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


가도 가도 아무도 없으니
이 길은 무인(無人)의 길이다.
그래서 나 혼자 걸어간다.
꽃도 피어 있구나.
친구인 양 이웃인 양 있구나.
참으로 아름다운 꽃의 생태여---
길은 막무가내로 자꾸만 간다.
쉬어 가고 싶으나
쉴 데도 별로 없구나.
하염없이 가니
차차 배가 고파온다.
그래서 음식을 찾지마는
가도 가도 무인지경이니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참 가다가 보니
마을이 아득하게 보여온다.
아슴하게 보여진다.
나는 더없는 기쁨으로
걸음을 빨리빨리 걷는다.
이 길을 가는 행복함이여.
................................................................

간밤의 세찬 비바람에 말끔히 씻긴 하늘


본디 여린 것의 온유(溫柔)와
본디 맑은 것의 순결(純潔)와
본디 푸른 것의 순수(純粹)와
본디 밝은 것의 진선(眞善)


세상 끝이 보일 듯한 멋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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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천상병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 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

'니'가 있어야
'너'도 있고
'나'도 있다.

'네'게로 갈 길도 가깝지 않지만
'내'게로 향하는 길도 아직 멀다.


그렇다면,
이기적으로 살기 보다
좀 이타적으로 사는 게
삶의 진리에
더 가까운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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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상병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일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

대면도 못해 본 시아버지 제사 마흔 여덟 해,
살았을 적 차라리 없는 게 나았던 지아비 제사 스무해 남짓,

어느새
옛부터 드물다는 나이를 맞은 어머니,
이만하면 할만큼 했다고
제사상 물려 놓고 돌아앉아 울고 또 우셨다.


그날,

홍역 앓듯 고열로 밤새 시달리던 날

새벽녘 꿈 길에
지친 기색의 아버지가 안개를 털고 들어섰다.


'아들아, 볼 면목이 없어 돌아간데이.
다시 아비와 아들로 다시 만날수만 있다믄 좋겠구마. 부탁한데이...'


내키지 않는 손을 내밀려다 굴러 떨어지듯 잠을 깼다.
차마 할 수 없었던 대답이 계속 입안에서만 까끄럽게 맴돌았다.


살아서는 알지 못하던 일
살아서는 하지 못하던 일을
죽어서는 알 수 있고
죽어서는 할 수 있을까?


그 날따라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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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상병 시인의 영원한 반려자 목순옥 여사가 별세했다.

 

 

 

 

언젠가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포스팅하면서 목여사님 얘기를 올렸던 것이 기억난다.

 

 

모 문학회 시상식 자리에 참석하셨던 것을 기억한다.

가까이 다가가서 인사를 드렸더니, 낯을 기억하시겠다는 듯,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꼭 잡으신다.

 

'선생님, 건강하시죠? ... 사실은 저도 '목' 가예요. ㅇㅇ이예요...'

 

금세 눈가가 글썽해진 선생님은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시면서 원망스럽게 말씀하셨다.

'에그... 왜 목가니...' '왜... 하필 목가니...'

나도 눈가가 뜨끈해졌던 기억, 선생님의 그때 얼굴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편안히 귀천하셔서 가서 아름다웠다고 천상병 시인과 말씀 나누세요...

부디 좋은 곳에 가셔서 평안하세요...

 

.....................................................................................................................

 

귀천 (歸天)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귀천 (歸天)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갈 대

 

                      천상병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나란히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까움을 달래며

서로 애터지게 바라보았다.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

 

몇 해전

모 문학회 시상식자리에서

목순옥 여사님을 뵙고는 반갑게 인사를 건냈다.

요즘 건강은 어떠시냐고... 나도 목가라고...

그러자 손을 꼭 잡으시더니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신다.

'왜 목가냐고...'

나도 그 말에 목에 멨다...

소풍이 아름다웠다고만 말하기엔

아직은 너무 목이 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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