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거미

                     김영랑


가을날 땅거미 아름픗한 흐름 우를
고요히 실리우다 훤뜻 스러지는 것
잊은 봄 보랏빛의 낡은 내음이뇨
임으 사라진 천리 밖의 산울림
오랜 세월 시닷긴 으스름한 파스텔
애닯은 듯한
좀 서러운 듯한


오! 모두 못 돌아오는
먼― 지난날의 놓친 마음
....................................................

그리움 조각 하나 남아있지 않은
가을 하늘의 푸르름은
낙엽 수북이 쌓인 공원 벤치에서
아무 말없이 네가 전한
마지막 이별 편지만큼 시리다.


반듯하게 딱 반 접힌 흰 편지지가 전한
날카로운 가슴 시림과 가녀린 떨림이
아스라히 멀어져만 가는 푸른 가을 하늘 어디엔가 남아있기를...


아, 자꾸만 자꾸만 흐려지던,
무어라 적혀있었는지 지금은 기억의 흔적조차 남지 않는
편지지에 빼곡하던 글자들이 오늘은 왜 이리 그리운가?


오늘 하늘은 또 왜 이리 푸른가?

망각

 

                        김영랑


걷던 걸음 멈추고 서서도 얼컥 생각키는 것 죽음이로다
그 죽음이사 서른살 적에 벌써 다 잊어버리고 살아왔는디
왠 노릇인지 요즘 자꾸 그 죽음 바로 닥쳐온 듯만 싶어져
항용 주춤 서서 행길을 호기로이 行喪을 보랐고 있으니


내 가버린 뒤도 세월이야 그대로 흐르고 흘러가면 그뿐이오라
나를 안아 기르던 산천도 만년 하냥 그 모습 아름다워라
영영 가버린 날과 이 세상 아무 가겔 것 없으매
다시 찾고 부를 인들 있으랴 억만영겁이 아득할 뿐


산천이 아름다워도 노래가 고왔더라도 사랑과 예술이 쓰고 달금하여도
그저 허무한 노릇이어라 모든 산다는 것 다 허무하오라
짧은 그동안이 행복했던들 참다웠던들 무어 얼마나 다를라더냐
다 마찬가지 아니 남만 나을러냐? 다 허무하오라


그날 빛나던 두 눈 딱 감기어 명상한대도 눈물은 흐르고 허덕이다 숨 다 지면 가는 거지야
더구나 총칼 사이 헤매다 죽는 태어난 悲運의 겨레이어든
죽음이 무서웁다 새삼스레 뉘 비겁할소냐마는 비겁할소냐마는
죽는다 ---- 고만이라 ---- 이 허망한 생각 내 마음을 왜 꼭 붙잡고 놓질 않느냐


망각하자 ---- 해본다 지난날을 아니라 닥쳐오는 내 죽움을
아 ! 죽음도 망각할 수 있는 것이라면
허나 어디 죽음이사 망각해질 수 있는 것이냐
길고 먼 世紀는 그 죽음 다 망각하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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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를수록
세월이 흘러 갈수록
새로운 만남보다는 이별이 잦고
시작보다는 마무리에 보다 집중하게 된다.


쳇바퀴 돌듯 제자리를 맴도는 게 일상인 것 같지만
실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변화한다.


지나버린 시간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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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서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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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에 속삭이는 햇살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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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그랬다.
늘 마음만 서둘러
아직 멀리있는 너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봄은 아직 멀었는데
마음만 벌써
봄 너머로 가서는
봄이 오질 않는다고 또 보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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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노래한 수많은 시 중에서
이 시보다 더 아름다운 시를 아직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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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 매 단풍 들것네


                                      김영랑


"오 ―― 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불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 ―― 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 ―― 매 단풍 들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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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이미 이렇게 깊은 줄도 모르고
달력이 이제 겨우 한 장 더 붙어 있는 줄도 모르고

 

지금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도 모르고
내가 어디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

 

매년 오는 가을이 올해는 유난히 참 많이 깊었다.

내 얼굴도 그리고 내 마음도 참 많이 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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