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사랑으로 살다 가고 싶다


                                                김종목


깊은 강물이 아니라
얕은 강가를 흐르는 맑은 물처럼
그렇게 가난하게 살면서도


눈도 맑게 마음도 깨끗하게
얕은 강물처럼 흐르고 싶다


흐르는 강물을 거스르지 않듯
흐르는 세월에 몸을 맡겨 둔 채


하루의 노동만큼 먹고 마시고
주어진 시간만큼 평안을 누리고
그러다 오라하면 가면 그만인 인생


굳이 깊은
강물처럼 많은 것을 거느리고
많은 것을 품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저 졸졸졸
흐르는 얕은 강가에서
누구든 손발을 씻을 수 있고


새와 짐승들도
마음 놓고 목을 축일 수 있는
그런 사랑으로 살다 가고 싶다
.............................................................................

요즘 '비우기', '내려 놓기' 등의 단어를 이곳 저곳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힐링(healing)'이 큰 화두다.
그만큼 요즘 세상 사는 모양새가 복잡하고 힘이 든다는 얘기다.


오늘 우연히 길을 지나가다가 지인에게 책을 한 권 받았다.

가만히 책을 훑어보는데

내가 요즘 매일같이 생각하고 기도하는 내용이 고스란히 적혀있다.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이나 마음이,

내 행동과 삶의 방향이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다시금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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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돌을 보며


                     김종목


냇가에서 조약돌을 본다.
둥글고 예쁜 하얀 조약돌,
물의 부드러운 손으로
쓰다듬고 또 쓰다듬어
물무늬가 배도록 쓰다듬어 만든
저 둥글고 예쁜 조약돌.
끌이나 망치로는 만들 수 없는
부드러운 물의 손
부드러움이 만든 예쁜 돌,
툭툭 모가 난 성질의 돌들이
저렇게 부드러운 성품이 되었구나.
하루 이틀도 아니고
수십 년도 아니고
수천 수만 년을 견디면서 만든
저 한없는 참을성,
그리고 부드러운 사랑의 손길과 속삭임.
둥글고 예쁜 조약돌 위로
아이들과 아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부드러운 눈으로
부드러운 손길로
부드러운 속삭임으로
참고 따뜻하게 사랑했는지,
모난 돌들이 둥글게 되듯
오래 참고
오래 견디며 사랑했는지.

........................................................................

그저 모난 것을 망치로 두드리고

그저 모난 것을 끌로 깎으려 하진 않았는지

그리하여 깨뜨려 못쓰게 하진 않았는지 ‥‥

 

오늘도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의 손

아니, 내일도 모레도 부드럽게 쓰다듬을 물의 손

 

그 따스하고 정결한 손의 부드러움

그 온화한 속삭임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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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을 씻으며


                            김종목

 
발을 씻으며
문득 발의 고마움을 생각한다.
꽉 닫힌 구두 속에서
하루종일 견뎌낸 고마움을 생각한다.
얼굴이나 손처럼
밝은 곳에서 아름다운 것을 보고
좋은 것도 만져보고,
그러나 발은 다섯 개의 발가락을 새끼처럼 껴안고
구두의 퀘퀘한 어둠 속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외진 곳에서
흑진주 같은 까만 땀을 흘리며
머리와 팔과 가슴과 배를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하는구나.
별 관심도 가지지 않았던 발아
저녁마다 퇴근하여 씻기도 귀찮아했던 발아
너의 고마움이 왜 뒤늦게 절실해지는 걸까.
오늘은 발가락 하나하나를
애정으로 씻으면서
수고했다. 오늘도 고물차같은 이 몸을 운반하기 위하여
정말 수고했다.
나는 손으로 말했다.
손으로 다정하게 말했다.
...................................................................................

'수고했다...'

오늘도 입으로 말하지 못하고,

 

마음으로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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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의 강설(降雪)

    

                                     김종목

 

1.
어둡고 질긴 밤이
연탄 난로 위에서 지글거릴 즈음,
우리는 술잔을 앞에 놓고
한 시대의 비밀을 꺼집어내고 있었다.
녹쓴 젓가락 끝에 집히는
이 시대의 아픔을 나누어 들고
확실하게 다가오는 절망이라든가
혁명적인 우리의 피도 이야기하고
서로의 눈 속에 숨은 비밀도
손바닥을 뒤집듯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미리 준비된 약간의 눈물을 보이기도 하고
그저 목이라도 조르고 싶은 우리의 가난을
탁탁 소리내어 떨어내기도 하면서
한 시대의 울음을 어루만지듯
뻘꺽뻘걱 취하도룩 술을 마셨다.


2 .
약한 바람 앞에서도
자주 삐꺽거리는 싸구려 대포집에서
가장 고귀한 우리의 대화는
때로는 위험한 어둠을 동반하기도 하였다.
애국자가 어떻고 독재자가 어떻고
그저 주먹을 쾅쾅 내리치던
그해 겨울 밤,
우리는 추위 속에서 떨고 있는 自由를 보았다.
연탄 난로 곁에서 피에 젖은 눈물을 흘리며
사람들의 귀를 피하고
저 순하디 순한 눈발의 귀를 피하면서
우리의 대화는 날카롭게 움직였다.


3 .
잠시 침묵이 흐르고,
우리는 몸에 흐르는 애국심을 정돈하였다.
지껄이고 또 지껄여도
술집을 나오면 변함없이 눈이 내리고
한 겨울 내내 눈이 내리고,
우리의 가슴은 늘 비어 있었다.
순결한 눈은 우리의 가슴을 적시며
신음하는 우리의 한 세대를
內面 깊숙이 잠재우고 있었다.
우리가 찾는 부끄러운 단어들이
눈의 나라에 천천히 묻혀가고 있음을 보면서
歸家길에 날리는 내 슬픈 영혼은
그해 겨울 내내 잠들지 못했다.
...................................................................................

 

 

작금의 우리 상황이 50년전과 크게 다르지 않음이 안타깝다.
오늘도 그때처럼 눈이 내릴 듯하다.

 기다림

 

                        김종목
 

기다린다는 것은

잠시 허망에 빠지는 일이다.

그가 오리라는 확신이 차츰 허물어지며

통로 저쪽 문 밖까지 나가 선 나의 간절함이

차츰 아픔으로 기울어진다.

쓸쓸한 음악이 흐르는 찻집,

석양이 얼비치던 창도 커피색이다.

오리라는 기약이 있었던가

잠시 나의 기억을 의심해 본다.

시간은 굴삭기처럼 가슴을 파고 들고

점점 내 앞자리의 빈 공간이 더 커진다.

쓴 커피를 다시 한 잔 시키고

부질없이 성냥개비를 분질러 숫자를 세고

지나간 날들이 다 헐릴 때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기다린다는 것은

숨통을 끊는 일이다.

때로는 기쁨으로 가슴 설레다가

차츰 커피잔이 식듯 아픔과 쓰라림과 절망으로 이어지는

형벌 같은 것.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절절함 속에서

모질게도 단련되고 길들여지는지.

오늘도 나는 주체할 수 없는 아픔을 견디며

기다림을 놓아둔 채 찻집을 나선다.

저 어두운 밤하늘의 별처럼

꺼질 듯 꺼질 듯한 사랑을

애틋하게, 애틋하게 바라보면서.

....................................................

가슴이 저려옵니다.

당신을 애타게 기다렸던 그 시간들,

그 시간을 돌이킬 수 없는 이 순간들,

가물가물 꺼져가는 그 아픈 기억들,

가공할만한 시간의 파괴력으로

그 기억들이 꺼져가고 있지만,

아직 내 가슴이 이토록 시린 까닭은

아직 이 세상에서 함께 숨쉬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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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드는 밤의 연가

 

                                    김종목
 
1
창(窓)밖엔 스산한 가을 달이 이제 막 오동잎에 내려와 한 자로 쌓인다. 포롬한 달빛이 눈부시게 흐르는 이 밤, 베개는 끝없이 높아만 가고 너를 그리워하는 마음 속 명도(明度)는 저 달빛보다 더 밝구나. 시나브로 도지듯 눈시울에 걸려오는 너의 그 고운 옷고름 속 희디흰 율감(律感)이 밤마다 해일(海溢)이 되어 나의 몸을 덮는다. 만나면 헤어지는 이치를 내 어이 모를까마는 너의 그 비수(匕首) 같은 언약이 때로는 그믐달로 내 가슴에 박혀 푸르르 푸르르 떠는 것을 잊을 수가 없구나.

 2

속절없는 세월도 바람지듯 떨어진다. 떨어져 멀리멀리 사라지듯 너도 또한 그러하냐. 그리움의 화살을 무수히 쏘다가 도리어 내가 맞아 쓰러지는 몰골이 처량하지도 않느냐. 저 무심한 달빛은 낭랑히 너의 얼굴로 떠오르지만, 마음 속 그 깊은 연(緣)줄은 차마 끊을 길이 없구나. 미나리 같은 풋풋한 너의 귀는 다 어디로 떠나 보내고 나의 하소연은 어이 듣지 못하느냐. 아니, 너의 그 불씨 같은 밝은 눈은 어디에 묻어 두고 깜깜하게 꺼진 나의 가슴을 녹 쓴 화통처럼 언제까지 놓아 두려느냐.

 3

부질없는 짓이다. 달도 기울고 만지면 시꺼먼 먹물이라도 뚝뚝 묻어날 어둡고 막막한 토방(土房)은 그대로 감방이 아니냐. 삼백 예순 다섯 날을 열 번 백 번 곱하여 잠 못 든대도, 이미 떠난 마음을 어디에서 만나랴. 낙엽 지는 소리가 갈기갈기 찢어져, 밤마다 아픔으로 다가와 깊디 깊은 소(沼)를 만든다. 내가 누운 이대로 그대 있는 곳으로 낙엽지듯 떨어져 한 소절 음악이 되거나 달빛이 되거나 어둠이라도 되고 싶구나.

 4

눈 먼 기별을 기다리는 가슴에 어두운 비가 내린다. 눅눅히 다가오는 그리움은 이제는 보이지 않고 내가 나를 면벽(面壁)하고 밤을 지샌다. 후둑후둑 떨어지는 흐느낌은 다 가라앉고 오금이 저리도록 불타는 아픔도 이제는 다 삭아 손끝으로 헤집으면 그대로 재가 될 그림자만 남았다. 오로지 불념(佛念)에만 이내 몸을 맡기고 사리로 앉은 나의 마음도 ------, 아아 어느 새 제방(堤防)이 터지듯 강물이 되어 너에게로 끝없이, 끝없이 흐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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