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노래


                               박재삼


사랑하는 한 사람을 찾는 그 일보다
크고 소중한 일이 있을까 보냐.
그것은
하도 아물아물해서
아지랑이 너머에 있고
산 너머 구름 너머에 있어
늘 애태우고 안타까운 마음으로만
찾아 헤메는 것뿐
그러다가 불시에
소낙비와 같이
또는 번개와 같이
닥치는 것이어서
주체할 수 없고
언제나 놓치고 말아
아득하게 아득하게 느끼노니.
...............................................

바람결에 스친 듯
깜빡 잠자며 꿈꾼 듯
후다닥 소낙비 지나간 듯


한때의 사랑이
어제의 삶이
지나가버렸다.


열정이라도 조금 남았더라면 좋으련만


그렇게 커다랗고 소중하던
사랑의 불씨조차
가물가물 기억저편에만
별빛처럼 희미하게 깜빡일 뿐


바싹 마른 내 가슴엔
흔적조차 남아있질 않아서
허전하고
시리다.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원태연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그렇게 따뜻한 눈물이 나올 만큼 나를 아껴줬던 사람입니다.

우리 서로 인연이 아니라서 이렇게 된 거지

눈 씻고 찾아 봐도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따뜻한 눈으로  나를 봐줬던 사람입니다.

어쩜 그렇게 눈빛이 따스했는지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살아도 이 사람은 이해해주겠구나 생각 들게 해주던...

 

자기 몸 아픈 것보다 내 몸 더 챙겼던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사랑해 주었던 한 사람입니다.

내가 감기로 고생할 때

내 기침 소리에 그 사람 하도 가슴 아파해

기침 한 번 마음껏 못하게 해주던 그런 사람입니다.


지금 그 사람 나름대로 얼마나 가슴 삭히며 살고 있겠습니까?

자기가 알텐데...

내가 지금 어떻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을 텐데...

언젠가 그 사람 이런 얘길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멀리 있어야 한다고

멀리 있어야 아름답다고...


웃고 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모릅니다

내가 왜 웃을 수 없는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과 하도 웃어서 너무너무 행복해서

몇 년치 웃음을 그 때 다 웃어버려서

지금 미소가 안 만들어진다는 걸

웃고 살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모릅니다.

인연이 아닐 뿐이지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그 사람 끝까지 나를 생각해 주었던 사람입니다

마지막까지 눈물 안보여 주려고 고개 숙여 얘기하던 사람입니다.

탁자에 그렇게 많은 눈물 떨구면서도

고개 한 번 안들고 억지로라도 또박또박 얘기 해주던 사람입니다.

울먹여 얘기해서 무슨 얘긴지 다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 사람 정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알 수 있게 해주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그렇게 따뜻하고 눈물이 나올 만큼 나를 아껴줬던 사람입니다.

우리 서로 인연이 아니라서 이렇게 된거지,

눈 씻고 찾아봐도 내게는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인연이 아닐 뿐이지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정말 내게는 그런 사람 없습니다.


7월은 치자꽃 향기 속에


                                  이해인


7월은 나에게
치자꽃 향기를 들고 옵니다


하얗게 피었다가
질 때는 고요히
노란빛으로 떨어지는 꽃


꽃은 지면서도
울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도 모르게
눈물 흘리는 것일 테지요?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내가 모든 사람들을
꽃을 만나듯이
대 할 수 있다면


그가 지닌 향기를
처음 발견한 날의 기쁨을 되새기며
설레 일 수 있다면


어쩌면 마지막으로
그 향기를 맡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꽃밭이 될 테지요?


7월의 편지 대신
하얀 치자 꽃 한 송이
당신께 보내는 오늘
내 마음의 향기도 받으시고


조그만 사랑을 많이 만들어
향기로운 나날 이루십시오
.......................................................

 

달콤한 치자꽃 향이 솔솔 풍기는 듯 합니다.
수녀님의 말처럼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


조그만 사랑을 많이 만들어
향기로운 나날을 이룰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소나기 같이, 이제는 가랑비 같이


                                               서정윤


소나기같이 내리는 사랑에 빠져
온몸을 불길에 던졌다
꿈과 이상조차 화염 회오리에 녹아 없어지고
나의 생명은 잠시 반짝이다 사라지는
불꽃이 되어 이글거렸다.


오래지 않아 불꽃은 사그라지고
회색빛 흔적만이 바람에 날리는
그런 차가운 자신이 되어 있었다.
돌아보면
누구라도 그 자리에선 그럴수밖에 없었겠지만
순간의 눈빛이 빛나는 것만으로
사랑의 짧은 행복에 빠져들며
수많은 내일의 고통과 바꿀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폭풍지나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자리
나의 황폐함에 놀란다
이미 차가워진 자신의 내부에서
조그마한 온기라도 찾는다
겨우 이어진 목숨의 따스함이 고맙다


이제는 그 불길을 맞을 자신이 없다
소나기 보다는 가랑비 같은 사랑
언제인지도 모르게 흠뻑 젖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반갑다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잔잔함을 지닌 채
다가오는 가랑비
한없이 가슴을 파고드는 그대의
여린 날갯짓이 눈부시다
은은한 그 사랑에 젖어있는 미소가
가랑비에 펼쳐진다

................................................................

지나간 것에 대한 후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다시 밝아올 날을 준비하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폭풍처럼 지나간 시간은 지나고 나면

밝은 햇빛 눈부시게 빛날 날을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한

절정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내일 또 가랑비가 내리면

다시 그 눈부심에 미소지을 여유가 남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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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살의 독서


                          윤희상


행과 행 사이에서
잠시, 스산한 마음을 놓쳤다
어쩌면 살아갈 날들이
살아온 날들보다 많지 않으리라


지금 읽는 책을
언제 또 다시 읽을 수 있을까


이제부터 읽는 책들은 이별이다

.........................................................

오늘, 한 권의 책을 보다가 문득

내가 이 책을 다시 볼까 싶었다.

이사를 하는데 책을 자그마치 일곱상자나 내다 버렸다.

다시는 볼 일이 없는 책이라서가 아니고

그동안 다시 본 일이 없는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친구와 이런 저런 수다를 주고 받다가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자하기에

참 좋은 얘기인 것 같긴 했다.

삶을 대하는 자세로 보면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어쩌면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는

내일이 올지 안올지를 몰라서 아니라

그동안 내일을 생각해보지 못해서 아닐까?

엄마야 누나야


                       김소월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

시를 쓰는 것,

시를 읽는 것,

시가 왜 필요한지 알게 해준 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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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양희


벽에다 못 하나 박았다. 벽이 울렸다.
박힌 것은 못인데 벽이 다 울렸다.
그 소리 벽을 들어올렸다.
못 하나 받으려고 벽은 버텼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종일 못을 박았다.


벽에서 못 하나 뽑았다. 벽이 울렸다.
뽑힌 것은 못인데 벽이 다 울렸다.
그 소리 마음을 들어올렸다.
못 하나 보내려고 벽은 버텼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종일 못을 뽑았다.

..............................................

 

우연히 지하철 역 한켠에 붙은

천양희 시인의 시를 한 편 보게 되었습니다.

'바다' 라는 제목의 시였는데,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와 닿는 느낌이어서

천양희 시인의 시를 둘러 보았습니다.

이리 저리 둘러서 시인의 이야기를 듣다가

가슴 한켠이 시릿해졌습니다.

 

사람의 일이 다 못 박고 못 뽑는 일인가 봅니다.

들고 나는 자리는 없어지는데

그 느낌은 남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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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것은


                                             백석


포근한 봄철날 따디기의 누굿하니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두 많이 나서 흥성흥성할 것이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친하니 싸다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러 다닐 것과
내 손에는 新刊書 하나도 없는 것과
그리고 그 <아서라 世上事>라도 들을
유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내 눈가를 내 가슴가를
뜨겁게 하는 것도 생각한다

.......................................................

따디기 : 한낮의 뜨거운 햇빛 아래 흙이 풀려 푸석푸석한 저녁무렵.
누굿한 : 여유있는.
살뜰하던 : 너무나 다정스러우며 허물없이 위해주고 보살펴 주던.
........................................................

시인 백석 님의 시입니다.
1988년 해금되기 이전에는 절대 볼 수 없었던,
일반인들은 봐서는 안되는 시였지요.
이유야 국가보안법(?) - 그때도 이런 이름이었나? -
암튼 그런 것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그의 시는 대부분 국가보안과는 거리가 먼
푹석하고 누굿하면서도 살뜰하면서도 뜨거운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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