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이형기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하던 청춘이
어느덧 잎지는 이 호숫가에서
호수처럼 눈을 뜨고 밤을 새운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같이 떨던 것이
이렇게 공허해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 속에 지니는 일이다
...........................................................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고
같은 곳을 향해 함께 갈 것이다.


잠시도 멈춰있지 않을 것이다.
계속 가고 있을 것이다.


기다림은
그 자리에 멈춰 서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거리를
그리고 공간을
지켜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Someday, We'll live together... Someday...
멀리서 감미로운 목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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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초


                            오인태


사연 없이 피는 꽃이 어디 있겠냐만
하필 마음 여린 이 시절에 어쩌자고
구구절절 피어서 사람의 발목을 붙드느냐.
여름내 얼마나 속끓이며
이불자락을 흥건히 적셨을 길래
마른 자국마다 눈물 꽃이 피어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치대느냐.
꽃이나 사람이나 사는 일은
이렇듯 다 구구절절 소금 같은 일인 걸
아, 구절초 흩뿌려져 쓰라린 날


독한 술 한잔 가슴에 붓고 싶은 날
............................................................

땀과 눈물
흙과 바람
열정과 정염
인내와 고독
그리고 기다림, 또 기다림


어느 꽃이라고 그냥 뜻 없이 피겠는가?
어느 누구의 사랑이 그냥 이루어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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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향기


                     장지현

 

꽃 진 자리
사랑의 열매를 맺듯이
아픔없이 이룰 사랑이 있어라


긴 세월 기다림의 꽃망울
따스한 햇살
기다리는 추억의 빛바램이어라


하얀 기다림에
꽃눈은 눈꺼플 깜박이듯
깊은 상념에 빠져 흐름을 찿아본다


바람은 묻지 않아도
때를 알아 흔들어 주듯이


그 사랑꽃
피우기 위해 만남의 길은 멀어도


살포시 고개 숙인 등 결에
하얀 그리움이 내려 앉아 찾았던
사랑을 나눌 순간포착에 맺히는 너를 ! 
...............................................................................

 

만남의 길이 멀고 멀 듯,

함께 걷는 길도 그러하다.
첫 만남의 그 생생했던 기억이 빛바랠 즈음,
앞서 걷는 네 어깨에 가만히 얹히는

꽃 잎 한 장.


묻지 않아도 모두 알고,
말하지 않아도 모두 열어주는
마음의 문이 어디 있을까?


그저 기다리고 또 기다려

피운 꽃
그 꽃이 지고 있다.


꽃 피는 시간이 일년이면 몇 날이나 될까?
우리 삶도 그렇게 짧디 짧은 순간을

마음 다 하여 사랑하면 그만인 것을.
내년에 다시 필 약속을 믿고
또 기다리고 기다려야 함이 숙명인 것을.


기다림이 어찌 달고 맛있으랴.
그 사랑 꽃 한 송이 피워보자고
멀고 먼 길을

돌아 돌아 걷고

또 걷고
하염없이 기다린 시간이 얼마인데.

 

그 마음이 얼마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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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리는 우리가 됩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가 없습니다
 

요행히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가 됩시다
 

사랑하던 이를 미워하게 되는 일은
몹시 슬프고 부끄럽습니다
 

설혹 잊을 수 없는
모멸의 추억을 가졌다 해도
한때 무척 사랑했던 사람에 대하여
 

아무쪼록
미움을 품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

다소 외지고
좁다란 길이라도 괜찮다.
내게 남은 길이
번잡스럽거나
소란스럽지 않았으면...
단 하루를 살아도

 기다림

 

                        김종목
 

기다린다는 것은

잠시 허망에 빠지는 일이다.

그가 오리라는 확신이 차츰 허물어지며

통로 저쪽 문 밖까지 나가 선 나의 간절함이

차츰 아픔으로 기울어진다.

쓸쓸한 음악이 흐르는 찻집,

석양이 얼비치던 창도 커피색이다.

오리라는 기약이 있었던가

잠시 나의 기억을 의심해 본다.

시간은 굴삭기처럼 가슴을 파고 들고

점점 내 앞자리의 빈 공간이 더 커진다.

쓴 커피를 다시 한 잔 시키고

부질없이 성냥개비를 분질러 숫자를 세고

지나간 날들이 다 헐릴 때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기다린다는 것은

숨통을 끊는 일이다.

때로는 기쁨으로 가슴 설레다가

차츰 커피잔이 식듯 아픔과 쓰라림과 절망으로 이어지는

형벌 같은 것.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절절함 속에서

모질게도 단련되고 길들여지는지.

오늘도 나는 주체할 수 없는 아픔을 견디며

기다림을 놓아둔 채 찻집을 나선다.

저 어두운 밤하늘의 별처럼

꺼질 듯 꺼질 듯한 사랑을

애틋하게, 애틋하게 바라보면서.

....................................................

가슴이 저려옵니다.

당신을 애타게 기다렸던 그 시간들,

그 시간을 돌이킬 수 없는 이 순간들,

가물가물 꺼져가는 그 아픈 기억들,

가공할만한 시간의 파괴력으로

그 기억들이 꺼져가고 있지만,

아직 내 가슴이 이토록 시린 까닭은

아직 이 세상에서 함께 숨쉬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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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 림 

                       강미정
        

-그대에게-


젖은 수건 속에 오이씨를 넣고

따뜻한 아랫목에 두었죠  

촉 나셨는지 보아라,

싸여진 수건을 조심조심 펼치면 

볼록하게 부푼 오이씨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입을 반쯤만 열고 있었죠

촉 나시려고 파르르 몸 떠는 것 같아서 

촉 보려는 내 마음은 얼마나 떨렸겠습니까  

조심조심 수건을 펼쳤던

저의 손은 또 얼마나 떨렸겠습니까

촉 나셨는지 보아라,

아부지 촉 아직 안 나왔슴더,

빛이 들지 않게 얼른 덮어 둬라,

빛을 담기 위해선 어둠도 담아야 한다는 것을

한참 뒤 나중에야 알았지만요 

그때는 빨리 촉 나시지 않는 일이 

자꾸만 펼쳐보았던 때문인 것 같아서

오래 들여다보았던 때문인 것 같아서

촉 날 때까지 걱정스레 내 마음을 떨었죠 

....................................................................

 

기다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얼마나 조심스럽고 조바심나는 일인지...
기다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아파야 했는지...
얼마나 많은 밤을 새워야 했는지...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을...
지나고 나면 후회만 남는 것을...

 

하지만 얼마나 가슴 두근거리는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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