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


                         박형준


내가 잠든 사이 울면서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여자처럼


어느 술집
한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거의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술잔을 손으로 만지기만 하던
그 여자처럼
투명한 소주잔에 비친 지문처럼


창문에 반짝이는
저 밤 빗소리
......................................................................

늦은 귀가...
깔끔히 목욕을 마치고 붉은 와인 한 잔 따라 놓고
식탁 의자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순간 창 밖에서 번쩍 번개가 스쳤다.


후둑후둑 후두둑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곧바로 천둥 번개를 동반한 벼락비가 닥쳤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고스란히 밖에서 저 비를 맞았을 것이다.
고맙다.
이렇게 평안히 안전하게 저 비를 맞을 수 있으니...


돌이켜보면 내 생의 시련과 시험은 항상
그렇게 지나쳐 갔다.
내가 겪어 낼 수 있을 때,
견뎌낼 수 있을만큼...


내일 아침은 분명 아주 말짱히 갠 하늘을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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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련


                 안도현


장하다, 목련 만개한 것 바라보는 일
이 세상에 와서 여자들과 나눈 사랑이라는 것 중에
두근거리지 않은 것은 사랑이 아니었으니
두 눈이 퉁퉁 부은
애인은 울지 말아라
절반쯤은, 우리가 가진 것 절반쯤은 열어놓고
우리는 여기 머무를 일이다
흐득흐득 세월은 가는 것이니
.....................................................

흙먼지가 뒤섞인
비릿한 봄 비가 쏟기 시작한다.

별이라곤 자취도 없고
그나마 매달렸던 꽃잎도
곧 어디론가 쓸려가고 말 것이다.


늘 먼 발치에서 보기만 했던 자목련,
아이 손바닥만한 꽃 잎이 시들어
아슬아슬 매달린 모양새가 하도 불안하여
용기를 내 썩 다가가
까치발 딛고 발돋움해서는
목련나무 가지째 뚝 꺾어냈다.


하지만 이미 시들어가던 꽃잎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뚜욱 뚜욱.....
철퍼덕 철퍼덕.....
떨어져 내린다.
내 심장조각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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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의 사랑


                         김광규


장독대 앞뜰
이끼 낀 시멘트 바닥에서
달팽이 두 마리
얼굴 비비고 있다


요란한 천둥 번개
장대 같은 빗줄기 뚫고
여기까지 기어오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멀리서 그리움에 몸이 달아
그들은 아마 뛰어왔을 것이다
들리지 않는 이름 서로 부르며
움직이지 않는 속도로
숨가쁘게 달려와 그들은
이제 몸을 맞대고
기나긴 사랑 속삭인다


짤막한 사랑 담아둘
집 한 칸 마련하기 위하여
십년을 바둥거인 나에게
날 때부터 집을 가진
달팽이의 사랑은
얼마나 멀고 긴 것일까.
............................................................

내 생에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이 언제였던가?
무심코 던져진 질문에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고
호기롭게 답을 하나 불쑥 내밀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동안
추억이라고 한무더기 주워모은 것들이
하나같이 보잘 것 없다.


지금 당장 떠나도 후회 없을만큼
어느 한 순간 아름답고 호기롭게 살았던가?
흩어져버린 답을 주섬주섬 주워담는다.


그래, 이제
詩처럼 살자.
압축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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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수작


                            배한봉


봄비 그치자 햇살이 더 환하다
씀바귀 꽃잎 위에서
무당벌레 한 마리 슬금슬금 수작을 건다
둥글고 검은 무늬의 빨간 비단옷
이 멋쟁이 신사를 믿어도 될까
간짓간짓 꽃대 흔드는 저 촌색시
초록 치맛자락에
촉촉한 미풍 한 소절 싸안는 거 본다
그때, 맺힌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던가
잠시 꽃술이 떨렸던가
나 태어나기 전부터
수억 겁 싱싱한 사랑으로 살아왔을
생명들의 아름다운 수작
나는 오늘
그 햇살 그물에 걸려
황홀하게 까무러치는 세상 하나 본다
......................................................

멋진 날이다.
이보다 더 푸를 수 있을까?
하늘이며 나무며 풀이며
어느 것 하나
모자람 없이
나무랄 데 없이
푸르고 푸르다.
내마음도 더불어 푸르다.
멋진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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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진 자리에


                                 문태준


생각한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꽃잎들이 떠난 빈 꽃자리에 앉는 일


그립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붉은 꽃잎처럼 앉았다 차마 비워두는 일
.................................................................

꽃이 피는 것
참 잠깐이더군


올해도 화려한 꽃잔치가 열렸나 싶어
마음 서둘 때
시샘 가득한 비바람 치고 닥치고나면
꽃잎 한 장 남김없이 떨어지더군


축축히 젖은 바닥에 잔뜩 떨어진 꽃 잎
그 꽃 잎들을 감상하는 것도
나름 운치있는 일이더군


꽃이 지는 것도
참 잠깐이더군


생각해보니
매년 열리는 화려한 꽃잔치에
마음만 서둘렀더군


아주 그대로
세월만 흘렀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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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


                   유병록


매일 함께 하는 식구들 얼굴에서
삼시 세끼 대하는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때마다 비슷한 변변찮은 반찬에서
새로이 찾아내는 맛이 있다.


간장에 절인 깻잎 젓가락으로 집는데
두 장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아
다시금 놓자니 눈치가 보이고
한번에 먹자 하니 입 속이 먼저 짜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나머지 한 장을 떼내어 주려고
젓가락 몇 쌍이 한꺼번에 달려든다


이런 게 식구이겠거니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내 식구들의 얼굴이겠거니
...............................................

함께 살자고 하니 나눠야 한다.
먹을 것도 나누고
입을 것도 나누고
잘 곳도 나누고...


함께 살자고 하니 나눌 것이 많다
기쁨도 나누고
슬픔도 나누고
행복도 나누고
아픔도 나누고
사랑도 나누고...


함께 살자고 하니 할 것 또한 많다.
밥도 하고
일도 하고
말도 하고
사랑도 하고...


어쨌든 식구는
함께 살자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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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다하다


                     김사인


풀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저 야윈 실핏줄들
빗방울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이미 저질러진 일들이여
완성된 실수여


아무리 애써도 남의 것만 같은
저 납빛의 두꺼운 하늘
잠시 사랑했던 이름들


이제 나에게 어떤 몸이 용납될 것인가
설움에 눌린 발바닥과 무릎뼈는
어느 달빛에 하얗게 마를 것인가
.........................................................................

모든 걸 맡겨놓을 수 있는 삶이 어디 있을까요?
과연 그런 삶이 좋기만 할까요?


믿음이란 것은 내 올곧은 자립(自立)임을 깨닫는 것이 먼저입니다.

제 스스로 딛고 일어서야만 알맞은 곳에 제대로 뿌리를 내릴 수 있고,

제 힘으로 살아 우뚝 서야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지요.


그런 후에야 비로소 햇빛도 바람도 물도 모두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지요.

삶의 의미를 찾게 되고, 진정한 보살핌 안에 거하게 되겠지요.


나의 온전함에 대한 용기와 믿음을 가지세요.
그리고 태양을 향해 돌아서서 한 발을 내딛고 앞으로 나아가세요.
이제 비로소 당신의 길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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