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윤준경 
  
어머니는 밥밖에 모르는
여자였다

 

밥 먹었니?
밥 먹어라
더 먹어라

 

갖은 나물에 더운 국
뜨거운 밥 한 그릇 듬뿍
먹이시는 일 뿐
남자나 사랑 따위는
당초에 모르시는 분이었다

 

치매 걸려
세상일 다 잊으신 뒤에도
잊지 않으시던 말, 밥
밥 먹고 가라

 

언제부턴가 나도
밥밖에 모르는 여자가 되었다

 

아들 딸 며느리 불러놓고
밥 먹어라할 때에
양양한 목소리
열사날에 한번쯤
목을대 빳빳이 일어서는
밥심

...................................................................................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던가요?

우리 삶에서 당장 입에 풀칠이라도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던 시절...
그 세월을 살아낸 것이 참 용하다 싶기도 하지만...
그 세월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치열했을지는 짐작조차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그 시간들이 모두 지나고 지금의 우리는 또 다른 복잡한 문제와
견디기 힘든 어려움과 부딪치고 또 좌절하고 헤메이면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어찌보면 그때와 별다르지 않은 삶이지요...

그제서야 우리는 부모를, 어른들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고, 또 세상이 바뀐다해도...
우린 또 살아가지요...

양양하게, 빳빳이...
밥심으로...^^...

옛날 노래를 듣다 

                                          이성목

낡은 전축 위에 검은 판을 올려놓는다
전축은 판을 긁어 대며 지나간 시대를 열창하지만
여전히 노래는 슬프고, 잡음은 노래가 끝나도록 거칠다
소란스럽던 시절의 노래라서 그런 것일까
마음과 마음 사이에 먼지가 끼어서 그런 것일까
몇 소절은 그냥 건너뛰기도 한다 훌쩍 뛰어 넘어
두만강 푸른 물이 삼각지 로터리에 궂은 비로 내리고
눈보라치는 흥남부두로 소양강 처녀가 노 저어 가기도 하면서
경계와 경계를, 음절과 음절을, 이념과 이념을
덜컹 뛰어넘는 저 몇 개의 세선들
한때 우리가 그렇게 노래를 불렀던 것처럼
노래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낡은 전축이 요동을 친다
긁히고 패인 한 시대를 털커덕 털커덕 넘어서며
판을 뒤집자고
이젠 뒤집어 노래하자고
.................................................................................


슬프게도 작금의 여러 상황이
이 보잘 것 없는 나라를 어지럽게 합니다.
이 좁고 어눌한 마음을 끓어오르게 합니다.


웬만하면 신경쓰지 않으려 하는데
눈 감고 못 본척, 귀막고 못 들은 척 하려는데
자꾸만 자꾸만, 점 점 더 황당무개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우리 나라,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내가
너무 창피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바로 요즘이 그렇습니다.

그 사막을 다 마셔야 한다

 

                                                김신영

 
가시 이파리에 비가 떨어지고

선인장의 발목 뿌리를 적시고

모래언덕을 적시고 사막을 두루 적실 때

한 방울 물도 네 뿌리 곁에 두어

모두 네 몸속에 가두어야 한다

일 년을 기다릴 수 있는 것은

가시로 진화한 네게 내리는 축복

네 몸속에 머물러 굵은 줄기를

한껏 키울 수 있는 축복

열두 달 사막의 열풍을 견뎌야 하느니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뜨거운 열 두 때를 견뎌야 하느니

바람이 실어오는 모래의 따가운 매를 견뎌야 하느니

그 사막을 다 마셔 네 철창에 가두어야 한다

그래 삼백 예순날 다음의 비를 기다릴 수 있다

오늘의 물은 삼백예순날이지만

삼백예순날 보다 오늘은 더더욱 길어

물을 긷는 수고가 네 근성이 된다

사막의 열풍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한다 할지라도

오늘 너는 그 사막을 다 마셔야 한다

...........................................................................

오늘 하루를 사는 일, 견뎌내는 일이 그리 만만치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열심히 살아야 하고,

살아있음이 곧 축복이라는 것.

누구나 다 세상을 살아야할 이유를 갖고 태어나며,
누구나 견딜 수 있을만큼의 지혜를 갖게 되는 것.

 

젊은 시인의 호기 어린 말처럼

오늘 그 사막을 다 마셔버릴 듯이,

내일 당장 죽을 것처럼,

한 세상 열심히 살아봄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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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이가 있던 자리

 

                                  이윤훈

 
울타리 한켠 낡은 잿빛 나무판자에서
옹이 하나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고
아이가 물끄러미 밖을 내다본다
그 구멍에서 파꽃이 피었다 지고
분꽃이 열렸다 닫힌다
쪼그리고 앉아 늙은 땜쟁이가
때워도 새는 양은냄비 솥단지를 손질하고
겨울의 궤도에 든 뻥티기가
등이 시린 이들 사이로 행성처럼 돈다
꿈이 부풀기를 기다리며
코로 쭉 숨을 들이키는 이들
홀쭉한 자신의 위장을 닮은 자루를 들고 서 있다
이승의 끝모서리에 이를 때마다 나는
아이의 그 크고 슬픈 눈과 마주친다
나는 아픈 기억이 빠져나간 그 구멍으로
저켠 길이 굽어드는 곳까지 내다본다
누가 잠자리에 들 듯 목관에 들어가 눕는다
뚜껑이 닫히고 어둠이 쿵 쿵 못질하는 소리
문득 옹이 하나 내 가슴에서 빠져나가고
세상 한 곳이 환히 보인다

.............................................................................................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이윤훈' 시인의 시입니다.


가슴 한 켠 시린 구석,
뻥뚫린 구멍이 없는 가슴이 어디 있을까?


누구나 숙명처럼
그 구멍을 틀어막고 숨기고 산다.
구멍이 다시 뚫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라 믿고, 다짐도 해 본다.

 
옹이가 빠져나간 구멍을 통해
아픈 세월을 들여다보는 시린 마음이
내 가슴 어디였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생채기에
또 소금을 뿌린다.


이제는 덜 아프지만,
아니 참을만 하지만
가슴께 어딘가가 시리고 저려오는 곳
아, 또 그 자리.

 

 

 

세상의 불빛

                                   김진경

 

산 아래 펼쳐진 불빛 자욱하다
언젠가
저 불 켜진 골목 어딘가에
너와 함께 서있었다
낮은 처마 밑으로 새나오는 불빛
오래 바라보며
간절하게
그 작은 불빛 하나 이루고 싶었다
그 때 첫 키스를 나누었던가
기억이 멀어 생각나지 않는데
그 오래 남은 간절함으로 따뜻한
세상의 불빛

 


빈 집 
                                  김진경

 

무너진 토담 한 귀퉁이, 햇빛이 빈 뜨락을 엿보는 사이 작고 흰 꽃을 흔들며 개망초떼가 온 집안을 점령한다.

썩은 지붕 한구석이 무너진 외양간, 비쳐드는 손바닥만한 햇빛 속에도 개망초는 송아지처럼 순한 눈을 뜨고 있다.

개망초떼들이 방심한 채 입 벌린 빈집을 상여처럼 떠메고 일어선다.

하얗게 개망초꽃 핀 묵정밭 쪽이 소란하다.
혹시 집 앞길로 사람들이 흘러가다가, 잠시 멈추어 내리기라도 한다면,

개망초들은 시치미를 떼고 서서, 햇빛 속에 흔들리리라.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빈집은 숲에 묻히겠지.
문득 개망초꽃 하나가 내 어깨에 햇빛의 따뜻한 손을 얹으려 한다.

나는 완곡히 이 위안을 사양한다.

내가 지금 귀기울이는 건 다른 소리이다.

사람의 기운이 이제 아주 떠나려는 듯 사랑방에서 두런두런거리기도 하고, 쇠죽 끓이는 냄새를 풍기기도 하고,

외양간에 쇠방울이 딸랑거리기도 하고, 누군가 쟁기며 삽날이 흙과 사람과 개망초꽃더미 사이에 내쉬고 들이쉬던 숨결을 가만히 어루만져 거두어들인다.

언뜻 구름의 그림자가 빈 뜨락을 스치고, 그의 헛기침 소릴 들었던가.

.............................................................................................................

개망초 꽃 그득 핀 빈집 뜰안을
담밖에서 바라보고 돌아서는 한 사내의 뒷모습
그 자리에 남은 개망초 꽃의 위안을
완곡히 사양하는 그의 어깨짓


멀어지고, 지워지고, 잊혀지고, 사라지고 나면
거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지나쳐 가면 멀어지고,
눈 앞에서 지워지고,
그렇게 잊혀지고,
어느 순간 사라진다.

 
애틋함과 간절함과
아쉬움과 그리움
모두...


구름의 그림자가 빈 뜰을 스치듯
바람이 옷깃을 스쳐 지나가듯
잠시
그 자리에 머물다 사라질 것이다.


짧은 첫 키스의 짜릿한 추억으로
오늘 밤 소주 한 잔을 기울이고
가녀린 촛불 하나를 밝힐까?
 

그렇게 깨끗이 비워내고, 흔들리다
흔들리다 잠이 들고
잠이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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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지는 날 

 

                                 홍수희

 

사랑이라고 다 사랑이 아니었구나
지천으로 피어 있던 너의 이름도
안아주고 싶었던 너의 슬픔도
눈꽃 같던 눈꽃 같던 너의 참회도
때로는 참을 수 없는 권태로 다가오느니
하늘은 저 하늘에 있는 게 아니었구나
내 마음에 또 다른 우주(宇宙)가 있어
그 곳에 비 내리고 바람이 불면
그 곳에 천둥 울고 벼락이 치면
그리움에 커 가던 나무 한 그루
산산이 부서지어 숯이 되느니
뜨락에 피던 꽃도 꽃이 아니었구나
눈물도 눈물이 아니었구나......

............................................................

 

한창 봄날이라 화창하고 화려한 날만 있더라 싶더니, 일요일내내 흐리고 비가 내리더군요.

어느새 지나가버린 봄날의 화려하고 빛나던 세상이 그저 허망한 잔치로 끝나고,

뒤돌아보고 기억하려해도 좀처럼 떠오르질 않네요...

그렇다면 시인의 말처럼 꽃도 꽃이 아니었고, 사랑도 사랑이 아니었나보군요.

 

어제는 밤늦도록 우뢰가 성화를 대더니 오늘은 다시 차분해졌습니다. 언제그랬냐는 듯...
우리의 사랑도, 우리의 슬픔도, 우리의 고독도, 우리의 삶도

늘 제자리인 것 같지만 끊임없이 흘러가고,

흐르는 것 같지만 하염없이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 같지만

문득! 스쳐지나가는 것!

그런 것인가 봅니다...

오늘은 잠시 앉았다가,

하늘 한 번 올려다보고 한숨돌리면...

다시 일어나서

걸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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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기도

 

                                         도종환

 

날려보내기 위해 새들을 키웁니다
아이들이 저희를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당신께서 저희를 사랑하듯
저희가 아이들을 사랑하듯
아이들이 저희를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저희가 당신께 그러하듯
아이들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며
거짓없이 가르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아이들이 있음으로 해서
아이들이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게 해주십시오
힘차게 나는 날개짓을 가르치고
세상을 올곧게 보는 눈을 갖게 하고
이윽고 그들이 하늘 너머 날아가고 난 뒤
오래도록 비어 있는 풍경을 바라보다
그 풍경을 지우고 다시 채우는 일로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저희를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저희가 더더욱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

 

스승의 날 찾아뵐 스승이 없는 가엾은 새입니다...

너무 멀리 날아왔을까요?...

행여 인사드릴 스승님이 계시면 꼭 안부 전화 드리세요^^

좋은 하루, 즐겁고 멋진 하루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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