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묻다


                        김사인


사람들 가슴에
텅텅 빈 바다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길게 사무치는 노래 하나씩 있다
늙은 돌배나무 뒤틀어진 그림자 있다


사람들 가슴에
겁에 질린 얼굴 있다
충혈된 눈들 있다


사람들 가슴에
막다른 골목 날선 조선낫 하나씩 숨어 있다
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 하나씩 있다
.........................................................

그 시절의 상처로 행여
내 맘 속에 아직 서러움이 남았나?


차마 주저앉아 울수밖에 없었던
그 길에서의 설움은
지나온 세월의 뒤안길로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아니 그러기를 바랐다.


어쩌면
눈물 한 방울만큼은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미소 한 모금만큼은 머금었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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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일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내게 살아야 할 하루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내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내 곁을 말없이 지켜주는 이가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말하지 않아도...
보이지 않아도...
그저 느낄 수만 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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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곤

                김사인


사람 사는 일 그러하지요
한세월 저무는 일 그러하지요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못하고
저물녘 봄날 골목을
빈 손만 부비며 돌아옵니다
......................................................................

우리 사는 일이 다 그러하지요.

바로 저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면서
그저 앞으로만 달려가고 있습니다.


안개라도 걷히면 그나마 나을텐데,
선택의 여지는 언제나 그리 많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제 갈 길 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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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뜻한 물

 

                                                             김사인

 


추운 하루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눈과 추위가 어쩌면 올 겨울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새삼 정겹게 느껴볼 여유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저녁 무렵에 따뜻한 물을 받아 놓고 세수를 하다가 문득,

물이 따뜻해진다는 것이 참 신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릇에 물을 담고 불을 때면 불의 정(精)이라고 해야 맞을 기운이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그야말로 불이 물속에 담기는 것입니다. ‘불이 든 물’이 바로 물의 따뜻함인 것이지요.

물에 손을 담그면 불기운이 손을 통해 내 몸으로 옮아오는 것이겠지요.

 
물론 물리학의 초보적인 상식으로 다 설명이 될 사소한 일일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관습화된 알음알이와 설명들이 순간의 싱싱한 신기함을, 작용 그 자체를 대신할 수 있는 건 아닐 겁니다.

실은 물이란 것도 손으로 만져보노라면, 참 신기하고 이상한 존재라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쨌든 따뜻한 물에 손을 담그면서, 기적이다 신비다 하는 것이

멀리 오묘한 구석에 숨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우리 생의 흔하고 하찮은 매 순간들,

천지간의 모든 유정과 무정들, 크고 작은 모든 인연이야말로 실은

기적이요 신비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됩니다. (전문)

지상의 방 한칸

 

                               김사인


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 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 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비는 재주 뿐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소리 사정 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

 

올겨울은 유난히 춥다.


올해도 어쩌면 내년도 힘들 것이다.

추운 겨울나기가 그렇고
우리의 하루살이가 그러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따뜻한 봄은 오고,
우리의 하루도 시작된다.


비록 지금은 어렵고 힘들지만
또 한 고비를 넘고


아마도 내일은 찬란한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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