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노래


                       이상국

 

우리 어머니
처녓적 자시던 약술에 인이 박여
평생 술을 자셨는데
긴 여름날 밭일하시면서
산그늘 샘물에 술을 담가놓았다가 드실 때면
나도 덩달아 마시고는 했지요
그리고 어린 나는 솔밭에서
하늘과 꽃과 놀며 소를 먹이고
어머니는 밭고랑에서 내 모르는 소리를 저물도록 했지요


지금 내 노래의 대부분은
그 흙 묻은 어머니의 소릿자락에 닿아 있지요
.....................................................................................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산골짝엔 물이 마르고 기름진 문전옥답 잡초에 묻혀있네


고향무정이라는 노래를 듣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이 기막힌 정서는 도대체 어디에 닿았는지
뭉클하게 콧등을 쥐어박고 눈물을 쏙 빼더니만
가슴 한복판에 서늘하게 내려앉는다.
오늘은 목조차 메어 노래고 뭣이고 다 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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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절반


                             이병률


한 사람을 잊는 데 삼십 년이 걸린다 치면
한 사람이 사는 데 육십 년이 걸린다 치면
이 생에선 해야 할 일이 별로 없음을 알게 되나니


당신이 살다 간 옷들과 신발과
이불 따위를 다 태웠건만
당신의 머리칼이 싹을 틔우더니
한 며칠 꽃망울을 맺다가 죽는 걸 보면
앞으로 한 삼십 년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아는 데
꼬박 삼십 년이 걸린 셈


이러저러 한 생의 절반은 홍수이거나 쑥대밭일진대
남은 삽십 년 그 세월 동안
넋 놓고 앉아만 있을 몸뚱어리는
싹 틔우지도 꽃망울을 맺지도 못하고
마디 곱은 손발이나 주무를 터


한 사람을 만나는 데 삼십 년이 걸린다 치면
한 사람을 잊는 데 삽십 년이 걸린다 치면
컴컴한 얼룩 하나 만들고 지우는 일이 한 생의 일일 터
 

나머지 절반에 죽을 것처럼 도착하더라도
있는 힘을 다해 지지는 마오
..................................................................................

사소한 탑쌓기 놀이를 해도 쌓기는 어렵지만
무너뜨리는 것은 한순간.
도미노를 세우는 데는 시간이 제법 걸리지만
넘어뜨리는 것은 순식간.
말끔히 닦고 깨끗이 치우는 것은 수고롭지만
더러워지는 것은 잠깐.


그렇다고 대충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얼마나 중하고 귀한 삶인데.


무엇이든 기꺼이 행할 일이다.
기꺼이는 기적을 만드는 주문이 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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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김종길


해마다 새해가 되면
매화분엔 어김없이 매화가 핀다.
올해는 바로 초하룻날 첫 송이가 터진다.


새해가 온 것을 알기라도 한 듯,
무슨 약속을 지키기라도 하듯,
설날에 피어난 하얀 꽃송이!


말라 죽은 것만 같은 검은 밑둥걸,
메마르고 가냘픈 잔가지들이
아직 살아 있었노라고,


살아 있는 한 저버릴 수 없는 것을
잊지 않았노라고, 잊지 않았노라고,
매화는 어김없이 피어나는데,


밖에선 눈이 내리고 있다.
매화가 핀 것을 알기라도 한 듯,
밖에선 매화빛 눈이 내리고 있다.


오천년도 너에겐
한나절 낮잠에 불과했던가.
네게도 소리칠 마지막 절규는 있었던가.
....................................................................

사는 게 지겨워 차라리 죽고 싶었다.
꺼억 꺼억 울다가, 지금 죽어서
한 오백년쯤 지옥에서 살아야 한다면
이렇게 슬플까 싶었다.


아쉬울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지은 죄도 없이
차마 접을수 없는 생애


행여 올 봄엔 꽃이 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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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백석


나는 이 마을에 태어나기가 잘못이다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나는 무서워 오력을 펼 수 없다
자 방안에는 성주님
나는 성주님이 무서워 토방으로 나오면 토방에는 다운구신
나는 무서워 부엌으로 들어가면 부엌에는 부뜨막에 조앙님
나는 뛰쳐나와 얼른 고방으로 숨어 버리면 고방에는 또 시렁에 데석님
나는 이번에는 굴통 모롱이로 달아가는데 굴통에는 굴대장군
얼혼이 나서 뒤울안으로 가면 뒤울안엔느 곱새녕 아래 털능구신
나는 이제는 할 수 없이 대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대문간에는 근력 세인 수문장
나는 겨우 대문을 삐쳐나 바깥으로 나와서
밭 마당귀 연자간 앞을 지나가는데 연자간에는 또 연자당구신
나는 고만 디겁을 하여 큰 행길로 나서서
마음 놓고 화리서리 걸어가다 보니
아아 말 마라 내 발뒤축에는 오나가나 묻어 다니는 달걀구신
마을은 온데간데 구신이 돼서 나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

-----------------------------------------------------------

오력 : 오금, 무릎의 구부리는 안 쪽.
디운귀신 : 지운귀신, 땅의 운수를 맡아본다는 민간의 속신.
조앙님 : 조왕님, 부엌을 맡은 신, 부엌에 있으며 모든 길흉을 판단함.
데석님 : 제석신, 무당이 받드는 가신제의 대상인 열두 신, 한 집안 사람들의 수명, 곡물, 의류, 화복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본다 함.
굴통 : 굴뚝.
굴대장군 : 굴때장군, 키가 크고 몸이 남달리 굵은 사람. 살빛이 검거나 옷이 시퍼렇게 된 사람.
얼혼이 나서 : 정신이 나가 멍해져서.
곱새녕 : 초가의 용마루나 토담 위를 덮는 짚으로, 지네 모양으로 엮은 이엉.
털능귀신 : 철륜대감. 대추나무에 있다는 귀신.
연자간 ; 연자맷간. 연자매를 차려 놓고 곡식을 찧거나 빻는 큰 매가 있는 장소.
연자당귀신 : 연자간을 맡아 다스리는 신.
회리서리 : 마음 놓고 팔과 다리를 휘젓듯이 흔들면서
.............................................................................................................................................

설 지나고는 감기의 위세가 대단하다.
젊은 년 하나 자빠뜨려 온종일 방구석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하더니만
젊은 녀석도 마저 하나 자빠뜨려 방바닥을 설설 기게했다.
간신히 사무실이라고 기어나와 일 하겠다고 쭈그리고 앉은 년놈들조차
골골대고 비실거리긴 매한가지다.


어쩌면 인간은 이 바이러스로 멸망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목이 자라모가지마냥 쏙 기어들어가고
목구멍에선 괜한 헛기침이 자꾸 올라오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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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를 치우며


                               도종환


창 반쯤 가린 책꽂이를 치우니 방안이 환하다
눈앞을 막고 서 있는 지식들을 치우고 나니 마음이 환하다
어둔 길 헤쳐간다고 천만근 등불을 지고 가는 어리석음이여
창 하나 제대로 열어놓아도 하늘 전부 쏟아져 오는 것을
................................................................................................

어두컴컴한 방 한 구석에서 벽보고 돌아 앉아
내가 앉은 자리의 처량함을 원망할 일이 아니다.
얼른 돌아 앉아 자리를 털고 일어서서
창문을 열어젖히고 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을 맞을 일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사유의 편협함과
우리가 안다고 하는 지식의 얄팍함과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하는 소유의 사소함을
알고 인정하고 감사하고 정진할 일이다.


선한 것만 남는다.
행한 것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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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도


                 이생진


저 섬에서
한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 눈으로 살자
............................................................................................

아직은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두 아이의 아빠로 10년,
길지도 않았고 남을 것도 없었던 내 아비의 삶. 당신의 아들로 26년,
아직도 철딱서니가 없다 싶은 명삼이 녀석의 친구로 36년,
강원도 삼척 탄광촌에서 난 감자바우로 아등바등 45년을 살았다


궁금하다. 나는 앞으로
어디서, 어떤 이름으로,
얼마나 살게 될까?


하루를 살아도, 아니
지금 이 순간 떠나도
남길 것 없게 살고 싶다.


차디 찬 겨울 하늘
그리움 하나 남김 없다.
사악
눈을 베인다.

골목에도 사람은 살지 않는다
―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7


                                                  이문재

 
그래도 키 낮은 골목에는 사람이 아직
살겠거니 했다, 북한산 그늘이 깊은 수유리
목을 빼면 셋방 가구 등속이 보이는 골목들
고개 숙이며 드나드는 사람들 속에는 아직
사람 같은 그 무엇인가 깃들여 뜨겁거나
때로 덜컹댈 것이었지만, 살 부벼댈 오래 된
마음들 있겠거니 했다, 해서 등꽃 파랗게 피면
삶은 아직 삶아진 것이 아니라고
감나무에서 감 덜 익은 것 떨어지면, 그게
생명을 생명이게 하는 솎아냄이라고
올 사람 없지만 현관에 불 밝히곤 했다
공휴일 저녁, 잔광이 훤하게 수유리를
덮고, 쉰 두부도 파는 아저씨 요령 소리
골목에 자욱해서, 반바지 입고 골목길
도는데, 아, 늙은 아버지 손등 힘줄 같은
골목길에 사람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열려 있는 모든, 키 작은 창문에서는
주말연속극만 왕왕거리며 넘쳐 나왔다, 키 낮은
골목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현관 불을
꺼버렸다, 마감뉴스 시그널이 들려온다
골목에도 벌써부터 저런 것들만
살고 있는 것이었다
.........................................................................

너와 내가 다름을 인정하고
저마다 타고 나는 것이 같지 않음을 알고
구별하는 지혜


구별하지 못하고 행했던 수많은 선택의 오류
대가(代價)를 치러야 했던 시간
결코 헛되지 않으나 되풀이 해서는 안된다.


항상 지혜를 구하고 실천해야 한다.
사람답게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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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표 
 

                 복효근
 

문장을 완성하고 마침표를 찍는다
끝이라는 거다
마침표는 씨알을 닮았다
하필이면 네모도 세모도 아니고 둥그런 씨알머양이란 말이냐
마침표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란 뜻이다
누구의 마침표냐
반쯤은 땅에 묻히고 반쯤은 하늘 향해 솟은
오늘 새로 생긴 저 무덤
무엇의 씨알이아는 듯 둥글다
또 하나의 시작이라는 거다
..........................................................

어쩌면
앎은 그렇게 온다


창문 틈새로 비치는 봄볕 온기처럼 오고,
바람에 실려 오는 이름 모를 꽃내음처럼 오고,
먼 숲속에서 들려오는 가뭇한 새소리처럼 오고,
이른 새벽 풀잎에 내린 영롱한 이슬처럼 온다.


어쩌면
들고 나는 숨처럼
삶의 순간 순간의 무수한 궤적 위에
점 하나가 되고
점 하나 하나가 빛이 되고,
일순간 무수한 삶의 진리가 눈앞 가득 반짝인다.


어쩌면
앎은 그렇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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