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망초꽃


                      안도현


눈치코치 없이 아무 데서나 피는 게 아니라
개망초꽃은
사람의 눈길이 닿아야 핀다.
이곳 저곳 널린 밥풀 같은 꽃이라고 하지만
개망초꽃을 개망초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개망초꽃은 핀다.


더러는 바람에 누우리라
햇빛 받아 줄기가 시들기도 하리라
그 모습을 늦여름 한때
눈물 지으며 바라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 세상 한쪽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훗날 그 보잘것없이 자잘하고 하얀 것이
어느 들길에 무더기 무더기로 돋아난다 한들
누가 그것을 개망초꽃이라 부르겠는가
.............................................................

몇 달째 가뭄이 계속되고 있다.
이제 더는 버티지 못한 이곳 저곳에서 가뭄의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사실, 어리석은 우리는 가까이 있는 것의 고마움을 늘상 잊고 산다.
물도 그러하고, 공기도 그러하며, 햇빛도 그러하고, 음식도 그러하다.
만약 이것들이 없다면 불과 며칠도 버티지 못할 게 뻔한데...


우리는 사랑 없이 살 수 있다.
하지만 사랑 없는 세상에선 살 수 없다.
세상 만물이
누구에게나 다 필요한 것은 아닐지 모르나
필요없는 것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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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에 시쓰기

 
                          안도현


연탄불 갈아 보았는가
겨울 밤 세 시나 네 시 무렵에
일어나기는 죽어도 싫고, 그렇다고 안 일어날 수도 없을 때
때를 놓쳤다가는
라면 하나도 끓여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벌떡 일어나 육십촉 백열전구를 켜고
눈 부비며 드르륵, 부엌으로 난 미닫이문을 열어 보았는가
처마 밑으로 흰 눈이 계층상승욕구처럼 쌓이던 밤


나는 그 밤에 대해 지금부터 쓰려고 한다
연탄을 갈아본 사람이 존재의 밑바닥을 안다,
이렇게 썼다가는 지우고
연탄집게 한번 잡아 보지 않고 삶을 안다고 하지 마라,
이렇게 썼다가는 다시 지우고 볼펜을 놓고
세상을 내다본다, 세상은 폭설 속에서
숨을 헐떡이다가 금방 멈춰 선 증기기관차 같다
희망을 노래하는 일이 왜 이렇게 힘이 드는가를 생각하는 동안
내가 사는 아파트 아래 공단 마을
다닥다닥 붙은 어느 자취방 들창문에 문득 불이 켜진다
그러면 나는 누군가 자기 자신을 힘겹게도 끙, 일으켜 세워
연탄을 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리수출자유지역 귀금속공장에 나가는 그는
근로기준법 한줄 읽지 않은 어린 노동자
밤새 철야작업 하고 왔거나
술 한 잔 하고는 좆도 씨발, 비틀거리며 와서
빨간 눈으로 연탄 불구멍을 맞추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다 타버린 연탄재 같은 몇 장의 삭은 꿈을
버리지 못하고, 부엌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연탄냄새에게 자기 자신이 들키지 않으려고
그는 될수록 오래 숨을 참을 것이다
아아 그러나, 그것은 연탄을 갈아본 사람만이 아는
참을 수 없는 치욕과도 같은 것
불현듯 나는 서러워진다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눈발 때문이 아니라
시 몇 줄에 아둥바둥 매달려 지내온 날들이 무엇이었나 싶어서
나는 그 동안 세상 바깥에서 세상 속을 몰래 훔쳐보기만 했던 것이다


다시, 볼펜을 잡아야겠다
낮은 곳으로 자꾸 제 몸을 들이미는 눈발이
오늘밤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불이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나는 써야겠다,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지금 내가 쓰는 시가 밥이 되고 국물이 되도록
끝없이 쓰다 보면 겨울 밤 세 시나 네 시쯤
내 방의 꺼지지 않은 불빛을 보고 누군가 중얼거릴 것이다
살아야겠다고, 흰 종이 위에다 꼭꼭 눌러
이 세상을 사랑해야겠다고 쓰고 또 쓸 것이다
.............................................................................

삶이 아름답다고,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고 말하기가
왜 이리 힘든지...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신은 공평하다고 믿는 것이
왜 이리 공허한지...


'내일은 해가 뜬다'고 아무리 소리 질러보고 뛰어 봐도
왜 이리 가슴 한 켠은 서늘하기만 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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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강가에서


                   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

창밖에 무엇인가 반짝거리면서 흩뿌린다.
가만히 보니 눈이 온다.
눈이 온다고 하기보다는
은빛 가루가 뿌려진다는 표현이 더 가깝다.


한 해가 겨우 닷새 남고 보니,
지난 일이며, 얼굴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오랜만에라도 누군가에게 연락이 오면
저 눈가루마냥 반가울 듯한데...
목소리도, 어찌 사는 지도 궁금하긴 한데,
새삼스럽게 연락을 하자니 다소 부담스럽다.


조용히 한 해를 접어두자니,
자꾸만 자꾸만 궁금 주머니가 뒤집어 진다.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오랜만에 연탄재 쌓인 광경이 눈에 들어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셔터를 눌렀다.

바람이 차가와졌다 싶으면, 가끔 한 번씩

안도현 시인의 한마디가 매섭게 뒤통수를 후리고 지나간다.

 

'너는... 누구에게 단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혼잣말로 궁시렁거린다.

'나는 아마도 그러했을 것이다.'

논물 드는 5월에


                                   안도현

                                        
그 어디서 얼마만큼 참았다가 이제서야 저리 콸콸 오는가
마른 목에 칠성사이다 붓듯 오는가


저기 물길 좀 봐라
논으로 물이 들어가네
물의 새끼, 물의 손자들을 올망졸망 거느리고
해방군같이 거침없이
총칼도 깃발도 없이 저 논을 다 점령하네
논은 엎드려 물을 받네


물을 받는, 저 논의 기쁨은 애써 영광의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것
출렁이며 까불지 않는 것
태연히 엎드려 제 등허리를 쓰다듬어주는 물의 손길을 서늘히 느끼는 것


부안 가는 직행버스 안에서 나도 좋아라
金萬傾 너른 들에 물이 든다고
누구한테 말해주어야 하나, 논이 물을 먹었다고
논물은 하늘한테도 구름한테도 물을 먹여주네
논둑한테도 경운기한테도 물을 먹여주네
방금 경운기 시동을 끄고 내린 그림자한테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누구한테 연락을 해야 하나
저것 좀 보라고, 나는 몰라라


논물 드는 5월에
내 몸이 저 물 위에 뜨니, 나 또한 물방개 아닌가
소금쟁이 아닌가

..........................................................................................

 

얼마전 아마존을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우기가 시작되면서 아마존 습지에 물이 드는 모습을 생생하게 찍은
화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생명의 경이로움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는데요...


이 시도 어지간히 들썩들썩 들썩거리면서
생명의 소중함과 경이로움,
활력 넘치는 생명의 에너지를 이야기 해 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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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자면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 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 바다를 건너가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래, 사랑을 하기 위해 살자.


그래도 외로울 때,
마음에게 편지 한 장 적어 보자


느리게 느리게,
천천히 천천히
기다리다 마음을 접고,
바라보다 눈을 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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