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벗고 들어가는 그곳


                                       황지우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린 독신녀,
그곳에 가보면 틀림없이 베란다에
그녀의 신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한강에 뛰어든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시멘트 바닥이든 시커먼 물이든
왜 사람들은 뛰어들기 전에
자신이 신었던 것을 가지런하게 놓고 갈까?
댓돌 위에 신발을 짝 맞게 정돈하고 방에 들어가,
임산부도 아이 낳으러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정돈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뛰어내린 곳에 있는 신발은
생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은 영원히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다만 그 방향 이쪽에 그녀가 기른 열대어들이
수족관에서 물거품을 뻐끔거리듯
한번의 삶이 있을 따름이다


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잘못 든 길들이 있었는가
가서는 안 되었던 곳,
가고 싶었지만 끝내 들지 못했던 곳들;
말을 듣지 않는, 혼자 사는 애인 집 앞에서 서성이다
침침한 밤길을 돌아오던 날들처럼
헛된 것만을 밟은 신발을 벗고
돌아보면, 생을 '쇼부'칠 수 있는 기회는 꼭 이번만은 아니다
.....................................................................

모든 어리석음이나 게으름이 죄는 아닐테지만
어리석음과 게으름은 죄에 가깝다.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지혜를 구하고
내게 주어진 생에 감사하고
그 삶을 되도록 바르고 온전히 꾸려가야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의 소명이기 때문이다.


모든 生이 貴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어느 하나 重하지 않은 生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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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김민정


색안경을
벗어놓고
세상을
볼 일이다


스쳐가는
바람의 말도
새겨들을
일이다


생각을
되새김하여
가다듬을
일이다
......................................

시인은


머리의 냉철함보다
가슴의 뜨거움이 더 귀하겠다.


감각의 예민함보다
사유의 깊이가 더 중하겠다. 


감정에 몰입하기보다
궁극적으로
삶에 대한 감사를 먼저 알아야겠다.


                      강정규


연우가 드디어 걷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갈까
어떤 길을 갈까.
그도 저도 아닌
연우의 길을 가면 좋겠다
연우니까
..........................................

사는 게
별 게 없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성심껏 일하며
흘린 땀방울만큼 벌고
번만큼 여유를 누리고
여유만큼 평안을 얻으면
더 무엇을 바라고 더하겠나?


그런데

참으로
기대롭다.

우리가 물이 되어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그 날, 네가 내게
티끌하나 없이
온전히 진심으로 전한
한마디의 말


그 날 이후,


모든 게 달라졌고
좀 더 새로와졌고
훨씬 아름다워졌고
한층 지혜로워졌으며
더 많이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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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를 쏘았다 (랩소디 인 블루)


                                                              강영은


건반 위를 튀는 손가락이 싱싱한 총알을 쏟아낸다
몸에 와 박히는 무수한 음의 총알들
납 탄 같은 랩소디 인 블루의 탄피가 귀를 파고든다


음파를 타고 이동해온 슬픔의 멜로디는
정직한 총알이다


기억의 상류를 향해 나아가던 나보다 기억이 먼저
사살된 걸까 돌아오지 않는 기억들
잿빛의 탄흔 자국 무성한 음결 속에서
시퍼런 물줄기 쏟아내는 음계의 하류로 망명한다
(누구에게나 망명하고 싶은 순간이 있는 법이다)


마지막 남은 한 발의 총알이 여운을 남기고 사라지자
붉은 선혈을 뿜는 실내등이 켜지고 커튼콜이 끝난
무대 위에서 어둠이 점점 자라나 도시를 삼킨다
도시는 거대한 무덤이 되어 총탄에 맞은
사람들을 수거해간다


누가 이 절망의 도시를 살아나게 할까
청중석 구석에 자리한 이미 죽은 나에게 낮은음자리인
누군가가 조용히 속삭인다


지구 저편은 환한 대낮, 사막의 전장에서 수신되어오는
짧은 신호음처럼 누군가를 저격하고 있을지도 모를
은빛의 빛나는 총알, 사랑 혹은 문명을 복제하고 있을
그 지나간 음표들이


나를 쏜다, 쏘았다 탕
......................................................

시퍼렇게 날을 세워라


튀어오르는 핏줄을 갈라라
남은 피를 말끔히 나눠 마시리라.
살 한 덩이 써억 베어라
한 세상 참았던 시름을 마음껏 씹어보리라.


이 생의 마지막 날을 위한 성찬,
이제 남겨진 번뇌의 꼬리를 잘라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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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박인환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기를 꽂고 산들, 무얼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얼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르는데......
가슴에 돌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헤어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 -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

우연히 고등학교 시절의 일기장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마음에 펼쳐 본다.
신기하게도 20여년도 넘은 일들이 하나 둘 되살아나서는 선명하게 떠오른다.
일기장에 등장하는 친구들의 이름에 얼굴이 하나 둘 얹혀 진다.
지금은 비록 겉모습은 변해 내가 기억하는 얼굴은 이미 아닐테지.
생각해 보니, 당장 만날 수 있는 이도 있고, 연락이 닿지 않는 친구도 있다.
저들이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갑자기 무척 궁금하다.


요즘은 결혼식장보다 장례식장엘 더 자주 가게된다는 친구의 말에 댓글을 달았다.
앞으로는 새로운 만남보다는 이별이 더 많아질거라고, 이제 그럴 때가 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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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김옥숙 


낙타의 젖은 눈썹을 본 일이 있는가


그림 속 낙타의 눈을 들여다보지 말라
낙타의 길고 아름다운 눈썹에 손을 대지 말라
천년만년 그림 속에 박제가 되어있어야 할
낙타가 고개를 돌려 당신 앞으로 걸어나올 것이다
낙타가 당신에게 올라타라고 말을 건넨다
언젠가 낙타의 등에 올라타고
한없이 사막을 건너갔던 것처럼 낙타의 익숙한 등
불룩한 혹을 쓰다듬을 것이다 당신은
지쳐보이는 식구처럼 낙타가 안쓰러울 것이다
선인장들은 하늘에다 무수한 가시를 박아 넣고
메마른 하늘을 마구 찔러대고 있다
선인장의 눈과 귀는 뿌리에 있지 낙타가 말한다
캄캄한 지하에 눈과 귀를 박아 넣고
수만 미터 아래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를 찾아내는 거야
내 몸 속의 물을 꺼내 마셔, 괜찮아
낙타의 목을 끌어안고 우는 당신
낙타의 몸에서 물을 꺼내 마신다
모래바람이 불어와 낙타의 몸을 이불처럼 덮는다
당신은 눈물을 훔치며 그림 속을 걸어나온다
당신의 몸 속에 들어온 낙타 한 마리
문을 열면 모래 바람이 거세게 불고
당신의 늑골 속으로 기억 속으로 모래가 쌓이는 소리
당신은 몸 속의 낙타 한 마리 거느리고
사막을 건넌다 그림 속의 낙타는 눈썹이 길다
.................................................................................................

 

내가 가진 것이 없어
나눌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아
손아귀에 틀어쥐고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았겠다.


탐욕인지 모르고...
허상인지 모르고...


내 손아귀에 그 무엇을 쥐고 있든
그걸 훌훌 털고 일어서야만
비로소 자유로워질 것이다.
자연스러워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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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점 맞은 연못


                         박성우


하늘 선생님이
연못을 채점한다


부레옥잠, 수련, 소금쟁이
물방개, 붕어, 올챙이......


모두 모두
품속에 안아주고
예쁘게 잘 키웠다고


여기도 동그라미
저기도 동그라미


빗방울로
동그라미 친다.
......................................

다 맞다
다 맞다


다 잘했다
다 잘했다


다 옳다
다 옳다


기대롭다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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