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지문


                                  이은규


먼저 와 서성이던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그 사이
늦게 도착한 바람이 때를 놓치고, 책은 덮힌다

 
다시 읽혀지는 순간까지
덮여진 책장의 일이란
바람의 지문 사이로 피어오르는 종이 냄새를 맡는 것
혹은 다음 장의 문장들을 희미하게 읽는 것

 
언젠가 당신에게 빌려줬던 책을 들춰보다
보이지 않는 당신의 지문 위에
가만히, 뺨을 대본 적이 있었다
어쩌면 당신의 지문은
바람이 수놓은 투명의 꽃무늬가 아닐까 생각했다

 
때로 어떤 지문은 기억의 나이테
그 사이사이에 숨어든 바람의 뜻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
어느 날 책장을 넘기던 당신의 손길과
허공에 이는 바람의 습기가 만나 새겨졌을 지문

 
그 때의 바람은 어디에 있나
생의 무늬를 남기지 않은 채
이제는 없는 당신이라는 바람의 행방(行方)을 묻는다
지문에 새겨진
그 바람의 뜻을 읽어낼 수 있을 때
그때가 멀리 있을까,
멀리 와 있을까

.....................................................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초라함이란,
우리가 겨우 알 수 있는 것의 부족함이란...


우리가 어디를 가든,
다시 어디서 만나든
서로 반갑고 따뜻할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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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목탁

 

잿빛 안개는

오늘

그 길에 자욱하다

 

사그라지는

화염의 시체

바람에 흩어지는

흙으로 다시 돌아가는      

 

언젠가는

너도 그리고 나도

한 줌의 재

 

그 잿빛 안개는

오늘

그 길에 자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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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뜻한 물

 

                                                             김사인

 


추운 하루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눈과 추위가 어쩌면 올 겨울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새삼 정겹게 느껴볼 여유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저녁 무렵에 따뜻한 물을 받아 놓고 세수를 하다가 문득,

물이 따뜻해진다는 것이 참 신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릇에 물을 담고 불을 때면 불의 정(精)이라고 해야 맞을 기운이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그야말로 불이 물속에 담기는 것입니다. ‘불이 든 물’이 바로 물의 따뜻함인 것이지요.

물에 손을 담그면 불기운이 손을 통해 내 몸으로 옮아오는 것이겠지요.

 
물론 물리학의 초보적인 상식으로 다 설명이 될 사소한 일일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관습화된 알음알이와 설명들이 순간의 싱싱한 신기함을, 작용 그 자체를 대신할 수 있는 건 아닐 겁니다.

실은 물이란 것도 손으로 만져보노라면, 참 신기하고 이상한 존재라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쨌든 따뜻한 물에 손을 담그면서, 기적이다 신비다 하는 것이

멀리 오묘한 구석에 숨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우리 생의 흔하고 하찮은 매 순간들,

천지간의 모든 유정과 무정들, 크고 작은 모든 인연이야말로 실은

기적이요 신비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됩니다. (전문)

 [1986.3.1.]

 

 

지란지교를 꿈꾸며

 

         유안진

 

저녁을 먹고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 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보일수 있고,

악의없이 남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형제나 제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수 있으랴.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영원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물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은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조중히 여길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때론 약간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장을 쳐주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지나 내가 평온해 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가지 계속 되길 바란다.

나는 때때로 맛있는 것을 내가 더먹고 싶을 테고 내가 더 예뻐보이기를 바라겠지만

금방 그마음을 지울 줄도 알것이다.
때로는 얼음 풀리는 냇물이나 가을 갈대숲 기러기 울음을 친구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우정을 제일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흰 눈 속 침대같은 기상을 지녔으나 들꽃처럼 나약할 수도 있고,

아첨같은 양보는 싫지만 이따금 밑지며 사는 아량을 갖기를 바란다.

우리가 항상 지혜롭지 못하더라도 곤란을 벗어나려고 진실일지라도 타인을 팔지 않을 것이다.
오해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배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진 않다해도, 우리의 향기만은 아름답게 지니리라.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 낼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푸진 않게 냉면을 먹을 때는 농부처럼 먹을 줄 알며,

스테이크를 자를 때는 여왕처럼 품의있게 군밤을 아이처럼 까먹고 차를 마실때는 백자보다 우아해지리라.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특별히 한두사람을 사랑 한다하여 많은 사람을 싫어하지 않으리라.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서로 버티어주는 기둥이 될것이며, 서로를 살펴주는 불빛이 되리라.

설야(雪夜)


                                김광균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끝에 호롱불 여워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여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먼- 곳에 女人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追憶)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香氣)도 없이
호올로 차디 찬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

 

차곡차곡 눈이 내려 쌓인다.

이리저리 흩날리던 눈송이가 창가에 내려앉는다.

소복소복 쌓이는 추억, 그리고 그리움

눈 내리는 밤,

한 편의 시로 달랠 수 있을까?

 

김광균의 설야는

눈 내리는 밤의 서경, 서정을 표현한 최고의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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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랑의 노래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나목(裸木)

                                      신경림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 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

사는 게 원수라고,

왜 사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 적도 있지만,
시원스레 대답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산다는 게 무엇인지는 몇 십년을 곱씹어도
잘 모르겠다고...


어떻게 사는 게 옳은 건지는 수백번을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더라고...


오늘 저 사람들은 왜 죽었는지도 물어봐야 하는데,
오늘 저 사람들은 왜 죽어야했는지도 물어봐야 하는데,
오늘 저 사람들을 왜 죽여야했는지도 따져 물어봐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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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경로의 모습↓

 外滩에서↓

 

 

 

 

 

 

 

 

포동공항으로 가는 도중 차안에서 찍은 사진 ↓

 

 

 

출처 : 백양나무 우거진 아름다운 숲
글쓴이 : 백양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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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방 한칸

 

                               김사인


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 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 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비는 재주 뿐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소리 사정 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

 

올겨울은 유난히 춥다.


올해도 어쩌면 내년도 힘들 것이다.

추운 겨울나기가 그렇고
우리의 하루살이가 그러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따뜻한 봄은 오고,
우리의 하루도 시작된다.


비록 지금은 어렵고 힘들지만
또 한 고비를 넘고


아마도 내일은 찬란한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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