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학교


                          문정희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해마다 어김없이 늘어가는 나이
너무 쉬운 더하기는 그만두고
나무처럼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늘 푸른 나무 사이를 걷다가
문득 가지 하나가 어깨를 건드릴 때
가을이 슬쩍 노란 손을 얹어놓을 때
사랑한다! 는 그의 목소리가 심장에 꽂힐 때
오래된 사원 뒤뜰에서
웃어요! 하며 숲을 배경으로
순간을 새기고 있을 때
나무는 나이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
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


뜨겁지도 맵지도 않은 아침 햇살이 천지에 번지고
햇발아래 푸르름은 끝없이 짙어만가고
생명의 해답일지도 모르는 초록 사이사이에서
각양각색의 꽃폭죽이 사방에서 연이어 펑펑 터진다.


한들한들 꽃을 흔드는 꿈결같은 바람을
온몸으로 감각하며
심장이 콩쾅콩쾅 뛴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자연이 그리고 생명이 주는 설렘은
조화롭고 완벽하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아침


'명시 감상 6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광규... 나 홀로 집에  (0) 2016.07.14
이외수...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0) 2016.07.14
유경환... 혼자 선 나무  (0) 2016.05.27
천상병... 길  (0) 2016.05.26
이시영... 어머니 생각  (0) 2016.04.27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


                                     문정희


가장 아름다운 것은
손으로 잡을 수 없게 만드셨다
사방에 피어나는
저 나무들과 꽃들 사이
푸르게 솟아나는 웃음 같은 것


가장 소중한 것은
혼자 가질 수 없게 만드셨다
새로 건 달력 속에 숨쉬는 처녀들
당신의 호명을 기다리는 좋은 언어들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저절로 솟게 만드셨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 속으로
그윽이 차 오르는 별빛 같은 것
..........................................................

어느 앵글로 언 땅을 뚫고 일어서는
새싹의 기운을 담아낼 수 있을까?
어느 화폭에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저 파란 하늘을 그려낼 수 있을까?


자연스러운 그러나
너무 아름답고 소중하며 사랑스러운
자연의 경이로움
그 고귀함
스스로 베풀어진 그러한 성찬

'명시 감상 5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종해... 그대 앞에 봄이 있다   (0) 2013.04.03
정호승... 봄 길  (0) 2013.04.02
이생진... 편지 쓰는 일  (0) 2013.03.19
천상병... 편지   (0) 2013.03.18
박인환... 어린 딸에게  (0) 2013.03.15

나무가 바람에게


                    문정희


어느 나무나
바람에게 하는 말은
똑같은가 봐


"당신을 사랑해."


그래서 바람불면 몸을 흔들다가
봄이면 똑같이 초록이 되고
가을이면 조용히 단풍드나봐
............................................................

모두가 같은 색깔이 아니 듯,
그들의 이야기도 다 다르겠지.


봄이 되면 각양각색의 꽃이 피고 또 지고,
가을이 되면 형형색색의 옷을 갈아입지.


오랜 시간을 함께 했건만
우린 왜 한 마음일 수 없는지...


어쩌면,
그래서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몰라.

 하룻밤


                                     문정희


하룻밤을 산정호수에서 자기로  했다
고등학교 동창들 30년만에 만나
호변을 걷고 별도 바라보았다
시간이 할퀸 자국을 공평하게 나눠 가졌으니
화장으로 가릴 필요도 없이
모두들 기억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우리는 다시 수학여행 온 계집애들
잔잔하지만 미궁을 감춘 호수의 밤은 깊어갔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냥 깔깔거렸다
그 중에 어쩌다 실명을 한 친구 하나가
"이제 나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년"이라며
계속 유머를 터뜨렸지만
앞이 안 보이는 것은 그녀뿐이 아니었다
아니, 앞이 훤히 보여 허우적이며
딸과 사위 자랑을 조금 해보기도 했다
밤이 깊도록
허리가 휘도록 웃다가
몰래 눈물을 닦다가
친구들은 하나둘 잠이 들기 시작했다
내 아기들, 이 착한 계집애들아
벌써 할머니들아
나는 검은 출석부를 들고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가벼이 또 30년이 흐른 후
이 산정호수에 와서 함께 잘 사람 손들어봐라
하루가 고단했는지 아무도 손을 드는 친구가 없었다

................................................................

 

그냥 친구니까 좋다.

딱히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도, 이유도 없다.

한 때의 시간을 공유했던 것으로

수 십년을 흘려보낸 후에도

그 시절 기억을 함께 비벼먹을 수 있고,

그저 친구였다는 이유 하나로

네 주름살이며, 네 허물도 그냥 봐줄 수 있다.

고단한 삶 속에 잠시나마

어디 한 켠 기댈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은가?

갈 때 가더라도 말이다.

유리창을 닦으며 

 

                         문정희 

 

누군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는다

 

창에는 하늘 아래
가장 눈부신 유리가 끼워 있어

 

천 도의 불로 꿈을 태우고
만 도의 뜨거움으로 영혼을 살라 만든
유리가 끼워 있어

 

솔바람보다도 창창하고
종소리보다도 은은한
노래가 떠오른다

 

온몸으로 받아들이되
자신은 그림자조차 드러내지 않는


오래도록 못 잊을
사랑 하나 살고 있다.

 

누군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아서

 

맑고 투명한 햇살에
그리움을 말린다.

........................................................

 

유리창을 닦는 일은... 마음을 닦는 일...

하루도 닦는 일을 게을리하면

어느새 이끼가 끼고 먼지가 앉습니다.

 

지워져서, 멀어져서...

아주 잊혀져버린 줄만 알았던...

 

맑고 투명한 햇살에 비춰볼 수 있는

눈부신 그 하나...무엇!...

'명시 감상 1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춘수... 꽃  (0) 2008.07.08
박정만...작은 연가  (0) 2008.07.07
고재종...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0) 2008.07.07
강연호...감옥/ 윤수천... 아내...  (0) 2008.07.07
박성우... 삼학년  (0) 2008.07.0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