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무의 저편


                    김선우


웃통 벗고 수박을 먹는데
발가락에 앉았다 젖무덤을 파고드는
파리 한마리
손사래도 귀찮아 노려보는데


흡, 부패의 증거인지도 몰라


눈치 챈 걸까 이제 아무도 못 믿게 돼버린 걸
구겨진 발톱, 숱하게 생발을 앓아온 희망에게
내밀 수 있는 건 소화제 몇 알
비굴하지 않게 예스라고
말할 줄 알게 된 것도 다 들통나버린 걸까


질기고 안전한 아랫배 속에서
냄새를 피우는 영혼의 끌탕
(왜, 노출된 내장만이 추한 것일까)


섹스하고 싶어,라는 말 대신
미치도록 사랑해 널,
그의 내부도 부패중인 걸까
어지러워, 나의 절정에
왕성하게 생식하는 저 황홀한 잡균들!

.................................................................

문득 내 젊은 날의 오만과 편견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 시절 내 판단과 사고의 틀은 과연 어땠던가?


불과 10여년 전 이 시를 읽었을 때,
그녀의 관능적인 언어와 감각적인 상징에 열광했었는데,
오늘은 왜 이리 값싼 유희처럼 느껴지는지...


그녀의 시가 단 한 글자도 변하지 않았을텐데,
내 태도는 어딘가 변해있다.
자칫...
마음이 닫히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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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 옛길


                        김선우


폭설주의보 내린 정초에
대관령 옛길을 오른다
기억의 단층들이 피워올리는
각양각색의 얼음꽃


소나무 가지에서 꽃숭어리 뭉텅 베어
입 속에 털어넣는다, 火酒―


싸아하게 김이 오르고
허파꽈리 익어가는지 숨 멎는다 천천히
뜨거워지는 목구멍 위장 쓸개
십이지장에 고여 있던 눈물이 울컹 올라온다
지독히 뜨거워진다는 건
빙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
붉게 언 산수유 열매 하나
발등에 툭, 떨어진다


때로 환장할 무언가 그리워져
정말 사랑했는지 의심스러워질 적이면
빙화의 대관령 옛길, 아무도
오르려 하지 않는 나의 길을 걷는다
겨울 자작나무 뜨거운 줄기에
맨 처음인 것처럼 가만 입술을 대고
속삭인다, 너도 갈 거니?

....................................................................

두 볼이 날카로운 그 무엇으로 긁어내듯 따갑고 쓰라리다.
숨을 들이마시기가 무섭게 콧 속을 지나 목줄을 타고
서리발이 쫙 서는 느낌...


순간, 목줄이 어는 듯 아프고 목이 탄다.
뒷머리를 무엇인가가 콱 찌르고,
뜨끔하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인다.


칠흑같은 어둠과 찬 공기 무겁게 내려앉은 새벽,
그보다 더 무거워진 발길을 옮기며
칼날같은 세찬 바람을 가르고,
영영 끝날 것 같지않은 아득한 시간을 제껴가며,
눈길을 터벅터벅 걸어 

산을 오른다.


시간은 흐르고,
길도 지나가고,
새벽을 지나 아침이 밝아오고,
언젠가는 산마루에 오른다.


다시 내려가야 하는 길,
죽어도 못 오를 것 같았던 길을 따라 여기까지 왔는데...

또 내려 간다.
다시는 못 오를 것 같던 길을 따라
이제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그런데...
지금, 가고 싶다.

 민둥산

 

                                 김선우


세상에서 얻은 이름이라는 게 헛묘 한채인 줄 
진즉에 알아챈 강원도 민둥산에 들어 
윗도리를 벗어올렸다 참 바람 맑아서 
민둥한 산 정상에 수직은 없고 
구릉으로 구릉으로만 번져 있는 억새밭 
육탈한 혼처럼 천지사방 나부껴오는 바람속에 
오래도록 알몸의 유목을 꿈꾸던 빗장뼈가 열렸다 
환해진 젖꽃판 위로 구름족의 아이들 몇이 내려와 
어리고 착한 입술을 내밀었고 
인적 드문 초겨울 마른 억새밭 
한기 속에 아랫도리마저 벗어던진 채 
구름족의 아이들을 양팔로 안고 
억새밭 공중정원을 걸었다 몇번의 생이 
무심히 바람을 몰고 지나갔고 가벼워라 마른 억새꽃 
반짝이는 살비늘이 첫눈처럼 몸속으로 떨어졌다 
바람의 혀가 아찔한 허리 아래로 지나 
깊은 계곡을 핥으며 억새풀 홀씨를 물어 올린다 몸속에서 
바람과 관계할 수 있다니! 
몸을 눕혀 저마다 다른 체위로 관계하는 겨울풀들
풀뿌리에 매달려 둥지를 튼 벌레집과 햇살과
그 모든 관계하는 것들의 알몸이 바람 속에서 환했다

더러 상처를 모신 바람도 불어왔으므로
햇살의 산통은 천년 전처럼

그늘 쪽으로 다리를 벌린 채였다
세상이 처음 있을 적 신께서 관계하신
알 수 없는 무엇인가도 내 허벅지 위의 햇살처럼
알몸이었음을 알겠다 무성한 억새 줄기를 헤치며
민둥한 등뼈를 따라 알몸의 그대가 나부껴 온다
그대를 맞는 내 몸이 오늘 신전이다

.......................................................................

 

그녀의 감각적인 시어를 따라잡으려면
늘 한 번씩 다시 되새김질 해 곱씹어야 한다.
한 번 훑고 지나가서는 아랫도리만 부풀어 오를 뿐
그 감각을 제대로 깨우지 못한다.

 

한 번은 시작이라서 짧고 강하게...
두 번째 쯤에 제대로 힘을 써 볼 요량이라면
한마디 한마디 끊어보아야 한다.

서서히, 찬찬히, 세심히, 가만히 가만히 살펴야 한다.

 

오늘 그녀를 조심스럽게 다시 한 번 마주해 봐야겠다...

 

잠시 덮은 눈거풀 위에 민둥산 새하얗게 펼쳐진 억새밭이 아릿하다.

봄 날

 

                                 김남극

 

간장 냄새에 발이 푹 빠지는
장독대 뒤
꽤나무꽃 피었다.
살결이 쉽게 짓물러
미간을 스치는 바람에도 떨어져
막 잎 내미는 무잔대
잔 손 속으로 포갰다.
댓돌에 앉아
단지를 열고 고추장을 푸는 어머니
근육도 말라붙은 종아리를 보다가
청춘의 향기와 빛깔이 뒤란 가득 술렁이던 시절과
한순간 지는 꽃잎 따라
울컥 울음이 나던 시절을 생각하다가
집안에 들어와
오래된 횃댓보를 펼쳤다.
매화나무는 근육질인데
꽃은 엉성하고
그 위에
어슬픈 꾀꼬리 한 마리
가래 섞인 울음소리 들린다.
다시 결 따라 접어놓고
엉덩이가 시린 방바닥에 누웠다.

봄햇살은 마당가에서 낄낄거리며 자기들끼리 놀다가
슬레트 지붕 위로 올라간다 .
어둠이 문지방에 들었다.
꽤나무꽃 밤새 꿈 속에서
횃댓보 가지런히 결 따라 진다.
수(繡)마다 보풀 인다
마음을 건너 어머니에게로 가는
부풀이는 수(繡) 자국들

 

 

봄날 2

                                   김남극

 

햇살 깔깔대며 양철지붕을 구르는 봄날
할머니들 식은 밥덩이처럼 모여 앉아 감자 눈 딴다.
건네는 말소리에선 가끔
지난 겨울 강가 얼음이 천둥처럼 갈라지던 소리들
연일 내리던 눈발이 뒤란을 서성이던 소리들
솔가지 위 눈덩이 사소한 바람에 쏟아지듯
수화기에서 쏟아지던 자식들 물기 묻은 목소리들
비명 길게 끌며 골짜기 끝을 지나 산으로 치달리던
설해목 쓰러지는 소리들, 그렇게 마른 별처럼

진 노인네들 요령소리
이따금 황사 따라 감감하면서 가슴 막히게
두런두런

초승달 양철지붕에 내려 앉히는 소리 속에서
감자 씨눈 트는 소리
잔설 그림자 기웃거리는 개울물 소리 속에서
피라미 지느러미 터는 소리
소리가 소리를 끌고
또 소리를 끌고 ...

..........................................................................

 

인간내면의 풍경화 시인이라고 표현해도 될까요?
김남극님의 시입니다.
따스하고 온화한 봄날 풍경이 어딘지 모르게 어느 한녘이 서늘하고 소슬함을,

우리의 삶 어느 한 녘이 언제나 그러함을,

어찌 이리 잘 그려낼 수 있을까요?

강원도 냄새가 물씬 풍기는 글을 보니

강원도 깊은 산골짜기 어느 숲길을

터벅터벅 걷던 내 뒷모습이 보이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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