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가 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
..........................................................

내 마음이 다만 괴로울 뿐이었다
맑은 날이 있고
흐린 날이 있고
비바람 몰아치다
말짱하게 갠다
오늘따라 자꾸만 마음이
모래성마냥 무너져


단지 내 마음이 괴로울 뿐이었다
눈물인지 땀인지
다 뒤섞여 흠뻑 젖을 때까지
뛰고 또 뛰었다.
오늘따라 자꾸만 마음이
모래성마냥 무너져


내 마음이 다만 괴로울 뿐이었다
사는 게 좋으냐?
그렇다면 툭툭 털고 살 일이라고
부지런히 땀 흘리며 살 일이라고
자꾸만 혼자 중얼거린다.

'명시 감상 6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탁번... 할아버지  (0) 2014.07.18
박성우... 감꽃  (0) 2014.07.18
윤후명... 마음 하나 등불 하나  (0) 2014.07.04
김선우... 간이역   (0) 2014.07.04
이해인... 능소화 연가  (0) 2014.06.24


                       천상병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일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

대면도 못해 본 시아버지 제사 마흔 여덟 해,
살았을 적 차라리 없는 게 나았던 지아비 제사 스무해 남짓,

어느새
옛부터 드물다는 나이를 맞은 어머니,
이만하면 할만큼 했다고
제사상 물려 놓고 돌아앉아 울고 또 우셨다.


그날,

홍역 앓듯 고열로 밤새 시달리던 날

새벽녘 꿈 길에
지친 기색의 아버지가 안개를 털고 들어섰다.


'아들아, 볼 면목이 없어 돌아간데이.
다시 아비와 아들로 다시 만날수만 있다믄 좋겠구마. 부탁한데이...'


내키지 않는 손을 내밀려다 굴러 떨어지듯 잠을 깼다.
차마 할 수 없었던 대답이 계속 입안에서만 까끄럽게 맴돌았다.


살아서는 알지 못하던 일
살아서는 하지 못하던 일을
죽어서는 알 수 있고
죽어서는 할 수 있을까?


그 날따라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았다.

'명시 감상 5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수권... 여승  (0) 2013.03.14
김종길... 상가(喪家)   (0) 2013.03.12
고재종... 첫사랑  (0) 2013.02.26
이형기... 호수  (0) 2013.02.26
오세영... 눈  (0) 2013.02.18

저것이 완성일까


                              김선굉


지는 후박나무의 잎을 바라본다
아주 느리게 시간이 개입하고 있었다
잎은 천천히 떨어졌으며,
무슨 표정과도 같이,
마치 무슨 순교와도 같이,
몇 차례 의젓이 몸 뒤집으며
툭, 하고 떨어졌다
저것은 그러면 완성일까
어떤 완성일까
아니면 또 다른 완성으로 가고 있는 걸까
툭, 툭, 떨어져 쌓여 몸 뒤척이는
저 마른 잎들의 근심은
..................................................

산 날을 대충 계산해보려
40여년에 삼백예순날을 곱하니
일만오천일이 훌쩍 넘는다.


일일이 세기에도 버거운 깨알같이 많은 날 동안
온전히 무엇 하나 이룬 것이 없다.


다시 한 번 헤아려 봐야겠다.
무엇 하나 손에 쥐고 있는지.
무엇 하나 가슴에 남아 있는지.

'명시 감상 4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지유... 마라토너  (0) 2012.08.07
김선우... 애무의 저편  (0) 2012.08.02
안도현... 개망초꽃  (0) 2012.06.20
마종기... 꽃의 이유  (0) 2012.06.15
문태준... 짧은 낮잠  (0) 2012.06.1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