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날들의 기억


                            박민수


아픈 날들의 기억은
기쁜 날들을 위해 아름답다
오늘 아침 깨어나
집 앞 가까이 흐르는 긴 강줄기 바라보다가 문득
젊은 날 가슴을 얼싸안고
온몸으로 눈물을 흘리던 때가 기억났다
사는 것이 모두 아픔이던 시절 나의 눈물은
걷잡을 수 없는 긴 강물이었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울게 했는지 모르지만
이 아침 문득 그 눈물의 기억이
내 생명의 파도가 되어 봄날처럼 따뜻하다
아픈 날 눈물이 있었기에
그 눈물로 슬픔의 벽을 넘을 수 있었으리
아픈 날들의 기억은 진정
기쁜 날들을 위해 아름답다
..................................................................................

한동안 한 줄의 글도 써내지 못했다.

 

어딘가가 꽉 막혀버린 배수구.
갇힌 물은 오도가도 못하고,
배수구는 계속 구정물을 토하기만 한다.


배수관 속에 오랜동안 쌓인 퇴적물을 헤집으며 해묵은 반성을 한다.
이 토사물을 말끔히 치워야지
생각 없이 버린 날이 많았으니...

벌레 먹은 나뭇잎


                            이생진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 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

애타게 허위허위 손짓 하던 아버지의 모습에 잠을 깼다.
잠에서 깨어 아침 햇살을 볼 수 있음이 눈물 나게 고맙다.
이제 내가 영영 눈을 뜰 수 없어
내 아이들과 생이별을 해야한다는 생각에
떨치지 못하는 가위눌림을
어떻게든 이겨보고자 밤새 허위적거렸던가 보다.
온 몸이 아팠다.
버려진 아이는 늘 아비를 원망했다.
제 살길을 꾸리느라 아이들조차 돌보지 않았던 아비는 아마도
속으로만 저렇게 허망한 손짓으로 아이들을 꾸렸을 것이다.
그 마음을 이제 조금 이해하려 한다.
먹여 살리기 위한 흔적은 아름답기 그지없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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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떠나리라

                              김종해 
   
 
바람부는 날 떠나리라
흰 갓모자를 쓰고 바삐 가는 가을
궐(闕) 안에서 나뭇잎은 눈처럼 흩날리고
누군가 폐문에 전생애를 못질하고 있다
짐(朕)의 뜻에 따라
가야금 줄 사이로 빠져나온 바람은 차고
눈물이 맺혀 있다
떠나야 할 때를 알면서
짐(朕)이 이곳에 머뭇거리는 것은
아직 사랑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직 그리워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흐르는 물이 가는 길을 탓하지 않으며
손금 사이로 흘는 일생을 퍼담는다
슬픔이 있을 것 같은 날을 가려
이 가을에는 떠나리라
.....................................................................

눈이 시리도록 푸른, 먼
가을 하늘


어디론가 무리지어 날아가는
새들의 날갯짓은
번거롭기만 하고
갈바람은
자꾸만 눈물이
흐르더라고 전한다.


쉽게 떠나보낸 사랑을, 내 사랑을
그렇게 따라 보낸 마음을, 내 마음을


갈바람은
자꾸만 눈물이 또
흐르더라고 전한다.

땅거미

                     김영랑


가을날 땅거미 아름픗한 흐름 우를
고요히 실리우다 훤뜻 스러지는 것
잊은 봄 보랏빛의 낡은 내음이뇨
임으 사라진 천리 밖의 산울림
오랜 세월 시닷긴 으스름한 파스텔
애닯은 듯한
좀 서러운 듯한


오! 모두 못 돌아오는
먼― 지난날의 놓친 마음
....................................................

그리움 조각 하나 남아있지 않은
가을 하늘의 푸르름은
낙엽 수북이 쌓인 공원 벤치에서
아무 말없이 네가 전한
마지막 이별 편지만큼 시리다.


반듯하게 딱 반 접힌 흰 편지지가 전한
날카로운 가슴 시림과 가녀린 떨림이
아스라히 멀어져만 가는 푸른 가을 하늘 어디엔가 남아있기를...


아, 자꾸만 자꾸만 흐려지던,
무어라 적혀있었는지 지금은 기억의 흔적조차 남지 않는
편지지에 빼곡하던 글자들이 오늘은 왜 이리 그리운가?


오늘 하늘은 또 왜 이리 푸른가?

가을의 기도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살아있으면, 살다 보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는 게 인연이지
어쩌면
헤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지


좋은 인연이 얼마나
드물고 귀한 것인지
헤어지고 나서야 알지
보내고 나서야 알지


다시는 만날 수 없음을 알고서야
영영 아주 이별 하고서야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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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


                                    신진호


그 짧은 시간에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는 서둘러
술잔을 비웠다
알지 못하리라
이런 가슴 아픔을


친구가 돌아올 때
나는 웃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
참 어려운 일
좋은 사람이 어울려 좋은 일을 함께 하는 일
참 드문 일
좋은 사람들과 함께 좋은 관계를 지속하는 일
참 귀한 일


마음을 접고 나니 공허하다
괜찮겠냐는 말이 더 견디기 힘들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웃고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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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언어


                  신동엽

 

외치지 마세요
바람만 재티처럼 날려가 버려요.


조용히
될수록 당신의 자리를
아래로 낮추세요.


그리구 기다려 보세요.
모여들 와도


하거든 바닥에서부터
가슴으로 머리로
속속들이 구비돌아 적셔 보세요.


허잘 것 없는 일로 지난 날
언어들을 고되게
부려만 먹었군요.


때는 와요.
우리들이 조용히 눈으로만
이야기할 때


하지만
그때까진
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해요.
..........................................................

저 마누라 말투 보소
내 평생 된 것이 없는 이유가
저 부정적인 말투여
뭣은 이래서 안되고 뭣은 저래서 안되고...
저 주둥이가
사나이가 뭘 하고자 하는 의지를 확 꺾어버려
시벌...


늘 말이 앞서던 사내의 술푸념
술냄새가 역하게 밴 쉰소리를 듣는 내내,
더 낼 안주거리도 없는 주방에서
입이 댓발나온 아낙네는
지겨운 일상을 중얼거림으로 되새김질하면서
거실에 퍼질러진 사내를 흘깃흘깃 째려보면서
가스불을 켰다 껐다하고
프라이팬을 들었다 놨다하고
부엌칼을 들었다 놨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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