항아리들


서리 내리기 전
시루와 솥을 떼어
하늘 이불로 둘둘 말아


밭두렁길을 지나
휘몰아쳐가는
이사여,


아, 하늘을 지피며 옮겨가는
따사로운 모닥불!
..........................................................

몇 해동안 쌓아두었던 여러가지 잡동사니를 정리하다가,
이렇게 쓸모없는 많은 물건들을 갖고 있었음에 놀랐다.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내 마음자리 역시 마찬가지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과
쓸데없는 근심거리, 잡다한 상념들로 머릿속이 복잡하다.


아주 기본적으로
자기 주변을 정갈하게 하는 일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잘 정돈해 두는 일이
결국 나를 세상에 보낸 신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크게 한 숨을 들이키고 내뱉는다.
말끔하게 손 발 씻고, 목욕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가만히 두 손 모으고,
오늘 이 소중한 하루를 허락하신 분께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꽃, 이라는 유심론


                         김선우


눈앞에 열 명의 사람이 푸른 손을 흔들며 지나가도
백 명의 사람이 흰 구름을 펼쳐 보여도
내 눈엔 그대만 보이는


그대에게만 가서 꽂히는
마음
오직 그대에게만 맞는 열쇠처럼


그대가 아니면
내 마음
나의 핵심을 열 수 없는


꽃이,
지는,
이유,
.............................................................

무엇인가를 준비한다는 것이
마음자리를 준비하는 것이 전부겠구나.


언제나 마음자리를 정갈하게 하면,
언젠가 예쁘게 차려질 상을 고스란히 받겠구나.


비록 지금은
나를 알아보고 찾는 이가 없다해도...

'명시 감상 4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호승... 술 한잔  (0) 2013.01.11
문태준... 모닥불  (0) 2013.01.11
강영은... 연주암 오르는 길  (0) 2013.01.07
오인태... 시가 내게로 왔다  (0) 2013.01.03
김춘수... 분수(噴水)   (0) 2012.12.13

연주암 오르는 길


                              강영은


커다란 바위 위 민달팽이 한 마리
오가는 등산객들의 발자국 소리에 아랑곳 않고
꼼짝없이 앉아 있다
아니다, 전속력으로 움직이고 있는 달팽이를
내 몸의 속도가 측량하고 만 것인데
달팽이도 제 몸을 스쳐 지나간 나를
바람이거나 햇빛의 결로 생각할지 모른다
하루를 천년처럼 천년을 하루처럼 제 몸을 밀어
달팽이가 당도한 저, 등속도의 삶 속에는
몇 억 광년의 길을 달려온 별빛도
가만히 제 빛을 내려놓고 있으리라
삶의 방향을 트는 몸 밖의 표면장력 때문일까
한참을 가다 뒤돌아보니
달팽이 대신 달팽이가 지나 온 길들이
바위를 꽉 붙들고 있다
이제, 저 바위가 뒹굴거나 구르면서
제 몸에 새겨진 길들을 비워내리라
계곡을 따라 여기저기 흐르는 핸드폰 소리
문명의 소리도 이파리처럼 무성하게 우거진
관악산, 연주암 오르는 길,
배낭을 짊어지고 땀방울을 흘리는 사람들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정상을 향한다
속도로 꽉 차 있다
..................................................................

그래, 분명한 건,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성이다.
빠른 목표 달성이 목적이 되는 게 삶이 아니라,
그 삶의 과정이 중시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인 것 같다.


어떤 이는 하루를 감사하며 살기가 너무 어렵단다.
돈이 없고, 건강이 없고, 사랑이 없고, 행복이 없단다.
남들 다 있는 데, 내겐 없단다.


거저 부여받은 이 수많은 신의 은혜에도 삶을 감사할 줄 모른다
공기도 물도 햇볕도 육신도 모두 거저 주셨는데...
살라고, 맘껏 살아보라고...


앞을 잘 보고 살아야 한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명시 감상 4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태준... 모닥불  (0) 2013.01.11
김선우... 꽃, 이라는 유심론  (0) 2013.01.10
오인태... 시가 내게로 왔다  (0) 2013.01.03
김춘수... 분수(噴水)   (0) 2012.12.13
이은상... 사랑  (0) 2012.11.3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