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신경림
생전에 아름다운 꽃을 많이도 피운 나무가 있다.
해마다 가지가 휠 만큼 탐스런 열매를 맺은 나무도 있고,
평생 번들거리는 잎새들로 몸단장만 한 나무도 있다.
가시로 서슬을 세워 끝내 아무한테도 곁을 주지 않은 나무도 있지만,
모두들 산비알에 똑같이 서서
햇살과 바람에 하얗게 바래가고 있다.
지나간 모든 날들을 스스로 장미빛 노을로 덧칠하면서.
제각기 무슨 흔적을 남기려고 안간힘을 다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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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한 점, 비 한방울 없어 보이는 푸른 하늘엔 햇볕 가릴 구름조차 드물다.
무엇이든 다 태워버릴 기세로 따갑도록 내리쬐는 여름 한낮 볕에
큰 화분이 넘치도록 자란 과꽃이며 백일홍 꽃이 하얗게 타버렸다.
맥 없이 축축 처진 화초들이 안스러워 서둘러 물을 대주려니
언제 맺힌지도 모를 땀방울이 먼저 짧은 구랫나루 타고 뚝뚝 떨어지고
금세 소낙비라도 맞은양 등판이 전부 흥건히 젖었다.
오늘은 가지마다 잔뜩 매달린 붉은 만냥금 열매를 다 따주고 시든 잎이며 가지도 다 정리해줘야겠다.
먹지도 못할 농익은 열매들 매달고 있기도 만만치 않을 테고,
메마른 잎이며 마른 가지도 어지간히 귀찮을 테고,
늦 봄에 꽃 떨어져 이제 갓 맺힌 어린 초록 열매들도 잘 키워야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