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는 시간
              

                      이기철


시는 녹색 대문에서 울리는 초인종 소리를 낸다
시는 맑은 영혼을 담은 풀벌레 소리를 낸다
누구의 생인들 한 편의 시 아닌 사람 있으랴
그가 걸어온 길 그가 든 수저 소리
그가 열었던 창의 커튼 그가 만졌던 생각들이
실타래 실타래로 모여 마침내 한 편의 시가 된다


누가 시를 읽으며 내일을 근심하랴
누가 시를 읽으며 적금통장을 생각하랴
첫 구절에서는 풀피리 소리 둘째 구성에서는 동요 한 구절
마지막 구절에서는 교향곡으로 넘실대는 싯발들
행마다 영혼이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들
나를 적시고 너를 적시는
초록 위를 뛰어다니는 이슬 방울들
..........................................................

흐린 날은 흐리니 좋고,

맑은 날은 맑아서 좋고,
비가 오시는 날은 비가 오니 좋고,
바람 부는 날은 바람 부니 좋네요.
좋은 데 어디 이유가 있나요?
그냥 좋은 것이지요.


의미없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
쓸데없는 데 생각이나 시간을 소비하는 것,
필요없는 일에 정력을 낭비하는 것,
모두 분별해서 정리해야 할 것들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인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지나고 나면 우리 삶은 생각보다는 짧은 듯합니다.
살아있음이 감사한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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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앞에 봄이 있다


                                 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

고난 없는 생이 어디 있을까요?
안개 흩뿌리듯 우리를 흠뻑 젖게 하는 비
끊임없이 닥치는 삶의 시험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마저도 감사히 맞이하여
살아있음이 곧 복이라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대하는 옳은 태도겠지요.


비로소 꽃잔치 펼쳐질 봄을 맞아
맘껏 즐기고 양껏 누려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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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길
 

                  정호승

 
제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사방은 칠흑같은 어둠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텅 빈 공간의 고요
차가운 핸들에 엎드려
가슴치며 울었던
마치 물안개 번지듯
봄 비 오시던 날.


샤워기 물소리,
북받치는 울음을 참는 구역질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자동차 경적소리,
곁을 스쳐가는 차가 일으킨 바람소리...


어지러이 사방으로 번지던 소리가
커다란 배수구로 빨려 내려가듯 후룩!
일순간, 사라졌다.


흠뻑 젖은 차 창에 빼곡히 맺힌
눈물, 눈물, 눈물
창을 타고 빗줄기 한 줄기
주룩 흘러내릴 때,
동시에,
내 관자놀이를 타고
생살을 찢어낼 듯 예리하게
흘러내리는 싸늘한 땀방울


이 순간!

살아있다.

물안개 번지듯
봄 비 오시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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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


                                     문정희


가장 아름다운 것은
손으로 잡을 수 없게 만드셨다
사방에 피어나는
저 나무들과 꽃들 사이
푸르게 솟아나는 웃음 같은 것


가장 소중한 것은
혼자 가질 수 없게 만드셨다
새로 건 달력 속에 숨쉬는 처녀들
당신의 호명을 기다리는 좋은 언어들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저절로 솟게 만드셨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 속으로
그윽이 차 오르는 별빛 같은 것
..........................................................

어느 앵글로 언 땅을 뚫고 일어서는
새싹의 기운을 담아낼 수 있을까?
어느 화폭에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저 파란 하늘을 그려낼 수 있을까?


자연스러운 그러나
너무 아름답고 소중하며 사랑스러운
자연의 경이로움
그 고귀함
스스로 베풀어진 그러한 성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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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쓰는 일

 

                        이생진


시보다 더 곱게 써야 하는 편지
시계바늘이 자정을 넘어서면서
네 살에 파고드는 글
정말 한 사람만 위한 글
귀뚜라미처럼 혼자 울다 펜을 놓는 글
받는 사람도 그렇게 혼자 읽다 날이 새는 글
그것 때문에 시는 덩달아 씌어진다
.....................................................................

언젠가부터 내 안에는
작은 새가 한마리 산다.


언제나 나보다 먼저
새벽을 맞아
내 의식을 깨우고
밤을 기다려
모두가 잠든 후에야
비로소 쉬는...


언제나 나보다 먼저
너를 맞아
눈 뜨게 하고
너를 만나
비로소 숨쉬게 하는...


언제나 나보다 먼저
신의 소리를 듣고
모든 깨어있는 감각으로
내게 전달하여
허락하신 하루에

제 스스로 감사 기도 올리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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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천상병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 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

'니'가 있어야
'너'도 있고
'나'도 있다.

'네'게로 갈 길도 가깝지 않지만
'내'게로 향하는 길도 아직 멀다.


그렇다면,
이기적으로 살기 보다
좀 이타적으로 사는 게
삶의 진리에
더 가까운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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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딸에게


                 박인환

 

기총과 포성의 요란함을 받아가면서
너는 세상에 태어났다 주검의 세계로
그리하여 너는 잘 울지도 못하고
힘없이 자란다.


엄마는 너를 껴안고 삼 개월 간에
일곱 번이나 이사를 했다.


서울에 피의 비와
눈 바람이 섞여 추위가 닥쳐오던 날
너는 입은 옷도 없이 벌거숭이로
貨車 위 별을 헤아리면서 남으로 왔다.


나의 어린 딸이여 고통스러워도 애소도 없이
그대로 젖만 먹고 웃으며 자라는 너는
무엇을 그리 우느냐.


너의 호수처럼 푸른 눈
지금 멀리 적을 격멸하러 바늘처럼 가느다란
기계는 간다. 그러나 그림자는 없다.


엄마는 전쟁이 끝나면 너를 호강시킨다 하나
언제 전쟁이 끝날 것이며
나의 어린 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인가.


전쟁이 끝나면 너는 더욱 자라고
우리들이 서울에 남은 집에 돌아갈 적에
너는 네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그런 계집애.


나의 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디 있느냐
그때까지 너에게 알려줄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인가.
.......................................................

아직 고추도 채 여물지 않은 코흘리개 녀석들이
운동장에 그물망처럼 정확히 좌우 간격 맞춰 줄지어 정열하여

발 밑 꽁꽁 언 땅이 질척하게 녹을 때까지 오돌오돌 떨고 서서
교장선생님의 피끓는 정신무장을 강조하는 애국조회 훈시를 듣고 나서
쬐그만 감자만한 주먹을 꼭 쥐고 군 출신의 체육선생님의 뜨거운 선창에 따라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무찌르자 북괴군!' '이룩하자 남북통일'을
목이 찢어져라 외치고 군대 열병식 하듯 줄지어 사열을 끝내고 서야
흐트러짐 없이 줄지어 교실로 입실했다.


참혹한 동족상잔의 전쟁이 60여년 전, 이 땅에서 벌어졌다.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피눈물로 겪어내야 했던 난리,
그 비극의 참상을 겪은 이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이제 그 쓰라린 기억들을 전할 사람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오늘도 북의 무력도발 가능성을 타전하는 뉴스가 곳곳에 눈에 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전쟁의 기운들이 이 땅 가득 추악한 냄새를 풍겼던가?
안타깝게도 전쟁의 망령이 다시 동(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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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승


                    송수권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 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 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을 뒤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 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

오늘따라 유난히
하늘은 정갈하게 닦여있고,
가만히 모은 손등에 닿는
바람이 싱그럽다.


그늘 진 길 모퉁이엔 아직
살얼음이 깔려있는데,
산수유 나뭇가지엔 어느새
곳곳에 움이 텄다.


언제 까치 울음 소리가 아득히
숲에서 들렸던가?


가느랗게 번진 햇발 사이로 괜시리
두근거리는 마음은
눈도 채 녹지 않은 건너편 가파른
산 길을 성급히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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