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


                     김선우


내 기억 속 아직 풋것인 사랑은
감꽃 내리던 날의 그애
함석집 마당가 주문을 걸 듯
덮어놓은 고운 흙 가만 헤치면
속눈썹처럼 나타나던 좋.아.해
얼레꼴레 아이들 놀림에 고개 푹 숙이고
미안해 - 흙글씨 새기던
당두마을 그애
마른 솔잎 냄새가 나던


이사오고 한번도 보지 못한 채
어느덧 나는 남자를 알고
귀향길에 때때로 소문만 듣던 그애
아버지 따라 태백으로 갔다는
공고를 자퇴하고 광부가 되었다는
급행열차로는 갈 수 없는 곳
그렇게 때로 간이역을 생각했다
사북 철암 황지 웅숭그린 역사마다
한그릇 우동에 손을 덥히면서
천천히 동쪽 바다에 닿아가는 완행열차


지금은 가리봉 어디 철공일 한다는
출생신고 못한 사내아이도 하나 있다는
내 추억의 간이역
삶이라든가 용접봉,불꽃,희망 따위
어린날 알지 못했던 말들
어느 담벼락 밑에 적고 있을 그애
한 아이의 아버지가 가끔씩 생각난다
당두마을,마른 솔가지 냄새가 나던
맴싸한 연기에 목울대가 아프던.
..............................................................................

동네에서 말썽쟁이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땜통 억만이는

곤지암 계곡에서 물을 많이 마시고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중동에 밤 일을 나가야만 했던 수남 엄마는

만취해서 돌아온 어느 새벽녘

연탄가스를 잔뜩 마시고 누워있던

수남이를 영영 깨우지 못했다.

왼팔에 쇠갈고리를 달고 있던 호룡이 삼촌은

늘 호룡이를 때렸다.

비바람이 무척 불어 닥치던 어느 날

마당 한 가득 피가 흥건했던 그 날,

이후로 호룡이도 호룡이 삼촌도 다시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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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驛)

                     한성기

 

푸른 불 시그낼이 꿈처럼 어리는
거기 조그마한 역이 있다


빈 대합실에는
의지할 의자 하나 없고
이따금
급행열차가 어지럽게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아득한 선로위에
없는 듯 있는 듯
거기 조그마한 역처럼
내가 있다
...............................................................

자욱한 안개 사방에 내려앉은
서릿발도 바짝 날을 세운 어스름 새벽

 

도무지 따스한 기운을 찾을 길 없는
아득하게 멀게만 보이는 불빛 하나,

 

제 덩치보다 제법 부풀려진 검은 그림자
얼어붙은 찬 공기를 서늘하게 가르며
쌔~앵 지나쳐 간다.

 

귀청을 찢을 듯한 소음과
머리 속까지 울리는 진동,


소란도 잠시,
그저 스쳐 지나는 것.
눈이
아려 온다.

간이역
                   신경림


배낭 하나 메고
협궤철도 간이역에 내리다
물이 썰어 바다는 먼데도
몸에 엉키는 갯비린내
비늘이며 내장으로 질척이는 수산시장
손님 뜸한 목로 찾아 앉으니
처녀적 점령군 따라 집 떠났다는
황해도 아줌마는 갈수록 한만 늘어
대낮부터 사연이 길다
갈매기가 울고
뱃고동이 울고
긴 장화로 다리를 감은
뱃사람들은 때도 시도 없이 술이 취해
유행가 가락으로 울고
배낭 다시 들쳐메고 차에 오르면
폭 좁은 기차는 마차처럼 기우뚱대고
차창으로 개펄이 긴
서해바다 가을이 내다보인다
......................................................................

아직 휴가지를 정하지 못했다.
바다를 갈까, 산으로 갈까.
아이들과 집사람까지 모두 네식구가 떠나야하는 여행준비는
언제나 복잡하고 번거롭다.


문득 아무 때나 어디로든 떠날 수 있었던
젊은 날을 추억해 본다.

그래, 이번엔 아무 곳이나
발길 닿는대로 가봐야겠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은
실행되기도 어렵겠지만

우리 가족 그 누구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간이역

 

                   황금찬

 

지금 이 간이역에
머무르고 있는
완행열차의 출발 시각이
임박해오고 있다.


출발 시각을 앞에 두고
언제부턴가
화차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간이역에 머물렀던
열차들은
한결같이 어제의 구름이 되고 말았다.


지금 차가 떠나고 나면
모든 것들은
또 그렇게 구름이나
강물로 흘러가고 만다.


갈매기의
긴 날개가
하늘 가득히
펄럭이고 있다.


어느 역을 향해
지금 기차는
또 출발하는 것이다.


그 역의 이름을
누가 알고 있을까?

.......................................................

영겁의 세월 속에서
지금 우리의 삶은 의미없을만큼 작다.
모든 것은 구름이나 강물처럼
그저 흘러가고, 멀어지고, 사라진다는 것


생각해보면... 우리의 생은
가는 순서도 없고,
기다리는 일도 없으며,
이별의 시간, 출발의 시간이
언제인지도 모른다.


언젠가부터 그 시간이 임박해오고,
조금씩 흔들릴 뿐...


천만다행으로 가까워오는 시간을 우린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지나버린 그 간이역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고,
지나가버린 그 시간 또한 좀처럼 기억나지 않는다.


신의 선물!
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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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불빛

                                   김진경

 

산 아래 펼쳐진 불빛 자욱하다
언젠가
저 불 켜진 골목 어딘가에
너와 함께 서있었다
낮은 처마 밑으로 새나오는 불빛
오래 바라보며
간절하게
그 작은 불빛 하나 이루고 싶었다
그 때 첫 키스를 나누었던가
기억이 멀어 생각나지 않는데
그 오래 남은 간절함으로 따뜻한
세상의 불빛

 


빈 집 
                                  김진경

 

무너진 토담 한 귀퉁이, 햇빛이 빈 뜨락을 엿보는 사이 작고 흰 꽃을 흔들며 개망초떼가 온 집안을 점령한다.

썩은 지붕 한구석이 무너진 외양간, 비쳐드는 손바닥만한 햇빛 속에도 개망초는 송아지처럼 순한 눈을 뜨고 있다.

개망초떼들이 방심한 채 입 벌린 빈집을 상여처럼 떠메고 일어선다.

하얗게 개망초꽃 핀 묵정밭 쪽이 소란하다.
혹시 집 앞길로 사람들이 흘러가다가, 잠시 멈추어 내리기라도 한다면,

개망초들은 시치미를 떼고 서서, 햇빛 속에 흔들리리라.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빈집은 숲에 묻히겠지.
문득 개망초꽃 하나가 내 어깨에 햇빛의 따뜻한 손을 얹으려 한다.

나는 완곡히 이 위안을 사양한다.

내가 지금 귀기울이는 건 다른 소리이다.

사람의 기운이 이제 아주 떠나려는 듯 사랑방에서 두런두런거리기도 하고, 쇠죽 끓이는 냄새를 풍기기도 하고,

외양간에 쇠방울이 딸랑거리기도 하고, 누군가 쟁기며 삽날이 흙과 사람과 개망초꽃더미 사이에 내쉬고 들이쉬던 숨결을 가만히 어루만져 거두어들인다.

언뜻 구름의 그림자가 빈 뜨락을 스치고, 그의 헛기침 소릴 들었던가.

.............................................................................................................

개망초 꽃 그득 핀 빈집 뜰안을
담밖에서 바라보고 돌아서는 한 사내의 뒷모습
그 자리에 남은 개망초 꽃의 위안을
완곡히 사양하는 그의 어깨짓


멀어지고, 지워지고, 잊혀지고, 사라지고 나면
거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지나쳐 가면 멀어지고,
눈 앞에서 지워지고,
그렇게 잊혀지고,
어느 순간 사라진다.

 
애틋함과 간절함과
아쉬움과 그리움
모두...


구름의 그림자가 빈 뜰을 스치듯
바람이 옷깃을 스쳐 지나가듯
잠시
그 자리에 머물다 사라질 것이다.


짧은 첫 키스의 짜릿한 추억으로
오늘 밤 소주 한 잔을 기울이고
가녀린 촛불 하나를 밝힐까?
 

그렇게 깨끗이 비워내고, 흔들리다
흔들리다 잠이 들고
잠이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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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지는 날 

 

                                 홍수희

 

사랑이라고 다 사랑이 아니었구나
지천으로 피어 있던 너의 이름도
안아주고 싶었던 너의 슬픔도
눈꽃 같던 눈꽃 같던 너의 참회도
때로는 참을 수 없는 권태로 다가오느니
하늘은 저 하늘에 있는 게 아니었구나
내 마음에 또 다른 우주(宇宙)가 있어
그 곳에 비 내리고 바람이 불면
그 곳에 천둥 울고 벼락이 치면
그리움에 커 가던 나무 한 그루
산산이 부서지어 숯이 되느니
뜨락에 피던 꽃도 꽃이 아니었구나
눈물도 눈물이 아니었구나......

............................................................

 

한창 봄날이라 화창하고 화려한 날만 있더라 싶더니, 일요일내내 흐리고 비가 내리더군요.

어느새 지나가버린 봄날의 화려하고 빛나던 세상이 그저 허망한 잔치로 끝나고,

뒤돌아보고 기억하려해도 좀처럼 떠오르질 않네요...

그렇다면 시인의 말처럼 꽃도 꽃이 아니었고, 사랑도 사랑이 아니었나보군요.

 

어제는 밤늦도록 우뢰가 성화를 대더니 오늘은 다시 차분해졌습니다. 언제그랬냐는 듯...
우리의 사랑도, 우리의 슬픔도, 우리의 고독도, 우리의 삶도

늘 제자리인 것 같지만 끊임없이 흘러가고,

흐르는 것 같지만 하염없이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 같지만

문득! 스쳐지나가는 것!

그런 것인가 봅니다...

오늘은 잠시 앉았다가,

하늘 한 번 올려다보고 한숨돌리면...

다시 일어나서

걸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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