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귀로(歸路)


                                 박재삼


새벽 서릿길을 밟으며
어머니는 장사를 나가셨다가
촉촉한 밤이슬에 젖으며
우리들 머리맡으로 돌아오셨다.


선반엔 꿀단지가 채워져 있기는커녕
먼지만 부옇게 쌓여 있는데,
빚으로도 못 갚는 땟국물 같은 어린것들이
방안에 제멋대로 뒹굴어져 자는데,


보는 이 없는 것,
알아주는 이 없는 것,
이마 위에 이고 온
별빛을 풀어 놓는다.
소매에 묻히고 온
달빛을 털어 놓는다.
..............................................................

어디 고단하지 않은 생이 있던가?
그래, 어떤 말로 그 생을 다 얘기 할 수 있겠는가?


네 말소리 기울일 귀가 있어 얼마나 다행이냐?
네 목소리 전할 입이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누군가 네 얘기 들어줄 사람있으면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그래, 이제 다 말해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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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꽃을 보면서


                      박재삼


우리집 뜰에는
지금 라일락꽃이 한창이네.
작년에도 그 자리에서 피었건만
금년에도 야단스레 피어
그 향기가 사방에 퍼지고 있네.


그러나
작년 꽃과 금년 꽃은
한 나무에 피었건만
분명 똑같은 아름다움은 아니네.
그러고 보니
이 꽃과 나와는 잠시
시공(時空)을 같이한 것이
이 이상 고마울 것이 없고
미구(未久)에는 헤어져야 하니
오직 한번밖에 없는
절실한 반가움으로 잠시
한자리 머무는 것뿐이네.
아, 그러고 보니
세상 일은 다
하늘에 흐르는 구름 같은 것이네.
.........................................................................................

라일락 향기는 무척이나 진하고 향그러웠다.
고마운 봄의 향취
그 진한 여운은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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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노래


                               박재삼


사랑하는 한 사람을 찾는 그 일보다
크고 소중한 일이 있을까 보냐.
그것은
하도 아물아물해서
아지랑이 너머에 있고
산 너머 구름 너머에 있어
늘 애태우고 안타까운 마음으로만
찾아 헤메는 것뿐
그러다가 불시에
소낙비와 같이
또는 번개와 같이
닥치는 것이어서
주체할 수 없고
언제나 놓치고 말아
아득하게 아득하게 느끼노니.
...............................................

바람결에 스친 듯
깜빡 잠자며 꿈꾼 듯
후다닥 소낙비 지나간 듯


한때의 사랑이
어제의 삶이
지나가버렸다.


열정이라도 조금 남았더라면 좋으련만


그렇게 커다랗고 소중하던
사랑의 불씨조차
가물가물 기억저편에만
별빛처럼 희미하게 깜빡일 뿐


바싹 마른 내 가슴엔
흔적조차 남아있질 않아서
허전하고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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