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사 가는 길, 잠시


                             신용목


시흥에서 소사 가는 길, 잠시
신호에 걸려 버스가 멈췄을 때


건너 다방 유리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내 얼굴 속에서 손톱을 다듬는, 앳된 여자
머리 위엔 기원이 있고 그 위엔


한 줄 비행기 지나간 흔적


햇살이 비듬처럼 내리는 오후,
차창에도 다방 풍경이 비쳤을 터이니


나도 그녀의 얼굴 속에 앉아
마른 표정을 다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당신과 나는, 겹쳐져 있었다


머리 위로 바둑돌이 놓여지는 그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

지나가는 시간,
지나가는 풍경,
지나가는 사람...


무심코 지나쳐버린 일상이
멈춘 채, 몇 줄의 글로 빼곡히 박혀있다.
기억조차 희미한 시간, 공간, 그리고 이름들...


나는 어떻게 그 곳에 혹은 그들에게 남겨져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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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

                         김기택


가지가 되다 말았을까 잎이 되다 말았을까
날카로운 한 점 끝에 온 힘을 모은 채
가시는 더 자라지 않는구나


걸어다닐 줄도 말할 줄도 모르고
남을 해치는 일이라곤 도저히 모르는
그저 가만히 서서 산소밖에 만들 줄 모르는
저 푸르고 순한 꽃나무 속에
어떻게 저런 공격성이 숨어 있었을까
수액 속에도 불안이 있었던 것일까
꽃과 열매를 노리는 힘에 대한 공포가 있었던 것일까
꽃을 꺾으러 오는 놈은 누구라도
이 사나운 살을 꽂아 피를 내리라
그런 일념의 분노가 있었던 것일까


한뿌리에서 올라온 똑같은 수액이건만
어느 것은 꽃이 되고
어느 것은 가시가 되었구나
......................................................................

말 수를 줄여야 겠다.
간혹 의도하지 않은 말로 인해 문제가 생기고,
말이 길어지다 보면 생각지도 않았던 일로 번진다.


내 혀에서 비롯된 업이
나를 상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할 수도 있음을
무수히 겪고도
또 실수를 범한다.


꼭 한순간만 참을 것을...
한마디만 참을 것을...

개한테 물린 적이 있다


                                         유용


내 나이 여섯살 적에
아버지와 함께 간 그 허름한 식당,
그 옆에 냄새나는 변소,
그 앞에 묶여 있던 양치기,
는 그렇게 묶인 채로 내 엉덩이를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 안 물어.
그 새끼 그 개만도 못한 주인새끼의
그 말만은 믿지 말았어야 했다.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
는 말이 있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는 번번이 짖는 개에게 물렸다.


사랑을 부르짖는 개,
는 교회에서 나를 물어 뜯었다.
정의를 부르짖는 개,
는 내 등 뒤에서 나를 덮쳤다.
예술을 부르짖는 개,
는 백주대로에서 내 빵을 훔쳐 달아났다.


괜찮다, 괜찮다,
는 개소리는 지금도 내 엉덩이를 노린다.
괜찮아, 괜찮아, 물지 않을 거야.
저 새끼 저 개만도 못한 새끼의
싸늘한 속삭임을 나는 도시 믿을 수 없다.
....................................................................

욕 한마디 해주고 싶을 때가 있다.
돌아서서 저주를 퍼부어 주고 싶은 때가 있다.
도대체 말로는 해결의 기미가 보이질 않아,
마구 두들겨 패주고 싶은 때가 있다.


살다보면...
다행히 그리 많지는 않지만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순간에 맞닥뜨린다.
참아 넘기기가 쉽지 않은 순간이다.


아주 가끔은
개새끼, 돼지새끼들과 섞여 사는 게
짜증스럽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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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음화 (陰畵)


                                  김혜순

 

오늘 아침에는 아직도 우리가
피난중이라는 생각
아직도 어린 새끼 등에 업고
총칼 대포 피해 피난 보따리 이고 지고
우왕좌왕 쫓기는 꿩떼 같다는 생각


누가 굶어죽는지 누가 얼어죽는지
걸음아 나 살려라 힘껏 내달린다는 생각
이 보따리 잃을까 이 보따리 빼앗길까
웅크리고 두리번거린다는 생각


(누가 이리 꽃 묶어놓았나 피난 보따리
우리들의 골통 보따리
들어온 것 못 나가고
나간 것 못 들어오라고
누가 와 자근자근 밟아놓았나
무덤 보따리)


오늘 아침 청계천을 꽉 메운 차들
내려다보고 있을 때 문득 스치는 풍경
길고 긴 피난민 행렬, 우리들의 무의식
울지도 못하고 떠밀려가는 보따리 행렬
죽어서도 못 썩을 우리들의 음화 (陰畵)
.....................................................................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벗어 던져야
새 옷을 입고 세상을 향해 나설 것이다.
과감히 탈피(脫皮)해야 날개를 펴고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다.


분명한 것은
내가 아무 생각없이 파내려 간 구덩이에
내가 꼼짝없이 갇힐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이든
사랑이든
욕망이든...


행여 그 속에 내가 갇혀있는 것은 아닌지
계속 잘 살펴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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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김광섭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만남이 소중한 것은 그 자체가 귀하기 때문이다.
만남이 귀한 것은 그 존재가 온전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사라지겠지
우리 삶은 그러하겠지


하지만
귀하고 온전한 것은
언제든 다시 만나겠지.

마음의 고향


                   이시영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참새떼 왁자히 내려앉는 대숲마을의
노오란 초가을의 초가지붕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토란 잎에 후두둑 빗방울 스치고 가는
여름날의 고요 적막한 뒤란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추수 끝난 빈 들판을 쿵쿵 울리며 가는
서늘한 뜨거운 기적 소리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빈 들길을 걸어 걸어 흰 옷자락 날리며
서울로 가는 순이 누나의 파르라한 옷고름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아늑한 상큼한 짚벼늘에 파묻혀
나를 부르는 소리도 잊어버린 채
까닭 모를 굵은 눈물 흘리던 그 어린 저녁 무렵에도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마음의 고향은
싸락눈 홀로 이마에 받으며
내가 그 어둑한 신작로 길로 나섰을 때 끝났다
눈 위로 막 얼어붙기 시작한
작디작은 수레바퀴 자국을 뒤에 남기며
.............................................................

어느해 겨울,
차디 찬 술 한잔 목구멍에 털어넣고
눈물 반쯤 섞어
목이 잠기도록 밤이 새도록
이 시를 중얼거렸다.


하얗게 쌓인 눈 위를 휘청대며 걸었던
내 젊은 날 방황의 어지러운 발자취를,
그 쓰디 쓴 기억을 좇아본다.


아득히 멀어져 이제는 너무 희미해져버린
그 시간 속 어디에도 내 마음의 고향은 없었다.


그래, 사랑이란 무엇이겠나?

낙화, 첫사랑


                      김선우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등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

믿음의 바탕에는 개체 상호의 온전함이 있습니다.
그 온전함이 신뢰의 바탕이지요.
그리고 나서야 사랑이 온전하게 싹트는 것이지요.


이젠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에 믿음과 기대를 심어야 합니다.
온전한 사랑을 위해서는 말입니다.

 

비록 첫 사랑은 한 철 꽃이 피고 사라지듯

그렇게 훌쩍 왔다 갔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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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귀로(歸路)


                                 박재삼


새벽 서릿길을 밟으며
어머니는 장사를 나가셨다가
촉촉한 밤이슬에 젖으며
우리들 머리맡으로 돌아오셨다.


선반엔 꿀단지가 채워져 있기는커녕
먼지만 부옇게 쌓여 있는데,
빚으로도 못 갚는 땟국물 같은 어린것들이
방안에 제멋대로 뒹굴어져 자는데,


보는 이 없는 것,
알아주는 이 없는 것,
이마 위에 이고 온
별빛을 풀어 놓는다.
소매에 묻히고 온
달빛을 털어 놓는다.
..............................................................

어디 고단하지 않은 생이 있던가?
그래, 어떤 말로 그 생을 다 얘기 할 수 있겠는가?


네 말소리 기울일 귀가 있어 얼마나 다행이냐?
네 목소리 전할 입이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누군가 네 얘기 들어줄 사람있으면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그래, 이제 다 말해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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